이
내용은 대전대학교 윤창렬 교수님의 강의를 녹취한
내용입니다.
셋째마당,
고주몽의 혈통과 북부여의 국통계승
1.
고주몽의 혈통과 북부여의 국통계승
자, 2번째 단락으로 들어가 볼까요?
고리군왕 고진 해모수지이자야
槀離郡王 高辰은 解慕漱之二子也오
옥저후 불리지 고진지손야
沃沮侯 弗離支는 高辰之孫也니
개이토적만공 득봉야
皆以討賊滿功으로 得封也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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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군왕 고진은 해모수지이자야오. 해모수의 고향이 고구려라 그랬어요. 해모수의 고향 이름이 고구려 그래서 국호가 거기서 나왔는데 거기가 고리땅입니다. 고리.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고구려, 고구려 하지만 실제로 이 글자는 말이에요. 정확하게 리라고 발음을 해야 합니다. 고구리가 정확한 발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초창기에 역사학자들이 무식해가지고 고구려하니까 입에 익어버렸어요.
중국의 역사책인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에도요. 고구려라고 적어놓고 려자는 음은 리다. 이렇게 중국 사람들도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호삼성이라는 사람이 주석을 달 때 이 글자는 리로 읽어야 된다. 그런데 지금 분명히 우리는 고리라고 나오잖아요. 고리. 그래서 사실 이건 다 바로잡아야 되는데요. 고구리가 맞습니다. 고구리.
2.
해모수의 4대 직계 왕손
고리군왕 고진은 해모수지이자야오. 해모수의 맏아들은 당연히 모수리 단군으로서 북부여의 2대 임금이 되셨고 해모수 단군의 둘째 아드님이 있었어요. 그 분이 고진인데 그 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데 자기 아버지의 고향인 고리 땅에 군왕이 되셨습니다. 이 고리는 어디냐면 요하가 동요하와 서요하가 흘러나오는데요. 서요하 지역입니다. 서요하가 흘러내려오는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지손야라.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고주몽 성제를 분명히 알 수 있죠. 해모수라는 분의 첫째 아들은 모수리 단군이시고 둘째 아들은 고진이라는 분이시고요. 고진의 손자가 누구냐면 불리지라는 분이에요. 이 불리지라는 분과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고주몽 성제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되죠. 해모수의 직계혈통이에요. 나라도 북부여를 계승하고 혈통도 북부여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3.
위만조선의 왜곡
고진지손야니 개이토적만공으로, 모두. 모두는 고진이라는 분과 불리지라는 분이 모두 도적인 위만을 친 공으로서 그때 위만이라는 도적놈 하나가 우리나라 번조선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번조선의 일부분. 기준을 내쫓고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역사책 보면 전부 그것이 전부 고조선의 종통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아주 그건 잘못된 거죠.
우리 고조선의 정통은 북부여가 계승해서 잇고 그쪽에는 번조선 우리 고조선의 제후국이 있었는데 그것을 내쫓고 위만이 차지했는데 그걸 정통으로 갖다놓고 있는 아주 잘못된 것. 지금 역사책 보면 전부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득봉야라. 그러니까 이 고진이라는 분, 옥저후 불리지라는 분이 왕족이기 때문에 그런 고리 군왕에 봉해지고 옥저후에 봉해진 것이 아니라 도적인 위만을 쳐가지고 큰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봉함을 받았어요.
옥저라는 것은 말이에요. 4개의 옥저가 있는데 우리가 동옥저라고 하면 함경도 지방을 얘기합니다. 서옥저라면 저 만리장성 부근을 얘기합니다. 남옥저라면 요동반도를 얘기합니다. 북옥저라면 장춘지방을 얘기합니다. 지금은 옥저하면 전부 함경도라고만 얘기하는데 아주 이건 잘못된 겁니다.
4.
고주몽 성제의 탄생
불리지 상과서압록 우하백녀 유화
弗離支가 嘗過西鴨綠이라가 遇河伯女 柳花하여
열이취지 생고주몽
悅而娶之하고 生高朱蒙하시니
시즉임인 오월오일야
時則壬寅 五月五日也오
내한주 불릉 원봉 이년야
乃漢主 弗陵 元鳳 二年也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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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지가 상과서압록이라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났어요. 동압록은 압록강이에요. 우리가 지금 말하는 중국과 북한의 경계로 되어 있는 것이고요. 서압록이라면 이것이 서요하입니다. 요하 중에서도 서요하 임황을 지나가지고 이렇게 흘러나오는 상과서압록이라가 우하백녀 유화하여, 하백의 따님인 유화부인을 만났어요. 만나서 아마 첫눈에 반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열이취지하고 기뻐해가지고 아내로 삼았어요. 그러니까 중매를 거치지 않고 이게 아마 연애결혼이 되겠죠.
그래서 생고주몽하시니 이렇게 해서 고주몽 성제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으니 시즉임인년 오월오일야오, 이때가 임인년 5월 5일입니다. B.C 79년 음력 5월 5일 우리가 광개절이라고 하는데요. 우리가 3월 16일은 삼신상제님을 맞이해서 제사를 지내는 대영절 큰 대자 맞이할 영자 대영절이라고 하고 5월 5일은 광개절이라고 얘기를 해요.
5월 5일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단오날인데 고주몽 성제도 5월 5일 운초 계연수 선생이 이 환단고기 서문을 쓴 날도 5월 5일날 쓰고 있거든요. 광개절에 이걸 쓴다. 서문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죠. 5월 5일은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내한주 불릉 원봉 이년야
乃漢主 弗陵 元鳳 二年也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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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주 불릉 원봉 이년야라. 한주 한 나라 임금님 불릉이라는 사람 유불릉인데요. 한 무제의 막내아들이에요. 한 무제의 막내아들 소제가 되죠. B.C 87년부터 B.C 74년까지 제위에 있었는데요. 한주 불릉 원봉 이년, 즉 B.C 79년이다. 이걸 얘기하는 겁니다.
5.
고주몽 성제의 성장과정
불리지 훙
弗離支가 薨하고
유화 솔자 주몽 귀우웅심산 금서란야
柳花 率子 朱蒙하여 歸于熊心山하니 今舒蘭也라
기장 주유사방 택가섭원이거지
旣長에 周遊四方할새 擇迦葉原而居之러니
선어관가 위목마
選於官家하여 爲牧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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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지가 졸하고 이건 제후기 때문에 졸보다는 옆에 훙으로 고쳐야 된다. 제후가 돌아가시는 걸 훙이라고 얘기합니다. 불리지가 훙하시고. 유화 솔자 주몽하여, 유화가 아들인 주몽을 데리고서 말이에요. 귀우웅심산하니, 웅심산으로 갔어요. 여기가 너희 고조할아버지가 처음 머무시던 곳이다. 아마 이런 의미가 있겠죠. 웅심산에 있었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지금도 서란현이라고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기장에 이미 장성을 했어요. 고주몽 성제가 나이가 먹어서 장성하매 주유사방할새 사방을 두루두루 돌아다니죠. 사람이 한군데서만 살 수 없잖아요. 주유사방할새 택가섭원이거지러니, 가섭원을 택해서 머물렀다. 가섭원 우리는 북부여기에서 배웠습니다. 가섭원부여라고 얘기하죠.
중국의 한 무제가 쳐들어왔을 대 북부여의 네 번째 임금이 해우루 단군이 큰 역할을 못했어요. 그런데 의병을 일으킨 고두막한이 한나라 군대를 다 물리쳤어요. 물리치고는 북부여의 4대 임금한테 가서 “임금의 자리를 내 놓아라.”하니까 힘이 없으니까 임금의 자리를 내어놓죠.
그래서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단군이 되고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하니까 그러면 “너는 나의 제부가 되라.”해서 해우루의 동생인 그 해부루께서 저 가섭원으로 가서 제후가 되죠. 북부여의 제후가. 지금의 흑룡강성 통화연입니다. 하얼빈에서 동쪽으로 한참 가면 있는데요. 거기 가서 제후로써 내려가요. 그게 우리가 동부여다. 또는 가섭원부여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죠.
어떻게 거기까지 흘러가셨어요. 거기 가서 이제 사는데 그래서 가서 보니 선어관가하여 관가에 선발이 되었습니다. 동부여 관가에 선발이 되어서 위목마라. 막을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목동이 되셨네요. 목동이. 말을 치는 그런 역할을 하셨습니다.
미기 위관가소기
未幾에 爲官家所忌하여
여오이 마리 협보 도지졸본
與烏伊 摩離 陝父로 逃至卒本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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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기에 몇 기자죠. 이것은. 얼마 안돼서 위관가소기하여 이 관가에 시기하는 바가 되어서 너무 고주몽 성제가 똑똑하고 영민하니까 그때의 여러 왕자들이 시기를 했다 그러죠. 시기를 해서 죽이려고 그러니까 이제 도망을 갑니다.
6.
북부여를 계승받은 고주몽 성제
여오이 마리 협보로 이 세 사람의 아주 절친한 친구들과 더불어 도지졸본하시니 도망을 해서 졸본에 이르시니 졸본. 광개토대왕 비문엔 홀본이라고 돼있어요. 홀본. 졸본. 홀이라는 것은 우리말로 무슨 골, 무슨 골 할 때 골의 뜻인데요. 바로 이 졸본이 고구려가 건국된 곳인데요. 이것은 두만강 위에 있는 유분하시 서성산으로 잡아야지 절대로 길림성 환인현 오녀산성으로 잡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지금 뭐 100% 다 그렇게 잡고 있어요. 강단사학에서는.
적 부여왕 무사
適에 夫餘王이 無嗣라
주몽 수이왕서 입승대통
朱蒙이 遂以王婿로 入承大統하시니
시위고구려 시조야
是謂高句麗 始祖也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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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부여왕이 무사라. 마침 부여의 왕이 아들이 없었어요. 바로 고무서 단군이죠. 고두막한의 아드님인 북부여의 여섯 번째 단군 B.C 60년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가지고 B.C 58년에 2년밖에 살지를 못했어요. 아들이 없었어요.
주몽이 수이왕서로, 주몽께서 드디어 왕의 사위로서 이 고무서 단군은 딸이 세 분이 있었다고 그러는데요. 두 번째 딸이 소서노고 그 소서노와 고주몽 성제가 결혼을 하죠. 결혼을 해서 북부여의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됩니다. 둘째 사위가. 이렇게 들어가셔 가지고 왕서로서 드디어 왕서는 사위로서 아들이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입승대통하시니 들어가셔 가지고 대통을 계승하셨어요. 그러니까 북부여의 일곱 번째 단군이 이렇게 되시는 거죠. 시위고구려 시조야시니라. 이 분이 고구려의 시조인 것이니라.
그래서 이 고구려의 건국은 B.C 58년으로 잡아야 되고 더 소급해가면 B.C 239년 해모수의 건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삼국사기에는 B.C 37년이라고 돼있는 것은 그것은 고주몽 성제가 B.C 58년에 다물이라는 연호를 쓰고 37년에 평락이라는 연호를 쓰는데 아마 그 평락이라는 연호를 쓴 때부터 기록을 한 것 같아요.
김부식이가 “어떻게 신라보다 더 앞설 수 있느냐”해서 신라가 57년에 건국되고 고구려는 B.C 37년에 건국되는 것처럼 고구려를 좀 의도적으로 내려 깎으려는 뜻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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