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용은 대전대학교 윤창렬 교수님의 강의를 녹취한
내용입니다.
넷째마당,
고주몽 성제 때의 통치영역과 대도의 말씀(道言)
1.
고구려의 천도과정
삼십이년 갑오 십월 벌북옥저 멸지
三十二年 甲午 十月에 伐北沃沮하여 滅之하고
명년 을미 자졸본 이도눌견
明年 乙未에 自卒本으로 移都訥見하니
눌견 금상춘 주가성자야
訥見은 今常春 朱家城子也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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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이년 갑오 십월에, 58년부터 32년째 되는 때를 따지면 갑오년이 나오는데요. B.C 27년입니다. B.C 27년 십월 달에 벌북옥저하여 멸지하고 북옥저 이곳이 장춘지방이에요. 북옥저를 정벌해서 멸하고 명년 을미에 명년이면 B.C 26년이 됩니다.
을미에 자졸본으로 졸본으로부터 이도눌견하니 졸본은 저 유분하시에서부터 도읍을 눌견으로 옮겼다. 눌견은 우리말로 늘봄이예요. 늘봄. 항상 봄이다. 이런 뜻으로서 지금의 상춘 주가성자야라. 상춘. 상춘이라는 게 늘봄 아닙니까? 항상 봄이다. 지금은 장춘이라고 쓰죠. 그러니까 장춘의 어원이 거기에서 나온 거예요. 주가성자야라.
유리명제 십구년 우자눌견
琉璃明帝 十九年에 又自訥見으로
이도우국내성 역왈황성
移都于國內城하니 亦曰皇城이오
내유환도산 산상축성 유사즉거지
內有丸都山하여 山上築城하니 有事則居之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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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명제 십구년에 돼있는데요. 이것은 다른 책에 전부 이십일년으로 다 바꾸어져 있습니다. 유리명제 이십일년으로 해야 되는데요. 그러면 A.D 2년이 됩니다. 19년에 우자눌견으로 이도우국내성하니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집안현 통구죠. 지금은 집안시가 됐죠. 그 집안도 말이에요. 집밖이 아니라 집안이다. 그런 뜻에서 왔다고 그럽니다. 바로 고구려의 A.D 2년부터 거의 427년까지 425년 동안의 그 수도가 국내성이죠. 이게. 국내성.
국내성하니 역왈황성이요. 또한 황성이라고 이르렀고 내유환도산하여 안에 환도산이 있어가지고 산상축성하니 산 위에다가 성을 쌓으니 유사즉거지라. 일이 있으면 거했다. 이건 고구려의 굉장히 특징적인 거예요.
고구려는 말이예요. 평양성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구요. 국내성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국내성이 있어요. 있고 산에다가 산성을 쌓아놓습니다. 지금은 환도산에다가 환도산성을 쌓아놓고 전쟁이 벌어지면은 산성에 거합니다. 그게 고구려의 특징이예요. 지혜로운 거죠. 평지에 황성을 쌓아 놓고 전쟁이 터지면 산성으로 옮겨가는건데 고구려의 아주 특징적인 거예요. 有事則居之 전쟁이 있으면 가서 거했어요. 근대 국내성에는 환도산이 있었고, 환도산에 환도산성을 쌓아놓고 있었습니다.
대무신열제 이십년 제 습낙랑국
大武神烈帝 二十年에 帝 襲樂浪國하여
멸지 동압록이남 속아
滅之하니 東鴨綠以南이 屬我하고
독해성이남 근해제성 미하
獨海城以南 近海諸城이 未下라
산상제 원년 견제기수
山上帝 元年에 遣弟罽須하여
공파공손도 벌현도낙랑 멸지
攻破公孫度하고 伐玄菟樂浪하여 滅之하니
요동 실평
遼東이 悉平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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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민족의 역사 왜곡
大武神烈帝 二十年에 대무신열제는 고구려의 3대 임금 아닙니까. AD18~44년까지 제위해 있었던 분인데요. 자, 우리는 여기서 고주몽성제, 유리명제, 대무신열제. 그런데 지금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면 뭐, 동명성왕, 유리왕, 대무신왕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겁니다.
고구려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고주몽성제가 다물라는 연호를 쓰고 평락이라는 연호를 쓰고, 이렇게 “천하의 중심이 고구려다.” 남의 속국의 역할을 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황제라는 帝 칭호를 놔뒀는데, 중국의 사서를 봐도 고구려의 帝자가 나오거든요.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왕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도 모화사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나라 역사를 의도적으로 폄하한, 그러니까 삼국사기의 공과 과가 있는데 삼국사기가 없었으면 그나마 우리나라 역사가 없어졌다라는 중요성이 있지만 이렇게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정을 다 깎아
버렸어요.
그러니 우리민족의 역사 왜곡은 이게 김부식의 삼국사기부터 그전부터 내려왔으니까 이게 하루아침에 안 잡힙니다. 개벽되기 전까지는 잡을 수가 없어요. 10년, 20년, 30년 왜곡된 것이 아니라 1000년, 2000년 왜곡이 되어 왔으니까 어떻게 그걸 바로잡습니까? 전부 烈帝로 되어있죠. 정말 위대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AD37년이거든요.
3.
낙랑군과 낙랑국
帝 襲樂浪國하여 滅之하니 대무신열제가 낙랑국을 습격해서 멸해버렸습니다. 그러면 낙랑군과 낙랑국은 절대로 혼동되어서는 안되요. 낙랑군이라는 것은 하북성 상려현 근처에 있던 지명이구요. 낙랑국이라는 것은 우리 북부여기에서 배웠죠. 잠깐 살펴볼까요?
79페이지를 보십시오. 三世檀君高奚斯 在位四十九年이라 이게 169년인데 정월에 낙랑왕 최숭이 말이예요. 納穀三百石于海城하다. 곡식 삼백석을 해성에다가 들였다. 해성은 신양 밑에 영구시하고 신양시하고 영구 쪽으로 치우친데 요동 반도죠. 해성시가 있습니다.
남옥저죠. 이보다 앞서서 169년보다 앞서서 최숭이 낙랑산으로 낙랑산이 하북성 창여지역에 있던 산이예요. 낙랑군은 그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自樂浪山으로 載積珍寶而渡海하여 진귀한 보물을 쌓아 싣고 도해하야 발해만을 건넙니다. 바다를 건너서 지마한 이때 마한은 말이예요. 익산에 있는 마한이냐, 아니면 평양이냐? 평양입니다. 우리가 익산의 마한은 중마한이라 하는 거구요. 고조선시대 때는 진한은 하얼빈, 번한은 당산시, 마한은 평양에 있었어요. 처음 봉해진 그래서 都王儉城하니 그래서 왕검성에 도읍했어요. 평양에 성을 쌓고 그 성을 왕검성이라 이름을 붙힌겁니다.
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라. 그러니까 해모수 병오동은 BC195년이예요. BC195년부터 AD37년까지 그러면 이게 얼마입니까? 232년이죠. 232년동안 평양을 중심으로 해서 낙랑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최씨낙랑국!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호동 왕자가 낙랑 공주하고 사랑을 해서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어서 고구려가 낙랑왕. 그때 최리죠? 최리를 멸망시키고 낙랑국이 망했다 했던 그 낙랑국이 여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낙랑군과 낙랑국을 많이 혼동하고 있어요.이건 별도, 별개의 얘기입니다. 낙랑국 BC 195년부터 AD37년까지 232년 동안 평양을 중심으로 저 번한의 부자였던 최숭이라는 사람이 세웠던 나라입니다.
滅之하니 東鴨綠以南이 屬我하고. 자! 동압록이라 나오잖아요. 동압록은 지금의 압록강, 서압록은 서요하. 동압록 이남이 屬我 우리에게 다 속하고 屬我하고,
獨海城以南 近海諸城이 未下라. 오직 해성 이남의 근해 저 바다 가까이에 있는 여러 성이 항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거기까지 최숭의 낙랑국의 세력이 미쳤는데요. 수도는 망했지만 변경에 있던 사람들이 항복하지 않았던 겁니다. 최숭의 낙랑국 사람들이 이건 대련근처입니다. 해성 이남이면 완전히 요동반도죠.
山上帝 元年에 산상제라는 것은 고구려의 10번째 임금인데요. 197~227년까지 30년동안 있었던 분인데, 산상제 원년이면 197년이 되겠습니다. AD197년에 遣弟罽須하여 동생인 개수장군을 보냈어요.
공파공손도하고 공격해서 공선도를 격파합니다. 자 여기에 사연이 많죠. 고국천황이 있고 그 동생이 발기고, 그 밑에 동생 연우, 그 밑에 동생 계수 사형제가 있었는데, 고국천황이 돌아 가셨어요. 그 부인 우씨가 먼저 발기를 찾아갑니다. 이렇게 임금이 돌아가시고 “당신이 왕이 되는게 어떠냐?” 하니까 “아녀자의 몸으로 어떻게 국사를 논할 수 있느냐!”하고 화를 내고서 내 쫓아
버렸어요.
그러자 그 밑에 동생인 연우장군한테 얘기를 하니까 그걸 흔쾌히 받아 들입니다. 그 당시에는 형님이 돌아가면 형님의 동생이 아내를 취하는 그러한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씨가 고국천황의 황우인데 산상제인 연우장군하고 결혼을 하구요. 임금에 올랐어요. 10번째 산상제거든요. 그러니까 산상제 형님인 발기가 “아니, 내가 형인데 어떻게 네가 왕이 되냐?”해서 고구려의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요동의 유력한 세력자였던 공손도에게 가서 의탁해서 군사를 빌려가지고 고구려를 쳐들어 와요. 그래서 환단고기 단군세기 서문에도 남생발기짐 逆心하여 발기라는 분이 그분인데, 그렇게 해서 쳐들어 오니가 상산제가 이름이 연우죠. 자기 동생 계수에게 “가서 쳐라!” 그러니까 싸워요. 그러니까 형제끼리 싸움이 벌어졌어요. 발기가 대패를 합니다. 형님을 살려주고 계수장군이, 그리고 발기는 자살을 하고. 그게 197년 사건이죠. 그래서 원년에 견제기수 동생 계수를 보내서 공파공손도 공손도를 공격해서 격파했습니다.
그리고 伐玄萄樂浪 滅之하니 현도낙랑을 정벌해서 멸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나라가 아니라 그 당시의 어떤 제후였었죠. 쭉 내려오던!
여기에서 낙랑이 우리는 한사군이라는 것은 역사에 없었습니다. 한사군은 없었구요.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에 고구려의 장군들을 명해서 자치사국를 만들거든요. 한나라의 식민지가 아닌 우리 민족의 자치사국 중에 낙랑국이 있었던 거죠. 낙랑국이 이때 망하게 됩니다.
낙랑국이 197년에 遙東이 悉平하다. 요동이 다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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