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한국인의 ‘한(恨)의 정서’를 헤아려야 한다
한국 연구 40여년, 日 문화인류학자 이토 아비토 교수
주간동아
이토 아비토(伊藤亞人) 도쿄대 명예교수는 40여 년간 한국을 연구해온 문화인류학자다. 1968년 도쿄대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부터 전남 진도를 시작으로 경북 안동 등지에 장기 체류하며 철저한 현장조사(필드워크)에 기반해 한국의 전통 문화를 연구했다. 식민지 지배 이후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연구한 1호 문화인류학자이기도 한 그는 2003년 한국 정부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최악의 한일관계를 맞고 있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최근 한국을 찾은 그를 서울에서 만났다.
오랜 시간 양국의 문화적 차이에 천착해왔기 때문일까. “작금의 한일관계를 보면 절망 뿐”이라는 기자의 하소연 같은 말에 그는 예의 너그러운 표정으로 “그건 국가적 관점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국가 이전에 국민들의 관계와 삶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먼저”라며 “오히려 이번 기회를 통해 한일 양국민들이 서로의 정신세계를 깊이 알아가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도 했다.
공감능력 부족한 日 엘리트

한일관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1차적으로 일본 내부에 대한 비판에 닿아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감각이 얇은 층이 엘리트, 즉 정치나 경제 분야 인사들일 것”이라며 “아시아 대륙에 대한 소양이나 경험도 적다보니 한국인들의 마음을 읽으려는 이해나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했다.
-일본 사회가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나.
“지정학적으로 섬나라이고 동아시아 주변에 있다보니 체계적이고 보편성 있는 세계관이나 인간성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 섬나라라는 폐쇄성은 다른 사회와 협조하며 배려해 같이 산다든지 하는 관념을 모자라게 만든다. 내부 집단에서 찍히면 섬 밖으로 추방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내부를 중시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유럽만 해도 기독교적 사랑이나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있는데 일본은 구체적인 물건(物)이나 일(事). 작업이나 상황에 따른 행동이나 실천을 중시했다. 추상적 관념적 사고를 배격하는 문화가 근대화를 이끈 장점이기도 했지만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는 약점이기도 했다.”
-선생은 7월24일자 일본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의 ’한(恨)‘의 정서를 헤아려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일본인이라 해도 ‘한의 정서’를 언급한데 대해 놀랐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이란 무엇인가.
“그게 정신학상 아주 애매한 말이다(웃음). 일본인들은 잘 이해하기 어렵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도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 내가 이해하는 ‘한’이란 ‘억울한 느낌’이다. 머리로는 납득이 되는데 마음으로는 안되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이런 정서를 이해하게 된 건 진도에서의 오랜 현장조사 경험에서 나온 거다. 진도는 사색당파로 중앙에서 떨려 나와 한에 가득한 사람들이 많았다. 씻김굿이란 것도 그것을 해소. 극복하는 일환 아니었나.”
그는 그러면서 아베 신조 총리 등 일본 집권세력이 지난해 10월 징용배상 판결이후 한국 정부를 압박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거론하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대해서도 “일본인들이 너무 법해석에만 집착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법이 유효한 것은 맞지만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된 한반도 사람들에게는 서구식 법만으로는 명쾌하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그게 바로 한의 감정이다. 한반도 사람들 마음속 감정을 잘 헤아려서 일본은 오만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기분을 헤아리는 ‘측은지심’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법비(法匪)소리를 들을 것이고 서로에게 불행한 상태가 계속될 것이다. 전쟁을 아는 과거 일본 정치가들 중에는 깊은 반성을 포함해 아시아에 대해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의 엘리트들은 이런 따뜻한 정을 갖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상대의 억울함 풀어주지 못하면 오만해진다
들노래. 과거에 대규모의 모내기나 공동모내기를 할 때에는 악기를 들고 나와 모내기 노래(상사소리)에 맞춰 모내기를 하였다. 문화재로 보존하기 위해 논에서 재현했을 때의 모습. 진도 인지리. 1972년.
-‘법비’가 뭔가.
“공자가 법가의 오만을 훈계한 개념이다. 보편적인 가치체계를 생각하지 않고 법리만 따져 형식적으로 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법만 갖고는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어도 사람들의 억울한 심정까지 치유할 수는 없다. 상대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하면 오만해진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성의와 진심이 있어야 한다. 지금 아베 정부의 모자란 점이다.”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교수까지 지낸 그는 겉만 보면 일본 사회 주류로서 모범생의 길을 걸어온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한국 연구가 불모지였던 시절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해 일관되게 걸어왔다는 점에서 이단아적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내가 진도 연구를 시작한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의 매스컴은 한국을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독재만 강조하면서 어두운 면만 보도했다. 일본 지식인 사회는 박 정권을 비난하면서 한국과 얽히는 걸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동경대학만 해도 한국 연구를 하는 것 자체가 독재체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런 의식의 밑바닥에는 식민통치라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심리도 당연히 깔려 있었다.”
비록 한국에 대한 무관심과 비판의식이 팽배했지만 당시 일본인들 삶 속에는 한국과 한국인의 삶이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나만해도 숙부가 일제 때 경성(京城)에 살았고 외가에는 조선인 하숙생도 있었다. 그가 고향에 갔다가 돌아올 때 선물로 가져온 고추명란젓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 동경대 스승인 이즈미 선생도 조선에서 태어났고 경성제국대학 출신이었다. 4학년 수업 때 선생이 한일국교정상화 직후인 1967년, 한국에서 찍은 무속 의례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게 내 운명을 바꿨다. 평소에도 민속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무속 의례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한국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들었다.”
-진도와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나.
“1972년 여름방학 때 서울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있었다. 해방 후 처음 동경대 연수를 왔던 이두현 선생이 진도 모내기 들노래 행사에 같이 가자고 해 따라 나섰다. 진도 들노래는 이듬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전통을 잘 보존한 풍습이었다. 처음 가본 곳이었지만 너무 아름다웠다. 민속 문화가 매우 풍부하고 서화전통을 비롯해 예술적인 토양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삶에 포착한 일본인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마을사람들이 한 잔 두 잔 권하는 술을 모두 받아 마시다가 만취하기 일쑤였다. 누군가가 필자의 사진기로 1972년 가을에 촬영. 뒤편의 기와집은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 당시에 세워진 공회당.
이토 선생이 장기 체류를 하며 현장연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진도 사람들은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마을에서 나를 받아 줄지 말지 회의가 열렸을 정도였다. 동장 어르신께 허락을 받으러 갔는데 5~6명의 다른 어르신들과 젊은 이장이 다 모여 있었다. 가장 문제된 게 음식이었다. 매운 거 먹다가 병에라도 걸리면 누가 책임지느냐는 거였다. 어르신 중 한 분은 내가 식당에서 ‘덜 맵게 해 달라’ 주문하는 걸 봤다면서 ‘매운 것도 못 먹는 사람이 무슨 연구를 하겠다는 거냐’고 반대했다. 동장 어르신은 ’일본 젊은이들이 미국 영향을 받아 히피문화가 유행하고 있다는데 마을 젊은이들에게 난잡한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라고도 했다.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았다. 주위가 어둑해질 무렵 갑자기 식사가 나왔는데 나는 이때다 싶어 김치를 입에 가득 넣고 맛있다는 듯 먹었다. 그러자 다들 표정이 확 바뀌면서 “괜찮겠네!”라는 말과 함께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순식간에 허락 결정이 내려졌다.”
숙소도 이장 집으로 결정됐고 읍내에서 이불만 사오는 걸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했다.
그의 진도생활은 2010년 펴낸 연구서 겸 에세이 ‘그리운 한국마을’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포대기에 동생을 업고 있는 누이의 모습이나 방아를 찧는 모습 등 초가집에서 정겹게 살고 있는 그 시절 진도 사람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 중의 한 대목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모두 호롱불로 생활했다. 10일장에 가려면 40~50분 정도 걸었는데 조금 여유 있는 집에서는 마리당 10원인 갈치를 세 네 마리 사곤 했다. 대부분 밭에서 수확한 것만 먹는 자급자족이었는데 밥, 김치, 된장국이 전부였다. 고추를 시장에 내다 판돈으로 성냥, 비누, 소주, 고무신을 사거나 애들 공책을 샀다. 겨울이 되어 야채가 없어지면 시래기나 보리 잎을 국에 넣었는데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목욕과 술이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겨울에는 더운 물을 데워 세숫대야에 담아 썼고 여름에도 우물가 물로 닦는 정도였다. 옷 입은 상태에서 목 등까지 닦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웃음). 어느 집이나 막걸리를 만들어 먹었다. ‘술을 먹어야 힘이 난다’며 모내기철이 되면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한 사발씩 마셔 아침부터 취해 혀가 잘 돌아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을에 결혼식이 있을 때는 나도 피할 수가 없었다.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고 쓰러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는 일제시대를 경험한 마을 사람들 이야기도 많이 들으면서 한국인이 갖고 있는 대일감정의 뿌리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마을에는 오사카에 살았던 노부부도 있었는데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오사카 거리를 꿈에서도 본다고 했다. 또 오키나와 사탕수수밭에서 일했던 분도 있었고 홋카이도 탄광에 일하러 갔다가 조선인 광부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도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 미쓰이(三井)같은 큰 회사가 그렇게 비인도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내게 절실하게 말했던 어르신 모습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한국은 남북 모두 개인주의가 강한 사회
이토 선생은 한국과의 직접 경험이 많은 사람답게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에 대한 이해도 남달랐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친일 반일 이분법 잣대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한국인의 대일 감정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난 역사를 생각하면 한국인 누구나 화나는 건 당연하다. 다만 그걸 입으로 직접 이야기할지 말지 개인차가 있을 뿐이다. 일본 말도 능숙하지 않아서 잘 전달되지 않는 것도 있고. 또 한국인들에게도 반일 감정만 있는 게 아니고 일본을 관찰하고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았다. 대다수가 일본인은 정직하다든가 친절하다든가 부지런하다고 인정한다.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인들의 감정은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런 걸 이해하지 않고 한국인들이 무조건 일본을 미워한다, 원망한다 생각하는 건 반성은 하지 않고 스스로 후퇴해 버리는 행위다.”
-선생 세대만 해도 한국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요즘엔 한국이 정권에 따라 너무 왔다 갔다 한다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말하는 일본인들도 많아졌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국론통합이 어려운 사회였다. 옛날부터 국제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협조파와 우리 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주체파가 있었지 않았나. 정권이 바뀌어 정책이 바뀌는 것도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나는 한국이 퍼스널리즘(개인주의)을 중시하는 사회 즉 제도나 조직보다 개인을 중요시하는 사회라고 본다.”
그의 이런 분석은 북한에까지 적용된다. 도쿄대 정년퇴임 후 오키나와 류큐 대학을 거쳐 2009년 와세다 대학으로 적을 옮기면서 북한 연구에도 매진했기 때문이다.
3년여 동안 매달 한번씩 서울에서 탈북자 15명과 집중적으로 만나 대화하고 1인당 30~40여 편 수기를 모아(450여 편) 지난해 ‘북한인민의 생활’(일본어판)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집필까지 합하면 꼬박 6년이 걸린 셈이다. 이념의 잣대를 걷어내고 제3자의 시선으로 본 남북한의 의식구조를 볼 때 개인주의적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분단 70여 년이 지났고 서로 다른 체제 아래 살고 있지만 국가, 사회가 만든 제도, 조직에 순응하기보다 '개인'이 스스로 결정해 행동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경향이 남북 모두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도 안을 들여다보면 엄격한 조직이나 제도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겠다는 ‘퍼스널리즘’이 식량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게 했던 동력이었다. 그러다보니 뇌물, 도둑질 등 다양한 형태의 ‘비공식’이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틀이 되어 버렸는데 그대로 두면 체제 유지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김정은 시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예의 주시하는 대목이다."
한일 관계를 낙관하는 이유

그는 무엇보다 향후 한일 관계를 낙관했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 젊은이들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한국이 좋으면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옛날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일 관계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었잖은가. 옛날에도 관계가 안 좋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젊은이들이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국에서 일고 있는 불매운동이 오히려 너무 주변을 의식하는 행동처럼 보인다.”
-일본 젊은이들이 오히려 정치에 너무 무관심해서 탈이라고 하던데.
“자기가 소속된 지역이나 사회, 집단, 회사, 친구 커뮤니티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중앙 정부. 국가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속한 집단 내부에서의 폴리틱스(정치)는 중요하지만 국가 레벨의 정치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 한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매스컴이 화제로 삼아도 일본인들은 담담하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개인적인 삶에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라 말도 된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 같은 때야말로 국가의 일과 개인의 일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사이의 문제는 주권 국가로서 국익을 주장하고 양보하지 않는 게 엘리트의 역할이니까 해결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국민들의 태도가 중요하다. 일본과 한국은 형제지간처럼 싸우면서 살아왔다. 이참에 상대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지식인의 역할이기도 하다. 한국을 정말 사랑하는 일본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걸 한국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내 이웃집에는 일제시대 때 결혼하자마자 전남 보성으로 건너가 교사생활을 했던 부부가 있다. 요즘 한일관계가 좋지 않다보니 자신들이 조선에서 바쳤던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 같아 속상해 한다. 실제로 그 부부처럼 일제시대 때 직업의식을 갖고 학생들을 성의껏 대했던 일본인 교사들도 많았다. 식민지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 안에서 뜻을 가지고 살았던 일본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본다.”
-요즘에는 선생처럼 애정을 갖고 한국을 공부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인다.
“역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굳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로 한국을 공부하는 사람도 많고 한국 여행도 정말 많이 간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갑자기 열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내 몸을 누군가 선뜻 잡아줬다.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깜짝 놀랐다. 스마트폰을 보니까 한국어를 읽고 있어서 물었더니 역시 한국인이었다. 30대 청년이었는데 일본이 너무 좋다고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직접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여행으로 체험한다. 옛날에는 다 엘리트들이 독점했던 것들이다. 엘리트는 어떤 면에서 브로커였다. 한국과 일본 국민이 직접 만나면 자기들의 정체성이 없어지니까 관계를 독점화한거다. 하지만 이제는 국민들이 직접 만나 브로커가 필요 없어진 시대다. 오히려 브로커들이 문제꾼들이다(웃음)”
22일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식이 있었다. 시종일관 평화의 메시지를 던진 새 일왕은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이지만 부친 아키히토 일왕으로부터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토 선생은 한국과 한국인의 정신을 몸으로 체험한 1세대이지만 이제는 일본에도 한국을 체험한 이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과연 그가 말하는 ‘한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새 일왕의 평화의 메시지가 과거 일본 제국주의시절 주변국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공감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주간동아 2019.10.18 12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