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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벤키족(퉁구스 족) 부여와 곰 고을의 사람들

송화강 2020-06-05 (금) 20:58 4년전 2881  

예벤키족(퉁구스 족) 부여와 곰 고을의 사람들

운영자
2013.10.22 10:05:19
 

부여와 곰 고을의 사람들


진(秦)나라 때 박사를 지냈던 복생(伏生)의『상서대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해동에 있던 모든 오랑캐들은 모두 부여의 족속들이다(海東諸夷 夫餘之屬)."

이 기록은 주로 진한(秦漢) 시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즉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시대를 넘어서 있는 기록이기는 하지만 기원전 2세기 이전의 한족(漢族)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물론 이 책은 『한서(漢書)』와 같이 신뢰할 수 있는 사서는 아니다.

 역사서는 한(漢) 나라를 기점으로 크게 발달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기록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무리지만.

 다만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을 다만 참고로 할 뿐이다.

11세기 송나라 때 증공량(曾公亮) ·정도(丁度) 등이 편찬한 『무경총요(武經總要 : 1044)』라는 책이 있다.

 

 무경총요(武經總要)

북송 인종(仁宗)대인 1044년 군사 교련의 교재로서 증공량(曾公亮)과 정도(丁度)가 황제의 명을 받아 편찬한 대형 병서로서 전집(前集) 20권, 후집(後集) 20권이다. 이전의 병서를 집대성하고 새로운 군사 정보를 추가하였는데 그 내용은 군사조직, 제도 훈련, 행군, 숙영, 진법, 작전 등에 걸쳐 있을뿐만아니라 수성(守城) 및 각종 군사 무기에도 그림과 함께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특히 이 시대가 화약 병기가 처음으로 도입되는 시기였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어 이 무기의 복원 등에도 큰 도움을 준다. 이 책은 조선 명종대 명나라에서 들어와 이후 조선에서도 이를 요약한 '무경절요(武經節要)'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방대한 군사상의 기술서(技術書)로 무려 40권에 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 "발해가 부여의 별종으로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라고 한다.

이 책은 사서(史書)가 아니라 병서(兵書)이기 때문에 내용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병서이기 때문에 오히려 주변 민족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어서 신뢰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부여는 일반적으로 고조선과 동시대에 있었던 나라이고 고조선이 멸망(BC 108)한 이후 예맥권을 지탱한 핵심 세력으로 파악되고 있다.

부여는 BC 2세기경부터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494년까지 존속한 나라로 나타나 대체로 700~1000여년을 존속한 쥬신의 대표적인 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서에서 부여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라고 한다.

『사기』의 기록을 보자."무릇 연나라는 발해(勃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있는 나라로 … 북으로는 오환(烏桓)과 부여에 인근하고 동으로는 예맥, 조선, 진번 등으로 이해가 서로 통한다."

여기서 나타난 말들 가운데 오환, 예맥, 조선, 진번 등은 두루두루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東夷) 즉 쥬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서대전』의 견해를 따르게 되면, 이 동이들의 원류가 모두 부여라는 말이 된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오히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부여의 기록만큼 일관성이 없고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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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지도

 

이와 같이 부여는 『사기』에는 부여(夫餘)로 나타나지만,『산해경(山海經)』에는 "오랑캐의 나라인 부여의 나라가 있어(有胡不與之國)"라는 말이 있어 불여(不與)로, 『일주서(逸週書)』에서는 부루(符婁), 『논어주소(論語注疏)』에서는 부유(鳧臾)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해경(山海經)은 요(堯), 순(舜)시대에 나온 책으로 동양 최고(最古)의 지리서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 요(堯)·순(舜)시대는 인간의 힘이 미약하여 자연재해에 시달리며 크나 큰 어려움을 겪고 살던 시기이다. 그 중에서도 물난리는 매년 끊이지 않고 되풀이되며 크나 큰 피해를 끼치는 가장 크고 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서운 재앙이었다. 요(堯)임금 때 큰 홍수가 자주 일어나 세상이 물 속에 잠기고 온갖 살림이 떠내려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 등 백성들이 고통받는 일이 잦자 곤(곤)에게 치수(治水)의 임무를 명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에 다시 순(舜)임금이 곤(곤)의 아들 우(禹)에게 일을 맡겨 결국 치수에 성공하고 이런 우(禹)의 업적과 사람됨에 감복한 순(舜)임금이 우(禹)에게 자리를 선양하여 우(禹)의 하왕조(夏王祖)가 일어나게 되는데 산해경은 이러한 치수(治水)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얻은 지식들을 엮어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물난리를 수습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강 폭을 넓히고, 새 물길을 내거나 수심을 깊게 만드는 등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사업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일은 어느 한 곳만을 넓히거나 보강해서 될 일이 아니라 강의 상류에서 하류까지, 강과 연결된 수 많은 지류들까지 모두를 다 종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치수사업은 강과 시내를 따라 전 강역에 걸쳐 벌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가보지 못했던 강의 상·하류지역까지 나아가 그 곳의 풍토와 다양한 산물들, 동·식물들을 보게 되었고 이런 탐사와 치수사업과정에서 접촉하게 된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그 곳의 지리, 신화·전설 등을 보고 들은 후 기록해 놓은 것들이 모여 산해경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말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이 말들이 무엇인가 공통된 것 즉 불(Fire)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불은 태양(Sun)의 또 다른 모습이므로 부여라는 것은 태양 또는 하늘의 자손[천손족(天孫族)]이라는 의미이다.


저는 앞에서 부여의 어원 등에 대한 말씀을 드린 바 있지만, 그 동안 반도사학계에서는 부여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왔으므로 일단 여기에서 소개해 두고 넘어 가겠다.


첫째 부여는 밝(神明)에서 유래하여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 夫里)로 변하였다는 견해가 있는데 제가 위에서 분석한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파악된다.

둘째, 부여를 사슴과 연관시키는 견해가 있다.

 즉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자리를 잡았다(初夫餘居于鹿山)"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녹산의 녹(鹿) 즉 사슴을 만주어로는 뿌우(Puhu), 몽고어로는 뽑고(Pobgo) 라는 식으로 부여를 사슴의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다.

 

 자치통감 (資治通鑑 중국 역사서) 중국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1019~86)이 찬술했다. 처음에는 전국시대에서 진(秦)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까지의 편년사인 〈통지 通志〉 8권을 지어 영종(英宗)에게 바쳤는데, 1066년 서국(書局)을 설치하여 계속 편찬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유서(劉恕)·유반(劉攽)·범조우(范祖禹) 등의 도움을 받아 1084년(元豊 7)에 완성했다. 신종(神宗)은 "지난 일을 거울삼아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체 294권이고 별도로 고이(考異)·목록이 각 30권씩이다. 전국시대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때(BC 403)부터 오대(五代) 주나라 세종(世宗) 때(959)까지 1,362년 간의 역사를 기록했다. 사료로는 정사(正史) 외에도 야사(野史)·전상(傳狀)·문집·보록(譜錄) 등 300여 종을 참조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재가 서로 다를 때는 그중 하나를 선택한 이유를 밝혀 이것을 '고이'로 묶었다. 책으로 완성된 것은 철종(哲宗) 때인 1086년이고 6년 후에 인쇄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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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치통감 강목 권5하


관계가 없지는 않겠지만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

셋째, 예맥(濊貊)에서 예(穢 또는 穢)의 한자음인 '후이(쉬이)'에서 부여의 명칭이 생겼다는 견해가 있다.

어느 정도는 타당한 견해로 볼 수 있다.

이상의 견해들은 조금씩 관계가 있지만, 앞에서 이미 본대로 부여란 결국 태양(해) - 불 - 부리 - 벌(평야) 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설명이 될 것이다.

 

참고로 녹산(鹿山)은 현재의 농안(農安)·장춘(長春) 또는 길림(吉林)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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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산의 위치 관련지도


여러 기록에서 보더라도 부여는 만주 시베리아의 중심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주 시베리아 일대에 사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퉁구스족(Tungus)이라고 부른다.

 

(중략)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퉁구스는 동호(東胡)라는 말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동호(東胡) 즉 '퉁후'라는 말이 이 지역의 사람들을 부를 때 일부 사용한 것을 유럽인들이 퉁후스 등으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퉁구스라는 말은 수천 년간 내려온 동북아시아 민족에 대한 수많은 사료나 기록에 대해 한 줌의 지식도 없는 유럽인들 특히 시베리아에 진출한 러시아인들에 의해서 자의적(恣意的)으로 급조(急造)된 용어에 불과하다.

이들은 수천 년간 내려오는 동아시아 민족에 대한 한 줌의 지식도 없이 자기들이 보고 있던 그 시점에서 임의로 이들을 퉁구스라고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퉁구스라는 용어는 동북아 민족연구의 심각한 장애일 수밖에 없다.

이 용어를 앞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이 지역 민족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흔히 퉁구스족이라고 불리는 만주쥬신들은 곰에 대하여 특별한 숭배의식을 가지고 있고 상당수가 스스로를 곰의 후손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에벤키족이나 오로촌족은 곰 숭배 신앙이 강하여 스스로 곰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오로촌족은 곰을 보고 곰이라고 부르지 않고 '타인텐', '야아'라고 하는데 이것은 할아버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오로촌 사람들은 암곰이 사냥꾼과 잠자리를 같이하여 낳은 아이가 오로촌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다.

참고로 일본어에서 어머니에 해당하는 말은 '하하(はは)'이고 아버지는 '지찌(ちち)'이다.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충남 공주 지역의 유명한 웅녀설화이다.

이 웅녀설화는 에벤키족의 웅녀설화와 내용이 거의 같다.

오로촌족도 에벤키족과 다름없이 곰을 조상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의 단군신화에 나타난 웅녀는 마치 에벤키족의 웅녀설화의 속편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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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곰 토템 관련지도


에벤키족은 남자와 암곰이 교혼하여 살다가 남자가 도망가 버리자 암곰은 자식을 두 쪽으로 찢는데 하나는 곰이 되고 하나는 에벤키족의 시조가 된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웅진(공주) 곰나루의 설화와 거의 같다.

 

그런데 이 웅녀설화가 단군신화에 이르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암곰으로 나오고 결국 여인으로 변화하여 환웅(桓雄)과의 사이에 단군(檀君)을 낳고 이로써 한민족이 시작되는 형태로 발전한다.

웅녀설화의 주인공 웅녀는 단군신화에 이르러서는 환웅의 역할을 지원하는 조연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보다 정치적인 의미로 환웅족에 의해 웅녀족(곰토템족)이 복속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 쥬신의 경우 곰과 호랑이(범)를 자신들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역사적 기록들은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지』에 "호랑이를 신으로 제사지냈다."라거나 영락대제비(광개토대왕비)에서 보이는 '대금(大金)'이라는 말은 큰곰(big bear)의 의미로 대칸(큰 임금)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도 확인이 된다.

『용비어천가』에서 광개토대왕비를 대금비(大金碑)라고 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곰'이 반도 쥬신어로 왕이나 황제를 의미하는 '임금'의 금과 같은 어원을 가진 말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견해도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즉 쥬신의 언어로 최고의 존칭으로 사용된 말 가운데 '님곰', '왕검(王儉)', '니사금(尼師今)', '니지금(尼叱今)', '대금', '한곰', '임금' 등이 있다.


단군신화에서 보이는 궁홀산(弓忽山)에서 궁홀이 바로 곰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양서(梁書)』에 나타나는 백제 수도의 옛말인 고마성(固痲城),『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 나타나는 "교모산(□牟山)"과 마한 55국 가운데 하나인 건마국(乾馬國)도 곰을 한자식으로 나타낸 말이라고 한다.


반도쥬신이 곰과 매우 인연이 깊다는 것은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 산재한 곰과 관련된 지명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만주 지역에는 곳곳에 웅악(熊岳) 또는 개마산(盖馬山), 개모산(盖牟山) 등의 이름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바로 '곰뫼'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죠.

 

그리고 한반도에서 곰나루(熊津 : 충남 공주)를 비롯하여 곰실(熊谷 : 경북 선산), 곰내(熊川 : 금강), 곰개(熊浦 : 경남), 곰뫼(熊山 : 경남), 곰섬(熊島 : 함남 영흥), 곰재(熊嶺 : 전북 진안), 금마저(金馬渚 : 전북 익산), 곰고개(熊峴 : 충북 보은), 곰바위(熊岩 : 충북 음성), 곰골(熊州 : 충남 공주) 등이 널리 분포되어있다.

 

이것은 만주와 한반도가 하나의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수많은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단군신화에 나타나는 웅녀(熊女)라는 말은 '곰골에서 온 여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오늘날까지도 반도쥬신들은 여자의 이름을 평양댁(평양에서 온 여자), 부산댁(부산에서 온 여자), 서울댁(서울에서 온 여자)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말의 표현 방식이나 웅녀의 표현 방식이 같은 형태라는 것이다.(김운회/ 동양대 교수)

 

https://blog.naver.com/silvino111/220947868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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