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지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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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 삼한에서 삼국으로
小符都誌

第二十七章

은(殷)의 망명자 기자(箕子)가, 패군과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에 도망하여 왔다. 명예를 위하여 당우의 법을 행하고, 五行三正을 써서, 홍범 무함(洪範巫咸)을 시행하였다. 천웅의 도와는 절대로 서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은의 軍民이 무력으로 부도의 유중(遺衆)을 억압하므로, 유중이 마침내 明地의 壇을 봉해버리고, 동해의 물가로 피하여 살았다. 즉 옛날의 사례벌(斯禮筏)의 空地였다. 사해벌은 긴 기(長旗)니, 광야(曠野)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내걸고, 저녁에 거둬들여, 먼 곳에서 살면서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곧 六村을 설치하고, 입접의 제족과 분담하여, 함께 지키되, 각각 한(韓)이라 하고, 보위(保衛)하였다. 한은 보위의 뜻이다. 북의 馬韓과, 남의 변한(卞韓)과, 동의 辰韓의 삼한이 부족의 자치를 행하고, 先世의 도를 굳게 지켜, 이후 천년 사이에 기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보위 방비하는 일에 전념하여, 거의 여력이 없었다. 이 때 하토(夏土)의 쟁탈의 바람이 점차 격심하여, 동요와 혼란이 삼한에 파급되므로, 육촌의 사람들이 서로 모의하고, 서쪽의 화가 점차 임박하여, 보수(保守)하기가 장차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이 통합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마침내 경계를 정하고, 요새(要塞)를 세워, 혁거세를 추대하여, 통어(統御)하는 일을 위임하였다. 남은 百濟요, 북은 高句麗였다. 고구려가 곧 북보(北堡)의 땅을 회복하여, 서침(西侵)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그 지역을 완전하게 보위하였다.



제 11 부 : 열국시대로

앞에서 얘기를 한 것처럼 오행의 화에 의해 혼란한 중국의 여러 국가(夏, 殷)의 유민이 삼한으로 흘러 들어옴으로써 삼한의 백성들이 꺼꾸로 문화 침투를 당하여 부도의 법이 끊어지고 의식의 고리에 틈이 생겨 국가의 통제력의 한계를 맞게 된다. 특히 44 세 단군 때부터는 삼한은 통치는 받으나 군사권은 각각 나눠 가졌으며, 47 세 고열가단군의 폐관 이후는 실질적인 법통을 잃어 삼한이 여럿으로 분열이 되니 그 여러 제후국 중 가장 강한 나라에서 단군이 나왔다.

이 때문에 실질적인 법통을 가진 진한의 후예가 이러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권력 쟁탈전에 회의를 느껴 이 들의 세력이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가서 나라를 세우니 이가 신라가 되었다. 그리고 삼한의 여러 나라 중 고구려와 백제가 있어 다른 여러 나라를 병합 하여 커지니 후세 사람들이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렇게 생성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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