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지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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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 잃어버린 역사

제 12 부 : 한사군의 허구

70 년대 중반 재야 사학자 임승국은 한사군의 명칭이 사마천의 ‘사기(史記)’ 115 권 조선열전(朝鮮列傳)은 물론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지극히 단순한 이사실 하나를 발견하는데 2000 년이 걸렸다면 과연 믿겨질 만한 일인가? 한말 친일어용 사학 단체인 청구학회의 공동 대표였으며 해방 후 반세기 동안 남한 사학계의 태두였던 이병도는 사기(6 권)에 한사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으나 임승국에 의하면 사기 그 어느 곳에도 그러한 기록이 없다. 일연스님조차 三國遺事에서 김부식의 三國史記가 한사군을 논한 것을 보고 군의 수도 명칭도 틀리다 하였으나 어찌 2000 년 동안 한번의 의문도 없이 이를 받아드렸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한무제가 보낸 수군제독 양복은 열수를 거슬려 올라가다 조선 수군의 습격을 받아 패전하여 배는 가라앉아 버렸고 상륙하여 도망다니는 치욕을 치렀다. 또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한무제에 의하여 사형이라는 극형을 당하고, 사체는 찢겨 사대문에 걸리는 기시(棄市)에 처해 졌던 것이다. 육군 사령관 순체(筍?)도 같은 기시를 당했다. 이 전쟁의 주역이였던 양군의 사령관이 모두 기시에 처해 졌다는 것은 이들이 승전의 주역이 아니라 패전의 주역 이였다는 말일 것이다. 만약 이들이 승전고를 울렸다면 이들은 승전의 영웅이지 결코 이렇게 죄를 물어 처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패전한 나라가 한사군을 설치를 할 수 있었겠는가? 실지 위만조선으로 알려진 우거 정권이 구테타로 무너진 뒤 그곳에 설치된 사군은 한나라사람이 다스리는 사군이 아니라 조선사람 참최음협이라는 네 사람이 다스리는 평주홰청추저날양이라는 4 군이였다. 사기에서는 조선이 평정되어 4 군이 되었다고 하며 평주홰청추저날양이라는 4 군을 소개 했고, 이 사군의 행정 통치 책임자들을 조선족인 최음참협이라는 네 사람이라 했다. 또 그 4 군의 위치를 발해 연안에서 산동반도까지라 했다.

그러면 우리 역사의 기록에서 흔적을 보면 낙랑국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나온다. 많은 사학자들이 낙랑군과 낙랑국을 같은 존재로 봤으나 이들 둘은 서로 다른 존재이다. 삼국사기에서의 낙랑국에 대한 이야기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 15 년(서기 32 년)때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보면 낙랑왕 최리(崔理)가 낙랑군의 태수가 아니라 왕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낙랑이 멸망을 한 시기가 강단사학자의 말을 빌리면 미천왕 14 년(서기 313 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을 하였다 하니 대무신왕(大武神王) 15 년(서기 32 년)에 멸망을 한 낙랑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3 년조의 “3 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望祭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兩國이 귀복하였다”는 기사 역시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이야기가 되었고, <삼국사기> 남해차차웅 (南解次次雄)조에도 ‘낙랑은 신라와 이웃나라이다’라 했다. 이 낙랑국의 위치는 앞서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의 남쪽이라 했고 남해차차웅조에서는 신라와 이웃나라라 했으니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있는 작은 국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여러 자료에서 보듯 낙랑군은 그 이름만이 보이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유령국가 이다.

[95]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 )
[96] 사마천은 조선과 한의 전쟁을 하던 B.C 108 년에 한무제에 의해 태사령(太史令)에 등용된다. 태사령이란 비록 그 지위는 낮으나 조정의 문서, 역사, 천문, 역법 등을 관장하는 부서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가 있는 위치였고,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니 이것이 史記 115 권 조선열전(朝鮮列傳)이다. 따라서 당시의 이 기록은 후세의 어느 기록보다 신뢰성이 있는 기록이라 하겠다. 만약 한나라가 조선을 이겨 한사군을 설치를 했으면, 이 중요한 기록이 사기에 빠졌을 이유가 없다.
[97] 번조선의 유민인 조선족 장수 최(最)가 우거를 죽이고, 우거가 죽자 다시 반항하던 성기(成己)를 죽였는데 이 일의 주역이 모두 조선족이다.
[98]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국사에서는 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한정을 했는데 여기에서 보면 최소 발해 연안에서 산동반도까지 인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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