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김호영 편역)

  1. 범례
  2. 삼성기전(三聖紀全) 상편(上篇)
  3.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
  4.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세기 서(序)
  5.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세기
  6. 북부여기(北夫餘紀) 상하(上下)
  7.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8. 태백일사(太白逸史) - 삼신오제본기
  9. 태백일사(太白逸史) - 한국본기
  10. 태백일사(太白逸史) - 신시본기
  11. 태백일사(太白逸史) - 삼한관경본기
  12. 태백일사(太白逸史) - 소도경전본훈
  13. 태백일사(太白逸史) - 고구려국본기
  14. 태백일사(太白逸史) - 대진국본기
  15. 태백일사(太白逸史) - 고려국본기
  16. (편역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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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전(三聖記全) 상편(上篇)

안함로 편찬(撰)

우리 환(桓)의 건국이 가장 오래되었다. 일신(一神)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 존재하고 홀로 화(化)하여 신이 되어 밝음을 빛내고 우주를 비추었다. 권 능을 화하여 만물을 생겨나게 하고 짧지 않게 생(生)하게 하였다. 오래토록 보시 고 항상 즐거움을 얻고 날고 노닐며 기묘함에 이르고 자연에 관련하였다. 형상이 없이 보고 행함이 없이 이루고 말없이 행하였다. 날(日)에 동녀동남(童女童 男) 800명이 흑수백산(黑水白山)의 땅에 내려왔다. 여기에서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羣)으로서 천계(天界)에 거주하시면서 돌을 쳐서 불을 일으키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을 환국(桓國)이라고 부른다. 천제환인씨(天帝桓因氏)라고 부르거나 또는 안파견(安巴堅)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7세(世)를 전하였는데 연대는 고려하기 불가(不可)하다.

후에 환웅씨(桓雄氏)가 계속 흥하여 천신(天神)의 조서(詔)를 받들고 백산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자정(子井)과 여정(女井)을 천평(天坪)에 파고 정지(井地)를 청구(靑邱)에 획정하여 천부인(天符印)을 지니고 다섯 가지 일(五事)을 주관하시며 재세이화(在世理化)로 홍익인간(弘益人間)하셨다. 도읍을 신시(神市)에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倍達)이라고 칭하였다. 3·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올리고 밖의 물건을 기피하고 삼가하고 문을 닫고 스스로 수양하고 주문을 외우고 소원을 빌었다. 공(功)이 있어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고 괘(卦)를 그어 미래를 알고 상(象)을 집어 신을 움직이고 명하여 수많은 신령(羣靈)과 여러 철인이 보필하게 하였 다. 웅씨(熊氏)의 딸을 맞아 왕후(后)로 삼았다. 혼가(婚嫁)의 예(禮)를 정하여 짐 승의 가죽으로써 폐백을 하고 종자를 심고 가축을 기르고 시(市)를 설치하고 구역(九域)과 교역하고 조공(貢)을 부가(賦)하니 새와 짐승도 더불어 춤추었다. 후 에 사람들이 그를 받드니 지상 최고의 신이 되어 세세(世世)토록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신시의 시기에 치우천왕(治尤天王)이 있어 청구를 회척(恢拓) 하였다. 18세(世)를 전하니 역년이 1,565년이었다.

후에 신인(神人) 왕검(王儉)이 내려와 불함산(不咸山) 단목(檀木)의 터에 도달 하였다. 그는 신(神)의 덕(德)에 이르고 성인의 어짐을 겸하니 이에 능히 조서 (詔)를 이어 하늘(天)을 계승하니 극(極)을 세우게 되었다. 위탕 유열(惟烈)하여 9환(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열성 복종하여 추대하니 천제의 화신(化身)이 되어 제왕(帝)이 되었다. 이가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되어 신시의 옛 규범을 복구하고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고 호칭하였다.

단군은 팔짱끼고(端拱) 좌정(坐)함이 없었다. 세상의 경계를 정하고 현묘(玄妙)하게 도(道)를 얻고 여러 무리들(羣)과 접촉하여 교화하며 생활하셨다.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토지를 개간하게 하고 성조(成造)에게 명하여 궁실을 짓게 하고 고시(高矢)에 명하여 종가(種稼)를 주관하게 하고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서계(書契)를 조성하게 하고 기성(奇省)에게 명하여 의약을 시설하게 하고 나을(那乙)에게 명하여 판적(版籍)을 관장하게 하고 희(羲)에게 명하여 괘무를 경전(典)을 편찬하게 하고 치에게 명하여 병마를 육성하게 하였다. 비서갑(菲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왕후(后)로 삼아 누에치는 것을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厖)의 다스림이 사표(四表)에 고루 비치었다.

병진년(丙辰) 주나라(周)의 고왕(考)때 국호를 고쳐 대부여(大夫餘)라고 하고 백악(白岳)으로부터 또 장당경(藏唐京)에 이주하였다. 팔조(八條)를 잉설(仍設)하 였고 독서와 활쏘기 연습이 일과(課)가 되게 하였고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교(敎)가 되게 하였고 전잠(田蠶)이 노무(務)가 되게 하였다. 산과 연못을 금지하지 않았고 죄가 처자에게 미치지 않게 하였고 백성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고 협력하 여 통치를 완성하였다. 남자에게는 항상 직(職)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호구(好逑)가 있었다. 집집마다 재물이 쌓여 산에는 도적이 없었고 들에는 굶주린 자를 볼 수 없었고 현악기 노랫소리가 구역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년(戊辰) 이래로 나라를 통치하여 47세(世)를 전하였는데 그 역년이 2,096년이었다. 임술년 진(秦)나라 시황(始)때 신인(神人) 대해모수(大角+ 羊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났다.

정미년 한나라 해제(漢惠)때 연(燕)나라의 추장 위만이 서쪽 변방 한 구석을 공략하여 거주하였다. 번한(番韓)의 준왕(準)이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하고 바다로 들어가 필부가 되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 지소는 그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한수(漢水)의 남쪽에 백성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하였다. 한때 군웅이 요해(寮 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경합하였다. 계유년에 이르러 한(漢)나라 무제(武)때 군대를 이동하여 우거(右渠)를 멸하였다. 서압록(西鴨綠)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창의하여 군대를 일으켜 또한 단군이라고 하였다.

을미년 한나라 소제(昭)때 부여의 옛 도읍을 점거하여 나라를 동명(東明)이라 고 하였다. 이것이 곧 신라(新羅)의 옛 토양(故壤)이다. 계해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高鄒牟)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 북부여를 계승하고 더불어 단군의 옛 장 전(章)을 복원하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건원(建元)하여 다물(多勿)이라고 하니 이가 바로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시다.

 

(원문)



한퓨쳐 / 역사자료실 / 환단고기 (신교출판사, 김호영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