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紀)에서 전하기를 환웅천황(桓雄天皇)께서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된 것과 만물이 제 각각 그 자리를 잡은 것을 보시고이에 고시례(古矢禮)로 하여금 먹이고 기르는 업무를 전담케 하시고 이를 주곡(主穀)이라고 하셨는데 이때에 농사의 도(道)가 잘 갖춰지지 않았고 또 불씨가없어 걱정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깊은 산에 들어가 교목(喬木)을 보니 황량하게떨어져 다만 골해(骨骸)만 남았고 늙은 줄기와 마른 가지들이 어지럽게 엉키었다. 다시 서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말없이 조용히 읊조리니 홀연히 큰 바람이 숲에 불어오고 만물이 노호(怒號)하니 늙은 줄기가 서로 마찰하여 불을 일으켜서불빛이 번쩍 번쩍 일고 잠깐 타다가 곧 꺼졌다. 이에 홀연히 깨닫고는 말하기를,“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곧 불을 취하는 방법이다.” 라고 하였다. 돌아와 오래된 홰나무 가지를 문질러 같은 방법으로 화공력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날 다시 큰 나무숲(喬林)에 이르러 배회하며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홀연히 표범 한 마리가 포효하며 뛰어 나오자 고시씨가 외마디 소리로 크게 꾸짖으며 돌을 날려 맹타하였으나 잘못하여 바위의 모서리를 맞추자 번쩍하고 불이 생겼다. 이에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서 다시 돌을 쳐서 불을 얻었다.이에 따라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얻게 되었고 쇠를 불리고 다루는 기술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제작의 공력도 점차로 진보하게 되었다.
환웅천황은 또 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서계(書契)를 만들게하였다. 대저 신지씨는 대대로 명(命)을 주관하는 직책을 관장하고 출납과 헌체(獻替)의 업무를 전담하였으나 다만 목소리(喉舌)에만 의존하고 일찍이 문자로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무리들과 수렵을 나갔다가 홀연히 놀라서 일어나는 외로운 암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 활을 당겨 재빨리 쏘려고 하다가 그 종적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에 사방 곳곳을 수색하고 산과 들을 지나서 두루 찾다가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는 것을발견하기 시작하고 향방이 명백해졌다. 이에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읊조리다가단번에 다시 재빨리 깨달고 말하기를, “기록을 보존하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은것 뿐이다. 오직 이와같은 것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날은 사냥을 그만두고 돌아와 되풀이하여 생각을 넓게 헤아리고 여러 가지 형상을 관찰한지 몇일 지나지않아서 깨닫고 문자(文字)를 비로소 완성하여 얻었는데 이것이 태고(太古) 문자의 시작이었다. 단지 후세에는 연대가 아득히 멀어 태고문자는 사라져 없어지고그치어 존재하지 아니한다. 역시 그 조합이 이루어졌으나 아마도 불편함이 있어그러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일찍이 남해도(南海島)의 낭하리(郎河里)의 계곡 내지 경박호(鏡珀湖), 부오소리(夫烏蘇里)와 더불어 선춘령(先春嶺)과 그 외의 암석 사이에서 간혹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범(梵)자도 아니고 전(篆)자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능히 깨칠 수없다고 들었다. 이것이 신지씨가 그곳에 새긴 옛문자가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다시 한번 우리나라의 미진함과 우리 민족의 강하지 못함을 한탄하게 된다.환웅천황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로 하여금 비록 새, 짐승, 벌레와 물고기의 피해를 제거토록 하였으나 인민(人民)들이 여전히 동굴이나 토혈(土穴) 속에서 살고 있어 바닥은 축축하고 외풍의 기운이 사람들을 핍박하여 병나게 하였다. 또 가금, 짐승, 곤충과 물고기의 무리를 한 경계에서 궁색케 하고 내쫓아 점차 스스로 물러나 피난처에 숨어버리므로 도살하여 공급하고 먹이기가 불편하였다. 이에 우사(雨師) 왕금(王錦)으로 하여금 사람의 거주지를 지어 조성하게 하고 주로 소, 말, 개, 돼지, 수리, 호랑이 등의 짐승을 불러들여 목축에 이용하게하였다. 운사(雲師) 육약비(陸若飛)로 하여금 남녀간의 혼취(婚娶)의 법을 정하게하였다. 그리고 치우는 곧 세세토록 병마와 도적을 막는 직(職)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치우(蚩尤), 고시(高矢), 신지(神誌)의 후손들이 번성하게 뻗어나가고최고로 성하였다. 이에 치우천왕(蚩尤天王)의 등극에 이르러 구치(九治)를 조성하여 구리(銅)와 쇠(鐵)를 캐서 쇠를 제련하여 칼, 창과 대노(大弩)를 제작하여수렵하고 정복전쟁을 함으로써 신뢰감을 주었다. 이로써 신(神)으로 삼으니 먼곳의 외부 종족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대궁(大弓)의 위력을 풍문으로 듣고 간담이 서늘한지 오래였다. 고로 저들은 우리 씨족(族)을 가리켜 이(夷)이라고 하였다. 설문(說文)에서 소위 말하는 ‘이(夷)는 큰 활을 쓰는 동방사람(東方人)이다.’ 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에 공구(孔丘)씨가 춘추(春秋)를 지을 당시에 이르러이(夷)라는 이름을 마침내 융(戎), 적(狄)과 더불어 추락하여 함께 비린내 나고더러운 것의 호칭이 되었으니 서글픈 일이다.
삼성밀기(三聖密記)에서 이르기를 환국(桓國)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 그것이 걱정이었다. 환웅께서 나라를 위하여 곧 삼신으로 교단(敎)을 설치하셨다. 무리를 규합하고 맹세를 짓고 은밀히 싹을 잘라 제거할 뜻이 있었다.그때에는 씨족의 호칭이 서로 같지 않고 풍속은 오히려 점차 갈라져 원래 거주자는 호랑이(虎)부족이 되고 새로 이주한 자는 곰(熊)부족이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부족의 성품은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오로지 약탈만을 일삼았으며 곰부족의성품은 어리석고 괴퍅하고 잘난체하여 조화되기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비록같은 굴에 오랫동안 살면서도 더욱 사이가 멀어져 서로 빌리거나 꾸어주지 않았고 서로 혼인도 트지 아니하고 일마다 쉽게 승복하지 아니하여 하나의 그 길에있지 않은 것과 같았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 곰부족의 여자 임금(熊女君)은 환웅이 신의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가 뵙고 말하기를, “원하건대 일가를 이룰 굴(穴) 하나를 내리시면 같은 신(神)의 계율을 지키는 백성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웅께서 곧 이를 허락하시고 그들이 모여 살 곳을 정하여 주시고자식을 낳게 하시고 산업을 가지게 하였다. 호랑이부족은 끝내 불가능하므로 후에 그들을 사해(四海)로 추방하여 버렸다. 환족(桓族)의 일어남이 이와 같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조대기(朝代記)에서 이르기를 때에 사람은 많고 물자는 모자라서 그 살아갈길의 방책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庶子部)에 대인(大人) 환웅이라는 분이 있어 무리들의 사정을 깊이 듣고 그때 하늘을 내려와 하나의 광명세계를 지상에열고자 하였다. 그때에 안파견(安巴堅)이 금악(金岳), 삼위(三危), 태백(太白)을두루 살펴보니 태백이 가히 이로써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만 하였다. 이에 환웅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이제 인물(人物)의 업(業)이 이미 조성되어 완성된 것같다. 그대 임금(君)은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몸소 스스로 아래 세상(下界)에 내려가 하늘을 열고 교단(敎)을 설치하여 가르침을 베풀고천신(天神)제사를 주관하여 이로써 아버지의 권위(父權)를 세우라. 부양하고 보살피고 평화로 귀일하여 이로써 스승의 도(師道)를 세우라. 이치대로 되어가는세상을 만들어 자손 만대(萬世)의 홍범(洪範)이 되게 하라.” 하셨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보내어 가서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보병 3,000명을 이끌고 처음에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내려오시니 이를 일컬어 신시(神市)이라고 하였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을 주관(主穀)하시고 명을 주관(主命)하시고 형을 주관(主刑)하시고 병을 주관(主病)하시고 선악을 주관(主善惡)하시고 무릇 인간의360여 업무를 주관하시어 이치대로 되어가는 세상을 만들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하시니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하였다.
그때에 한 곰부족과 한 호랑이부족이 같이 이웃하여 살면서 신단수(神檀樹)에서 항상 기원하고 또 환웅께 청하여 하늘의 계율(天戒)을 지키는 백성이 되기를원하였다. 환웅은 이에 신(神)의 주문(呪)으로 골(骨)을 바꾸고 신(神)을 옮기고또 신을 강림케 함으로서 영험을 얻고 혼령을 활성화 하였는데 그것은 쑥 한 다발과 마늘 20매였다. 이에 그들에게 계율(戒)을 주고 이르기를, “너희 무리들이그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자유로이 참평등을 이루고 사물(物)을 불편없이 구하고 사람들이 지향하는 형상(踐形)의 큰 인물이 되어갈 것이다.”하셨다. 호랑이부족과 더불어 곰부족 양가(兩家) 모두 얻어서 이것을 먹고 3․7일을금기하고 스스로 수련에 힘써 곰부족은 배고프고 춥고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늘의 계율(天戒)을 준수하고 환웅과의 약속을 지켜서 건강한 여자의용모를 얻었다. 호랑이부족은 곧 속이고 방만하여 금기하기 불가능 하고 하늘의계율을 위반하므로 끝내 함께 그것을 얻지 못하고 하늘의 업무(天業)를 도왔는데 이것은 두 성씨(姓)가 서로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씨의 여러 여인들은 자존심이 세고 어리석고 강하여 그들과 함께 돌아갈 사람이 없는 고로 매일 신단수 아래에서 무리지어 모여 주문을 외면서 잉태하고 장적(帳)이 있기를 원하였다. 환웅이 곧 임시로 환(桓)이 되어 관경을 얻고 그들과 더불어 혼인케 하고 잉태하고 자녀를 낳게 하였다. 이로부터 여자 무리와 남자 무리들은 점차 윤리(倫)를 취하여 습득하였다. 그 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 호칭되어 이르는 분이있어 아사달(阿斯達)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에 도읍을 세웠다. 처음에 나라를 조선(朝鮮)이라고 칭하였는데 삼한(三韓),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의 옥저(沃沮), 동북의 부여(夫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그 관경이다.
신시(神市)의 시대에 7회 동안 신께 제사올리는 역법(曆)이 있었다. 1회의 날에는 천신께 제사를 올리고 2회의 날에는 월신께 제사를 올리고 3회의 날에는수신에 제사를 올리고 4회의 날에는 화신께 제사를 올리고 5회의 날에는 목신께제사를 올리고 6회의 날에는 금신께 제사를 올리고 7회의 날에는 토신께 제사를올렸다. 대저 역법을 만드는 것은 이러한 것에서 시작된 연유로 옛날에는 계해(癸亥)를 사용하였고 단군 구을(丘乙)이 갑자(甲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서 10월이 상달(上月)이 되었는데 이것을 세수(歲首)라고 일컫는다. 육계(六癸)는 신시씨로부터 신지(神誌)에게 명하여 제정한 것으로 계(癸)로서 머리를 삼은 것이니계는 계(啓)요 해는 핵(核)으로 일출의 뿌리이다. 고로 계는 소라(蘇羅)가 되고갑은 청차이(淸且伊)가 되고 을은 적강(赤岡)이 되고 병은 중림(仲林)이 되고 정은 해익(海弋)이 되고 무는 중황(中黃)이 되고 기는 열호수(烈好遂)가 되고 경은임수(林樹)가 되고 신은 강진(强振)이 되고 임은 유부지(流不地)가 된다. 해는 지우리(支于離)가 되고 자는 효양(曉陽)이 되고 축은 가다(加多)가 되고 인은 만량(萬良)이 되고 묘는 신특백(新特白)이 되고 진은 밀다(密多)가 되고 사는 비돈(飛頓)이 되고 오는 융비(隆飛)가 되고 미는 순방(順方)이 되고 신은 명조(鳴條)가 되고 유는 운두(雲頭)가 되고 술은 개복(皆福)이 된다.
신시(神市)가 비로소 내려오기 시작하던 시대에 산에는 지름길이 없고 못에는배와 다리가 없었다. 집짐승과 날짐승은 무리를 이루고 풀과 나무가 무성히 자라는 곳에 집짐승과 날짐승의 무리가 더불어 날고 씨족들이 만물과 더불어 함께하였다. 집짐승과 날짐승의 무리는 가히 의탁하고 구속되어 노닐고 새와 까치의집은 나무를 잡아당겨 볼 수 있었으며 배 고프면 먹고 목 마르면 마셨다. 필요시에 그 피와 고기를 사용하고 옷을 짜고 먹을 것을 경작하는 것이 편리하여 자유로이 존재하였으니 이것을 일컬어 지극한 덕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백성들은생활이 되는 바를 알지 못하고 그 생활이 안정되고 안정된 바를 알지 못하고 그보는 것이 최적이고 최적인 바를 알지 못하고 살았다. 머금고 씹어 먹으며 기뻐하고 배를 두드리며 놀았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니 대저 하늘의 은택함이 이루어져 궁핍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후세에 내려와서 백성들과물건들이 넘쳐 번성하더니 소박한 것은 점점 없어지고 절름발이와 앉은뱅이도힘써 일하고 부지런해야 하였으니 이로부터 생계를 염려하게 되었다. 이에 농사짓는 사람은 이앙을 다투고 고기잡는 사람은 구역을 다투니 다투어 그것을 얻지못하면 장래에 궁핍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된 이후로 활(弓)과 쇠뇌(弩)를 만드니 새와 날짐승들은 숨어버리고 그물(網)을 치니 물고기와 새우는 모습을 감추었다. 이에 칼(刀)과 창(戟)을 든 갑병(甲兵)이 나타나 너와 나로 서로 공격하기에 이르고 상아(牙)를 갈아 피를 흘리고 간과 뇌로 땅을 더럽혔다. 이것역시 하늘의 의지가 정해진 연유로 이러한 것인가. 전쟁의 불가피함을 알았다.지금 그 근원을 탐구해 본즉 대개 한 근원의 조상(祖)이나 땅이 이미 동서로 나뉘어져 각기 한 지방의 토경(土境)에 근거하니 아주 멀어 사람과 연기가 통하지아니하여 백성들이 나 있음은 알되 남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연유이다. 고로 수렵과 채벌 이외에 일찍이 위험한 언덕이 내려 앉은 일이 없었는데 수천 년이 쌓인 이후에 이르러서 세상의 형국은 이미 변하였고 중개국(仲國)이 서쪽 땅의 보고가 되었다. 기름진 들판 천리에 바람기운이 널리 통하였다. 우리 환족(桓族)의일부로 그 지역에 옮겨 가는 자는 침을 흘리며 나아가니 토착민도 또한 집단으로 모여들었다. 이에 같은 집단(黨)이면 돕고 다르면 원수가 되어 방패(干)와 창(戈)이 서로 움직이니 이것이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환웅천왕으로부터 5세를 전하여 태우의(太虞儀) 환웅이 계셨다. 교인(敎人)들이 반드시 묵념(黙念), 청심(淸心), 조식(調息), 보정(保精)을 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곧 오래 오래 사는 방법이다. 아들 열 두명이 있었는데 장자(長子)는 다의발(多儀發) 환웅이라 하고 막내아들(季子)은 태호(太嘷)이라고 하는데 또 복희(伏羲)라고 불렀다. 어느날 꿈에 삼신이 영(靈)을 또 몸(身)에 내리어 만리를 통철하게 되었다. 이에 삼신산(三神山)으로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掛圖)를 얻었는데 그 획이 세번 끊어지고 세번 이어져 위치를 바꾸고이치를 묘하게 추측하고 삼극(三極)을 합치면 변화가 무궁하였다고 하였다.밀기(密記)에서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서 우사(雨師)의 직을 세습하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경유하여 진(陳)으로 옮겨가서 수인(隧人),유소(有巢)와 더불어 함께 서토(西土)에서 이름을 세웠다. 후예들이 풍산(風山)에서 나누어 살았으므로 역시 성이 풍(風)이며 뒤에 나뉘어져 패(佩), 관(觀), 임(任), 기(己), 포(庖), 이(理), 사(姒), 팽(彭)씨의 8성이 되었다. 지금 산서(山西)의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거주지가 아직도 남아있다. 임(任), 숙(宿), 수(須),구(句), 수유(須臾) 등의 나라는 모두 한울타리이다고 하였다.
대변경(大辯經)에서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서 우사를 지냈고 신룡(神龍)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만들었으며 신시의 계해(癸亥)를 고쳐 갑자(甲子)로 한 해의 머리로 삼았다. 여와는 복희의 제도를 이었고 주양(朱襄)은 옛문자그대로 육서(六書)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복희의 능은 지금 산동(山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少典)의 아들이고 소전은 소호(少皞)와 더불어 모두 고시(高矢)씨에서 나온 자손이다. 대저 당시의 백성들은정착하여 생업을 가졌는데 점차로 언덕을 이루기에 이르고 곡(穀), 마(麻), 약(藥), 석(石)의 기술도 또한 이미 점점 갖추게 되어 낮 동안에 시장에 나가 교역을 하고 돌아왔다. 곧 유망(楡罔)이 정치를 함에 이르러 급속히 여러 읍(邑)을묶어 둘로 구분하니 많은 백성들이 떠나고 흩어져 세상의 도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우리 치우천왕(蚩尤天王)께서 신시의 남은 열기를 이어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고 확장하였다. 능히 하늘을 열어 생(生)을 알고 땅을 열어 생을이치대로 하고 사람을 열어 생을 숭배하였다. 여러 사물의 원리를 모두 스스로점검, 고찰하여 덕이 이르지 않음이 없고 지혜가 옳지 않음이 없고 힘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백성들과 더불어 호랑이부족을 나누어 다스리고 하삭(河朔)에 의거하여 안으로는 용감히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살폈다. 유망의 쇠퇴한 정치에 이르러 곧 병사들과 출정할 때 형제와 종친들 가운데서 가히 장수감 81명을 뽑았다. 부령(部領)의 여러 군사가 갈로산(葛盧山)의금을 발굴하여 검(劍), 갑옷(鎧), 창(矛), 극(戟), 대궁(大弓), 호시(楛矢)를 많이만들어 한결같이 가지런히 정돈하였다. 탁록(涿鹿)을 정벌하고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하여 승첩하니 그 세력이 질풍과 같아 만 군(軍)을 두려움으로 굴복시키니 위세가 천하에 떨치었다. 한 해 동안에 무려 아홉 개의 제후의 땅을 정벌하였다.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구치(九治)로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발굴하여 예리한 창(戈)과 옹호의 극(戟)을 만들었다.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몸소거느리고 양수(洋水)에 출진하여 공상(空桑)에 이르러 살해하였는데 공상은 지금의 진류(陣留)로 유망이 도읍한 곳이다. 이 해 중에 열두 제후(諸侯)의 나라를병합하니 죽어 널부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 차고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때에 유망은 소호로 하여금 항전하게 하므로 천왕(天王)이 예리한 창과 옹호의 극을 휘둘러 소호와 더불어 큰 전쟁을 하였다. 또 큰 안개를 만들어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하니 소호가 크게 패하여 흩어져서 공상으로 도주하였다가 유망과 함께 달아났다.치우천왕은 이에 곧 하늘에 제사를 지내서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여 고하고 다시금 병사를 진격시켜 탁록(涿鹿)을 포위하여 압박하고 일거에 그곳을 멸하였는데관자(管子)가 소위 ‘천하의 임금(君)이 전쟁에 임하여 한 번 노하니 널부르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하였다.’ 라고 한 것은 이것이다.
그때에 공손헌원(公孫軒轅)이란 자가 있었는데 토착민의 괴수(魁)였다. 비로소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새로운 정치를 크게 펴서 감히 대리하여 천자(天子)가 되겠다는 뜻을 가졌다. 곧 병마를 크게 일으켜 가지고 와서싸우고자 하므로 천왕(天王)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포위하여 압박하고 그곳을 멸하였다. 헌원은 오히려 스스로 굴복하지 아니하고 감히백번의 전쟁에 나오니 천왕이 9군(九軍)에게 명을 내려 네 길로 나누어 나가게하고 자신은 보병과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바로 탁록의 유웅(有熊)의 들판에서 헌원과 연달아 싸웠다. 병사를 사방으로 풀어 조여들어가 참살하니 그 수를헤아릴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어 전쟁을 독려하니 적군은 이에 마음은 두렵고 손은 떨려 연명하고자 앞다퉈 달아나 숨으므로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었다. 이에 기(冀), 연(兗), 회대(淮垈)의 땅이 모두 점거되어 탁록에는 성을 쌓고 회대에는 집을 세우니 이에 헌원의 족속(屬)들이 모두 신하로 칭하고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대저 당시 서토(西土)의 사람들은 다만 활(矢)과 돌(石)의 힘만 믿고 갑옷(鎧甲)의 용도를 잘알지 못하였다. 또 치우천황의 높고 강한 법력에 직면하니 마음은 놀라고 간담은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번번히 패하였다. 운급(雲笈)의 헌원기(軒轅記)에서 일컫기를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쓰니 당시의 사람들은 이것이 구리 머리(銅頭), 쇠 이마(鐵額)가 되는 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또 역시 그낭패가 매우 심했음을 가히 상상해 볼 수 있음이다.
치우천왕은 군용(軍容)을 더욱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하여 10년 동안 헌원과더불어 73회를 싸웠으나 장수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고 군사들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이후에 헌원은 이미 여러 차례 전쟁에 패하고도 더욱 더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우리 신시를 본받아서 병갑을 널리 제조하고 또 지남차(指南車)를 제작하여 감히 100번의 전쟁에 나왔다. 천왕은 크게 진노하여 형제(兄弟)와 종당(宗黨)들로 하여금 중요한 대전(大戰)에 힘쓰게 하고 헌원의 군사들에게 위력을 세워 보여 감히 전의가 생기지 못하게 하고 이에 추적하여 습격하고 그들과 더불어 크게 싸워 일진(一陣)을 전멸시킨 연후에야 비로소 이 일이 끝났다. 우리 장수 치우비(蚩尤飛)란 자가 공을 급히 다투다가 진중(陣中)에서 몰살되었는데 사기(史記)에 일컫기를 치우를 잡아죽였다고 한 것은 대개 이를 일컫는 것이다. 천왕은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새로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제작하여 진(陣)을 이루고 연합하여 진격하니 적진이 마침내 항거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예군을 서쪽으로 나누어 파견하여 예(芮)와 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으로는 회대를 취하여 성읍(城邑)으로 하여 헌원이 동쪽으로 침략하는 길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에 붕서(崩逝)하신지 수천 년에 이르렀어도 오히려 만장(萬丈)의 열렬히빛남이 있어 후세 사람들에게 감명을 일으키게 하였다. 지금 한서(漢書)의 지리지(地理志)에 의거하면 그 능은 산동(山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궐향성(闕鄕城) 안에 있는데 그 높이가 7(丈)이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시대에주민들은 유독 항상 10월이면 그를 제사지냈는데 그때마다 붉은 기운(氣)이 나타났는데 진홍색의 비단자락과 같으므로 그것을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고 하였다. 그의 영웅스러운 혼(魂)과 영웅스러운 백(魄)은 스스로 보통사람과 매우판이하여 수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오히려 사라지지 아니함인가. 이로써 헌원은사라지고 그런 연유로 유망도 또한 이에 따라 영원히 무너져 버렸다.
치우천왕의 남은 열기는 대대로 전해져 능히 떨치고 유(幽), 청(靑)을 다 차지하고도 그 명성과 위엄이 무너지지 않았다. 헌원 이래로 저들 세상은 안정되지못하고 그 시대가 끝나도록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하였다. 사기(史記)에서 일컫기를 산을 뚫어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살지를 못하였고 탁록의 강에도읍을 정하고도 천도하고 이주하고 가고 오고 하느라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며병사로 하여금 영위(營衛)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대개 그 두려워 매우 조심하는 뜻을 역력히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서(尙書)의 여형(呂刑)에도 역시전하기를 만약에 옛교훈(古訓)이 있다면 오직 치우만이 병란을 일으킨다고 하였으니 저들의 놀라움과 기운을 빼앗아 그 교훈을 전하여 이로써 후세 사람들의경계로 삼은 것 역시 이러한 것이다. 그 후 300년은 무사하였는데 다만 전욱(顓頊)과 더불어 한번 전쟁하여 그를 쳐서 부수었을 뿐이다.
대개 신시 개천으로부터 18세(世)를 전하여 1,565년을 지내고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웅씨(熊氏)의 비왕(裨王)으로 시작하여 신시를 대신하고 아홉 구역을하나로 통합하고 삼한(三韓)을 나누어 관경(管境)으로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일컫는다고 하였다.
삼한비기(三韓秘記)에서 이르기를 복희는 이미 서쪽 외곽에서 봉함을 받고 직위에 올라 정성을 다하므로 방패와 창을 쓰지 않고도 하나의 구역이 교화되어복종하였으므로 수인(燧人)을 대신하여 마침내 역외 지역까지 호령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 갈고환웅(曷古桓雄)이 있어 신농의 나라와 더불어 강역의 경계(疆界)를 획정하였는데 공상 동쪽이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또 여러 세대를 전하여 자오지 환웅(慈烏支桓雄)에 이르렀는데 그는 신과 같은 용기가 있어 관(冠)을쓴자 중에 으뜸이었으며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고 능히 큰 안개를일으켰으며 구치를 조성하여 광물을 캐내어 철을 주조하고 병기를 만들고 비석박격기를 제작하니 천하가 그를 두려워하여 함께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 치우로 삼았다. 무릇 치우란 세속에서 번개비(雷雨)를 말하는 것으로 산과 강을 크게 만들고 다시 그것을 바꾼다는 뜻이다.
치우천왕은 신농씨(神農)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웅대한 계획을 품고 여러차례 서쪽에서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대 사이를 점거하는데 성공하니바로 헌원이 도읍한 곳이다. 즉시 탁록의 들판으로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그를 신하로 삼은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서쪽으로 보내어 고신(高辛)을 쳐서 공을세우게 하였다고 하였다.
대변경(大辯經)에서 이르기를 신시씨는 전인(佺)로써 계율(戒)을 닦아 사람을교화하고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른바 전인이란 사람의 연유한 곳에 따라 스스로완전해지고 진리를 이룸으로써 능히 성(性)에 통하는 것을 일컫는다. 청구(靑邱)씨는 선인(仙)으로서 법(法)을 설치하여 사람을 교화하고 경계를 관리하였다. 이른바 선인(仙)이란 사람의 연유한 곳에 따라 스스로 산(山)이 되어 (산을 낳아)선(善)을 넓힘으로써 능히 명(命)을 아는 것이다. 조선씨(朝鮮氏)는 종인(倧)으로서 왕(王)을 세워 사람을 교화하고 재화(禍)를 책임지게 하였다. 이른바 종인(倧)은 사람의 연유한 곳에 따라 스스로 종(宗)이 되어 아름다움(美)을 구함으로서능히 정(精)을 보전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고로 전인(佺)이란 비게 함(虛)으로서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선인(仙)이란 밝게 함(明)으로서 땅에 근본을 두고 종인(倧)이란 강건하게 함(健)으로서 사람에 근본을 둔다고 하였다.
주(注)에서 이르기를 환인(桓仁)은 또한 천신이라고 한다. 천(天)은 곧 대(大)요 일(一)이다. 환웅은 또한 천왕이라고도 한다. 왕은 곧 황(皇)이요 제(帝)이다.단군은 또한 천군(天君)이라고도 한다. 제사를 주관하는 어른(長)이다. 왕검은 또한 바로 감군(監軍)이요 관경의 어른이다. 고로 하늘로부터의 광명을 환(桓)이라하고 땅으로부터의 광명을 단(檀)이라고 하는데 소위 환은 9황(九皇)의 이름이다. 한(韓)은 또한 곧 대(大)이다. 삼한을 풍백, 우사, 운사라고 한다. 가(加)는 곧가(家)이다. 오가는 우가(牛加)는 곡식을 주관하고 마가(馬加)는 명(命)을 주관하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고 저가(猪加)는 병을 주관하고 양가(羊加)는 선악을 주관한다고 한다. 백성(民)은 64백성이 있었고 무리(徒)는 3,000무리가 있었다. 가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파견한 것을 하늘을 엶(開天)이라고 한다. 하늘을연다함은 고로 능히 온갖 사물(庶物)을 창조하는 것으로 이것은 비어 있음(虛)의동체(同體)인 것이다. 인간세상을 탐하여 구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을 엶(開人)이라고 한다. 인간을 연다함은 고로 능히 인간사(人事)를 순환하는 것으로 이것은혼(魂)의 구연(俱衍)이다. 산을 다스리고 길을 내는 것을 땅을 엶(開地)이라고 한다. 땅을 연다함은 고로 능히 그때의 일(時務)을 개화하는 것으로 이것은 지혜(智)의 쌍수(雙修)이다고 하였다.
삼한비기(三韓秘記)에서 이르기를 대저 백두(白頭)의 거대한 산맥은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자리하여 옆으로는 1천리에 뻗쳐 있고 높이는 2백리나 솟아 있어 웅장한 위용은 빼어나면서 완연하고 꾸불꾸불하게 널리 뻗어 배달천국(倍達天國)의 진산(鎭山)이 되었다. 신인(神人)의 오르내림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거늘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妙香山)이 단지 낭림(狼林)의 서쪽을 달리는 맥(脉)에 이어졌다 하여 이 같이 성스러운 일을 허용하는데 참여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세속에서 이미 묘향산으로 태백을 삼은 것은 곧 그 소견이 다만 동압록수이남 한 모퉁이의 땅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산의 조종(祖宗)을 곤륜(崑崙)이라고 노래하며 기쁘게 여기고 소중화(小中華)로서 스스로 달고 당연히하였다. 그래서 공물을 바치는 사신(貢使)의 북행(北行)이 누대에 걸쳐 100년이지나도 이를 치욕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는 곧 서책(書冊)을 덮고 길게 탄식할일이다. 그런 연유로 지금 동방의 여러 산이 태백으로 이름하는 곳이 빈번히 많고 세속에서는 영변(寧邊) 묘향산으로 그것을 당연시 하는 것은 실로 일연씨(一然氏)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설에서 연유한 것이니 저들의 눈구멍은 콩과 같고 팥과 같으니 어찌 그들과 더불어 논의하는 것이 흡족하겠는가. 지금 백두산은 꼭대기에 큰 못이 있는데 주위는 가히 80리가 되고 압록(鴨祿), 송화(松花),두만(豆滿)의 여러 강이 모두 여기에서 발원하니 천지(天池)라고 이른다. 곧 환웅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묘향산은 일찍이 조그마한 웅덩이조차도 없었고 또 환웅천왕이 처음으로 내려온 태백산이 되지 않으니 논하기에부족한 것이다고 하였다.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에 이르기를 ‘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으니 위(魏)에서는 이를 태황(太皇)이라고 하였다. 범과 표범과 곰과 이리가 있는데 사람을 해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산 위에서 똥과 오줌을 누지 않았고 길을가는 자는 모두 물건으로 담아갔다고 하였다. 대저 환웅천황께서 처음 내려와이미 이 산에 계셨으므로 또 이 산은 신주(神州)로 왕을 부흥하는 영지(靈地)가된즉 소도(蘇塗) 제천(祭天)의 옛 풍속은 반드시 이 산에서 시작되었고 예로부터환족의 숭배와 공경도 또한 이 산에서 시작되었으니 심상이 넘길 수 없는 것이다. 또 가금과 날짐승이 모두 신의 교화함에 젖어 편안히 이 산에 깃들고 일찍이 사람들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고 사람 또한 감히 산 위에서 똥오줌을 누어신을 모독하지 아니하므로 항상 만세의 공경과 보호의 표상이 되었다. 대저 우리 환족은 모두 3,000 무리 집단의 장적(帳)을 거느린 신시에서 나왔는데 후세로내려오면서 비록 여러 씨족의 분별이 있었지만 실은 환단(桓檀)의 한 원류의 후손(裔孫)에 벗어나지 아니한 것이다. 신시가 처음 내려온 공(功)을 실로 당연히반드시 전하고 암송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선대의 왕과 선대의 백성이 일러준 그 삼신의 옛 제사의 성지(聖地)를 일러 삼신산(三神山)이라고 한 것 또한 틀림없는 것이다. 대저 신시로부터 내려온 신의 법리(神理)와 성스러운 교화(聖化)는 점차 퍼져나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깊어져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큰 근본이 되었고 사람 나라(人國)와는 많이 다르게 되었다. 그 신풍(神風)과 성속(聖俗)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어 천하 만방의 사람들이 신의 법리와 성스러운교화를 숭모하여 반드시 삼신을 추모하고 숭배하여 동북(東北)은 신명(神明)이있는 곳이라는 칭함이 있기에 이르렀다. 이에 급기야 그 말기 흐름의 폐단으로점점 황탄불경(荒誕不經)에 빠져들고 갈수록 점점 더 괴이한 것이 나와서 괴탄무계(怪誕無稽)한 설(說)들이 소위 연제(燕齊) 해상의 괴이한 방사(方士)들 사이에서 빈번히 나돌았다. 대개 그 땅은 9환의 신시와 더불어 서로 접하여 있으므로 사람과 물건의 교류가 특히 성하였는데 제 나름으로 소문을 듣고 놀래고 기이해 하고 또 다시 추측하고 부연하고 짜 맞추어 말하기를 삼신산은 봉래(蓬萊),방장(方丈), 영주(瀛洲)로 발해(渤海)의 가운데에 있다고 운운하여 세상의 주인을미혹하였다. 그런 연유로 당시의 사람들은 동쪽으로 해상에 이르러 한번 바라보면 끝 닿는 물가가 없고 발해의 가운데에 또다시 바다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고로 문득 말하기를 삼신산은 또한 발해 가운데에 있다고 운운하였으나 사실인즉 삼신산은 각각 삼도산(三島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라는 지름길의 장소로 곧 천왕이 내려온 곳이요 방장은 사방이 일장인 누각(閣)으로 곧 소도가 있는 곳이요 영주는 큰 바다가 섬을 둘러싼 섬의 모양 즉 천지(天池)가 나오는 곳이다. 통틀어 말하면 삼신산이 되고 삼신은 곧 일상제(一上帝)이다. 그런데 더욱 더 허황되고 기이한 것은 삼신의 본말을 알지도 못하고이에 금강(金剛)을 봉래이라 하고 지이(智異)를 방장이라 하고 한라(漢拏)를 영주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서 이르기를 그것은 발해의 가운데에 있으며 대개일찍이 가서 본 사람이 있어 여러 선인(仙人)과 불사약(不死藥)이 모두 있고 그곳의 물건은 가금과 날짐승 조차도 모두 희고 황금(黃金)과 백은(白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운운 하였다고 한다. 또 선가서(仙家書)에 이르기를 삼신산에 혼을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眞丹)이라고 하였다고하였다. 지금 백두산에는 예로부터 흰 사슴(白鹿), 흰 꿩(白稚) 혹은 희 매(白鷹)의 무리들이 있다고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서 전하기를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가 모두 하얗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 산삼(山蔘)이 많이 나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불로초(不老草)에 비겼다. 산 사람들이 캐려고 할 때에는 곧 반드시 먼저 목욕 재계하고 산에 제사를 지낸 연후에야 감히 출발하였으니 그 혼이 돌아오고 늙지 않게 한다는 것의 이름 또한 여기에서 근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기(世紀)에 전하기를 단군 오사구 원년에 북쪽을 순행하여 영초(靈草)를 얻었다고 전한즉 이것이 그 증거이다.
10월에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마침내 천하 만대로 이어지는 풍속이 되었다.이는 곧 신주(神州) 특유의 성대한 제전(盛典)으로 다른 나라의 것과 비할 바가아니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比+昆比侖)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다. 옛날의 삼신산이란 곧 태백산이고 또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저 상세(上世) 신시의인문 교화가 근세에 이르러 비록 튼튼하게 행하여지지 못하였으나 천경(天經)과신고(神誥)가 오히려 후세에 전하여져 국남국녀(國男女)와 더불어 또한 모든 사람들이 깊이 침묵하는 가운데 숭배하고 신앙하였다.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 말하고 소아(小兒) 10세 이내의 신체와 생명, 안전함과위험함,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준수함과 용렬함을 다 삼신께 위탁하였으니 무릇삼신이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조화한 천일신(天一神)이다. 옛날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漢)나라 주인 유철(劉徹)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는겸양하시고 드러내지 마시고 또 삼신의 즐거워하는 모양새를 어지럽히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위소(韋昭)의 주(注)에 삼신상제(三神上帝) 삼신의 설(說)은 일찍이 이미 저들의 나라에 전파되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서 이르기를 제(齊)나라의 풍속에 8신제(八神祭)가 있는데 8신이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이다. 하늘(天)은 음(陰)을 좋아하는 고로 그것에대한 제사는 반드시 높은 산의 아래 작은 산의 위에서 하는데 곧 하늘을 태백산의 기슭에서 제사하는 유법이다. 땅(地)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는 고로 그것에대한 제사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방구(方丘)에서 하는데 또한 역시 참성단(塹城壇)에서 제사하는 풍속을 이은 것이다. 천주는 삼신께 제사하고 병주는 치우께제사하고 삼신은 천지만물의 시조가 되고 치우는 만고 무신(武神) 용강(勇强)의시조가 되어 큰 안개를 만들고 물과 불을 부리고 또 만세의 도술(道術)의 시종(宗)이 되어 바람과 비를 부르고 만신(萬神)을 부르니 이로서 대시(大始)의 세상에 항상 천하 병장사(戎事)의 주인이 되었다. 회대의 땅은 이미 엄(奄), 람(藍),양(陽), 개(介), 우(隅), 래(萊), 서(徐), 회(淮)의 8족이 거주한 곳이므로 곧 팔신의 설은 8족에서 싹터서 당시에 성행하였다. 유방(劉邦)은 비록 동이(夷) 계통은아니나 풍패(豊沛)에서 기병한즉 풍패의 풍속으로 치우를 제사하였다. 고로 나라또한 풍속에 연원함으로서 치우에게 제사하며 희생의 피를 바르고 북을 치며 기를 날렸다. 이로서 10월에 패(氵+覇) 강의 상류에 이르러 여러 제후와 더불어함양(咸陽)을 평정하고 도읍을 세워 한왕(漢王)이 된즉 10월로서 세수(歲首)를삼았다. 이것은 비록 진(秦)의 정월 삭일(正朔)을 이은 것이지만 역시 동황태일(東皇太一)을 숭배 공경하고 치우를 공경하여 제사하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4년 후에 진나라 영역이 이미 평정된즉 축관(祝官)에게 장안(長安)에 치우의 사당을 세우게 명하였으니 그가 치우를 공경하는 순후함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진서 천문지(晋天文志)에서 치우의 기(旗)는 혜성과 같았으며 뒤에 모양을 구부렸다. 기가 보이는 방향의 아래에 병사가 있었다고 전한즉 곧 치우천왕이 상천에서 별자리가 된 것이다. 통지(通志)의 씨족략(氏族略)에서 치씨(蚩氏)는 치우의 후손이다고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창힐(蒼頡)은 고신(高辛)과 더불어 모두치우씨의 후예(苗裔)로 대극성(大棘城)에서 태어나서 산동의 회북(淮北)으로 옮겨 이주한 것이라고 하니 대개 치우천왕의 영준한 풍모(英風)와 웅렬함(雄烈)이먼 지역의 깊은 곳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방사(士)들이 신이한 무만(誣謾)의 설에 현혹된 것또한 그러하였다. 제의 위(威)왕과 연의 소(昭)왕 시절부터 사신을 파견하여 삼신산을 찾으니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사이 때의 송무기(宋無忌), 정백교(正伯僑), 극상(克尙), 선문자고(羨門子高)는 이후의 무리로 곧 연나라 사람들이고 문성(文成), 오리공(伍利公), 손경(孫卿), 신공(申公)의 무리들은 모두 제나라 사람이다. 옛날에 여상(呂尙)도 역시 치우씨의 후예이다. 고로 역시 성이 강(姜)이다.대저 치우가 강수(姜水)에 거주하면서 아들을 둔 것은 모두 강씨(姜氏)이다. 강태공(姜太公)은 제나라를 다스리자 먼저 도술을 닦고 천제지(天齊地)에서 하늘에제사하고 또한 제나라에서 봉함을 받으니 8신의 풍속이 이 땅에서 더욱 성하였다. 후세에 그 땅에 많은 도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신선 황제(黃), 노자(老)와 뒤섞이고 부연하고 더욱더 그것을 윤식한즉 이 또한 강태공이 그 풍속을조장한 것이다. 일직이 음부경(陰符經)의 주(註)를 지어 자부(紫府)와 삼황(三皇)의 뜻을 조술한즉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들이 어찌 괴이하고 들떠 허황된 설을좋아하지 않고 편안함을 얻겠는가. 또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과 황제중경(黃帝中經)의 책 또한 태자 부루(扶婁)에게서 나와서 우(虞)의 사공(司空)에게 그것이전해졌다. 이후에 다시 기자(箕子)가 주왕(紂王)에게 홍범(洪範)으로 펼치게 되니역시 바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의 설인즉 대개 그 학문의 근본은 신시 구정균전(邱井均田)의 유법인 것이다.
밀기(密記)에서 전하기를 옛날에 죽은 자를 옮길 때 고향(鄕)을 벗어나지 아니하고 한 곳에 합장(合葬)하여 표(表)를 하니 지석(支石)이 되었다. 이후에 변하여단(壇)이 되니 지석단(支石壇) 또는 제석단(祭石壇)이라고 칭하였다. 산 정상에있고 산을 파서 단을 조성한 것을 천단(天壇)이라고 하고 산 골에 있고 나무를심고 토단(土壇)을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라고 하는데 지금 승려의 무리(僧徒)들이 제석(帝釋)으로 혼동하여 단(壇)이라고 칭한즉 옛 것이 아니다. 삼신을 수호하고 이로서 사람의 수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고 하는데 본래는 삼신을 모시고 따르는 랑(郞)이다. 삼랑(三郞)은 배달의 신하이다. 역시 삼신수호의 관직을 세습하였다고 하였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서도 이르기를 삼랑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를 뿌리고 재물과 이익을 주관하는 자는 업(業)이 되고 교화하고 위엄과 복록(威福)을주관하는 자는 랑(郞)이 되고 무리를 모아 공(功)을 기원하는 것을 주관하는 자는 백(伯)이 된즉 옛날에 시작된 신도(神道)이다. 모두 능히 신령을 내려 예언을하였는데 신의 법리(神理)에 누누이 적중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 혈구(穴口)에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성(城)이란 바로 삼랑이 숙위하는 곳이다. 랑(郞)이란바로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으로 들어와 절을 짓고 대웅(大雄)이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승도들이 옛것을 답습하여 이렇게 칭한 것으로 본래는승가의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 전하기를 승도(僧徒)와 유생(儒生)은 모두 낭가(郞家)에 예속되었는데 이로서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혹은 전하기를 옛적에는 인민(人民)들이 계곡에 흩어져 거처하므로 장사(葬事) 지내는 정해진 땅이 없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 수혈(隧穴)에 옮겨서 안치하고 천신과 함께 배위(配)하여 제사하고 후에 혹 평지가 있으면 그기에 장사를 지내고둘레에 박달나무, 버드나무, 소나무, 잣나무를 심어 그것을 식별하였다. 이러함으로서 신시의 세대에는 능묘(陵墓)의 제도가 없었는데 후에 중고시대(中古)에 이르러 국가가 부유하고 종족이 강성하고 산사람을 부양하는데 넉넉하게 되니 죽은 이를 보낼 때에도 역시 제사를 사치스럽게 하고 예식도 갖추게 되었다. 묘(墓)를 다스리는 것도 몹시 융성하여 혹은 원(圓)으로 혹은 방(方)으로 능히 그렇게 장식을 사치스럽게 하였다. 높이와 크기, 넓이와 좁이, 경사짐과 반듯함에도 규격이 있었다. 내벽과 외분을 고르게 다듬고 겸하여 정교하게 하였다. 고구려 때에 이르러 능묘의 규모와 제도는 천하에 으뜸이었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환단고기 (신교출판사, 김호영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