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角+羊慕漱)로부터 나왔는데 해모수 어머니의 고향도역시 그 땅이다. 조대기(朝代記)에 이르기를 해모수는 하늘을 따라 내려와 일찍이 웅심산(熊心山)에 거주하다가 부여의 옛도읍지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들에게 추대된바 마침내 나라를 세우고 왕으로 칭하니 이가 부여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시종하는 자들이 백여명이었다. 아침이면 정사를 듣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랐다. 명령하는바 없어도 관경이 저절로 교화되어 산에는 도적이 없고 곡식이 들판에 가득하고 나라에는 큰일이 없고 백성 또한 근심이 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내려와 존재한 것은 임술년 4월 8일이었는데 곧 진(秦)나라 왕(王) 정(政)의 8년이었다.
고리(槀離) 군왕 고진(高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인데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로로 봉함을 받았다. 불리지는 일찍이 서압록강을 지나다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 기뻐서그에 장가들어 고주몽(高朱蒙)을 낳았는데 때인즉 곧 임인년 5월 5일로서 바로한(漢)나라 주인(主) 불릉(弗陵) 원봉(元鳳) 2년이었다. 불리지가 몽어하시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는데 지금의 서란(舒蘭)이다. 성장하여 사방으로 유람하다가 가섭원(迦葉原)을 택하여 그곳에서 살았다. 관가(官家)에 선택되어 목마(牧馬)가 되고 오래지 않아 관가에서 꺼리는바 되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더불어 도망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그때에부여왕에게는 후사(嗣)가 없어 주몽이 마침내 왕의 사위로 들어와 대통을 이으니 이가 고구려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평락(平樂) 21년 갑오년 10월에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그곳을 멸하였다. 이듬해 을미년에 졸본(卒本)으로부터 눌견(訥見)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눌견은 지금의 상춘(常春) 주가성자(朱家城子)이다.유리명제(琉璃明帝) 21년에 또 눌견으로부터 다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또한 황성(皇城)이라고 하였다. 내부에 환도산(丸都山)이 있어 산 위에 성을 쌓아 놓고 일이 있을 때 곧 그곳에 거주하였다.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 20년에 제왕께서 낙랑국(樂浪國)을 습격하여 그곳을 멸하니 동압록(東鴨綠) 이남이 우리에게 속하게 되었지만 홀로 해성(海城) 이남 근해의 여러 성들은 포함시키지 못하였다. 산상제(山上帝) 원년에 아우 계수(罽須)를 보내어 공손탁(公孫度)을 공격하여 부수고 현토(玄菟)와 낙랑(樂浪)을 토벌하여 그곳을 멸하니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대변경(大辯經)에 이르기를 고주몽 성제께서 조서에 이르기를, ‘천신께서만인을 하나의 모습으로 만들어 세 가지 참됨(三眞)을 고르게 부여하니 이에 사람 그것이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들이 북부여로부터 나와서 천제(天帝)의 아들이 되었음에랴. 철인(哲人)은 비움(虛)과 고요함(靜)과 계율(戒律)로 사악한 기운을 영원히 끊어버려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니 스스로 무리들과 더불어 인사(人事)의 일마다 옳음을 얻는도다.군사를 사용하는 것은 이로써 침략과 정벌을 완화하는 바이고 형벌을 행하는 것은 이로써 죄와 악이 없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고로 비움의 극에서 고요함이 생기고 고요함의 극에서 지식이 충만해지고 지식의 극에서 덕이 융성해진다. 고로비움으로써 가르침을 듣고 고요함으로써 남의 처지를 헤아리고 지식으로써 만물을 다스리고 덕으로써 사람을 구제하리라. 이것이 곧 신시(神市)가 만물을 개화하여 교화한 것이니 천신과 성을 통하게 되고 중생과 법을 세우게 되고 선왕의공업을 온전히 하게 되어 천하 만대가 지혜와 삶을 이루고 그것을 함께 닦아 교화를 이루게 되리라.’ 하였다.
을파소(乙巴素)는 국상(國相)이 되어 젊고 영준(英俊)한 이들을 선발하여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삼았다. 교화를 관장하는 자를 참전인(參佺)이라 이르고 무리들 가운데서 선발하여 계율(戒)을 지키도록 하고 신께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게 되었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皂衣)이라 이르고 겸하여 법률(律)을 따르도록 하여 공중을 위해 앞장서게 되었다. 일찍이 무리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신시이화의 세상은 백성들로 말미암아 지혜가 열려 날마다 지극한 다스림으로나아간즉 이러한바 환(亙)으로서 만대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되었다. 고로 참전인에는 계율(戒)이 있고 신의 말씀을 들어 이로써 무리를 교화하고 한맹(寒盟)은법률이 있어 신을 대신하여 공을 행하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 마음을 정립하고힘을 길러 이로써 훗날의 공(功)에 대비하였다.’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르기를, ‘도(道)로써 천신을 섬기고 덕(德)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덮을 수있어야 천하에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삼신일체의 기운을 받고 성명정(性命精)을 나누어 얻고 스스로 광명이 밝게 존재하여 움직이지 않는 연유로 때에 맞게 느낌(感)이 발함으로서 도가 곧 통한다. 이것이 곧 3물(物)인 덕혜력(德慧力)을 몸소 실행하고 3가(家)인 심기신(心氣神)을 화하여 이루고 3도(途)인 감식촉(感息觸)을 기쁘게 채우는 바이다. 요약하면 날마다 생각의 목표(念標)를 구하여 재세이화하고 고요히 비탈길을 닦아 홍익인간 하는데 있다.’ 라고 하였다.환국에서 이르기는 5훈(訓), 신시에서 이르기는 5사(事), 조선에는 이르기는 5행(行) 6정(政), 부여에서 이르기는 9서(誓), 삼한에서 통용되는 풍속에서는 또한 5계(戒)가 있었는데 이르기를 효(孝), 충(忠), 신(信), 용(勇), 인(仁)이다. 모두 백성을 교화함으로서 바르고 고르게 하고 무리를 조직하려는 뜻이 존재한 것이다.책성(柵城)에 태조 무열제(武烈帝)의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廣開土境大勳蹟碑)가 있고 안주(安州)의 청천강 언덕 위에 을지문덕의석상이 있고 오소리강(烏蘇理江)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가 있고 평양의 모란봉중턱에 동천제(東川帝)의 조천석(朝天石)이 있고 삭주의 거문산(巨門山)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묘가 있고 운산의 구봉산(九峯山)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조대기에 이르기를 동천제 또한 단군이라 칭하고 매년 한맹(寒盟)때 마다 평양에서 삼신께 제사올리고 추앙하였는데 지금의 기림굴(箕林窟)은 바로 그 제사올린 장소이다. 크게 맞이하는 제전(祭典)을 수혈(隧穴)에서 행하기 시작하였는데 구제궁(九梯宮)과 조천석(朝天石)이 있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모두 가리키기가능한 지점이다. 또 삼륜구덕(三輪九德)의 노래가 있어 이를 권장하였는데 조의선인이 모두 그렇게 선발된 것이며 나라 사람들(國人)이 의식을 거행하는 자를자랑스럽게 여기는바 되었다. 그러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영예를 베풀고 그와더불어 왕의 사자와 대등하게 되었겠는가.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은 융성한 공과 성스러운 덕이 여러 왕들 중에서 탁월하여 사해(四海) 내의 모든 사람들이 열제(烈帝)이라고 칭하였다. 나이18세에 광명전(光明殿)에서 등극하니 의례로 천악(天樂)을 베풀고 전장에 나갈때마다 군사들(士卒)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어아가(於阿歌)로 사기를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행할 때 마리산(摩利山)에 이르러 참성단(塹城壇)에 올라친히 삼신께 제사를 올렸는데 역시 천악을 사용하였다.
한번은 스스로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倭人)을 쳐서 부수었는데 왜인에는 백제가 개입되어 있었다. 백제는 먼저 왜와 몰래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연이어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게 하였다. 제왕(帝)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공격하여 웅진(熊津), 임천(林川), 와산(蛙山), 괴구(槐口), 복사매(伏斯買), 우술산(雨述山), 진을례(進乙禮), 노사지(奴斯只) 등의 성을 빼앗고 다음 길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때에 하늘에 제사올리고 돌아왔다. 그때부터 바로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락(駕洛)의 여러 나라 모두가 들어와 조공하여 끊이지 않고 거란(契丹), 평량(平涼)이 모두가 평정되어 굴복하고 임나(任那), 이(伊), 왜(倭)의 족속들이 모두 신하라고 칭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해동의 강성함이 이때에 최고로달하였다. 이보다 먼저 협보가 남한(南韓)으로 달아나 마한(馬韓) 산중에 거주하니 따라 나와 거주하는 자들이 수백여 집(家)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해마다 큰흉년이 들자 떠돌아 다니는 자들이 길에 가득하였으므로 협보는 장차 변혁이 있을 것으로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싸가지고 배로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갔다.해포(海浦)를 따라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렀는데 곧가라해(加羅海)의 북쪽 연안이었다. 수개월 머물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그곳에서 살았는데 이가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가 되었다. 후에 임나(任那)에 병합되어 연정(聯政)으로 다스려졌는데 3나라는 바다에 있고 7나라는 육지에있었다. 처음에 변진(弁辰)의 구야국(狗邪國) 사람들이 먼저 집단으로 모여 살았는데 이것이 구야한국이 되었고 다파라는 하나로 다라한국(多羅韓國)이라고 칭하였는데 홀본(忽本)으로부터 나왔으며 고구려와 더불어 일찍이 이미 화친을 맺은 고로 항상 열제가 제어하는 바가 되었다. 다라국은 안라국(安羅國)과 더불어같은 이웃이고 같은 성(姓)이며 옛날에 웅습성(熊襲城)에 있었는데 지금의 구주(九州) 웅본성(熊本城)이 이것이다.
왜(倭)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東冶縣)의 동쪽에 있고 배로 구천리를건너가면 나패(那覇)에 이르고 또 천리를 건너가면 근도(根島)에 이르는데 근도는 또한 저도(柢島)라고도 한다. 이때에 구(狗)의 노비들이 여왕(女王)과 더불어서로 다투어 통행의 검색이 매우 엄하여 그기서 구야한(狗邪韓)으로 가려는 자들은 대개 진도(津島), 가라산(加羅山), 지가도(志加島)를 경유하여 비로소 말로호자(末盧戶資)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 그 동쪽 경계는 바로 곧 구야한국(狗邪韓國)의 땅이다. 회계산은 본래 신시중경(神市中經)의 소장처이고 사공(司空) 우(禹)가 3달 동안 재계하고 얻어 내어 치수에 공을 세운 고로 우가 돌을갈아 산의 높은 곳에 부루(扶婁)의 공을 새겼다고 전한즉 오(吳)와 월(越)은 본래 구려(九黎)의 옛 읍(邑)이고 산월(山越)과 좌월(佐越)은 모두 그 후예들이 나뉘어 옮겨온 땅이다. 항상 왜와 더불어 왕래하면서 무역판매로 이익을 보는 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진나라때 서불(徐市)이 동야(東冶) 해상으로부터 바로 나패에 이르러 종도(種島)를 경유하여 뇌호내해(瀨戶內海) 연안에서 시작하여 기이(紀伊)에 도달하였다. 이세(伊勢)에는 옛날에 서복(徐福)의 묘와 사당이 있었는데혹자는 이르기를 단주(亶州)가 서복이 살던 곳이라고 전한다.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는 기원을 건흥(建興)으로 고치고 어짐과의로움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널리 강토와 집을 개척하였다. 웅진강(熊津江) 이북이 우리에게 속하게 되니 북연(北燕), 실위(室韋) 여러 나라들이 모두 서족(叙族)에 들어왔고 또 신라 매금(寐錦)과 더불어 백제 어하라(於瑕羅)가 남평양에 모여바치는 공물과 수비하는 병사의 수를 약정하였다.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는 기원을 명치(明治)로 고쳤다. 11년에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이 우리에게 속하게 되니 이때에 이르러 국토가 점점커졌다.
평강상호태열제(平岡上好太烈帝)는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주몽의 풍모를 닮았는데 기원을 대덕(大德)으로 고치고 나라를 밝게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대덕 18년 병신년에 제왕께서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가서 갈석산(碣石山), 배찰산(拜察山)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楡林關)에 이르러 북주(北周)를 크게 부수니 유림진(楡林鎭) 이동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유림은 지금의 산서부근이다.
영양무원호태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때 천하는 잘 다스려지고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들은 융성하였다. 수나라 주인(主) 양광(楊廣)은 본래 선비(鮮卑)의 후손인데 남북의 지역을 통합하고 그 여세로 우리 고구려를 업신여겨서 소로(小虜)이라 하고 상국(上國)을 업신여기고 거만하여 대군을 자주 일으켰으나 우리는이미 대비를 하고 있어서 일찍이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홍무(弘武) 25년에광이 또 다시 동쪽을 침입하므로 먼저 장병들을 보내어 비사성(卑奢城)을 여러겹으로 포위하였으나 관병이 전쟁에 불리하였다. 장차 평양을 공격할 것이라는것을 제왕께서 듣고 지원병을 계획할 의도로 곡사정(斛斯政)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마침 조의 일인(一仁)이라는 자가 자원하여 따르기를 청하므로 함께 갔다.양광에게 표문(表)을 바치니 광이 배안에서 표문을 들고 절반을 읽지 못하였을때 갑자기 작은 쇠뇌(小弩)를 꺼내어 그의 가슴을 맞히니 광이 놀라 쓰러지며정신을 잃었다.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그를 업도록 하여 급히 작은 배로 옮기고 물러나며 명하여 회원진(懷遠鎭)에서 철병하도록 하였다. 광이 좌우측근에게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소국을 치려다가 불리하니 이것이 만대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하니 양명 등이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대답이 없었다. 후세사람들이 이 일을 이르기를,‘지는 너희 미련둥이 한가(漢家)의 애들아, 요동을 향하여 개죽음의 노래를 부르지 마라. 문무를 갖춘 우리 선조 환웅(桓雄)이라 부르고 면면이 이어져온 환족혈통(亙血)의 장자로 영웅호걸이 많다네. 주몽 태조, 광개토왕의 위엄이 사해(四海)를 진동하여 공을 더할 수가 없도다. 유유(紐由), 일인(一仁), 양만춘(楊萬春)이 침략자들을 겁주어 저절로 무너져 쓰러졌다. 세계 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되었고 외부의 오랑캐를 쳐서 물리치고 평화를 보전하였네. 유철(劉徹), 양광(楊廣), 이세민(李世民)은 멀리서 보거나 소문만 들어도 망아지 달아나듯 패하여 도망하였네. 영락(永樂)때의 기공비는 1천 척(尺)이고 만가지 깃발은 일색(一色)이고 태백산은 더 높아라.’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의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도를 닦고 천신(天神)의 꿈을 꾸고 크게 깨달았다. 매년 3월 16일이 되면 말을타고 마리산(摩利山)으로 가서 제물을 올리고 경배하고 돌아왔다. 10월 3일이 되면 백두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렸는데 제천(祭天)은 곧 신시의 옛풍속이다.홍무(弘武) 23년에 수나라 군사 130여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와서 공격하였다.문덕이 능히 기묘한 계책으로 병사를 보내어 빼앗고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살수(薩水)에 이르러 마침내 그들을 크게 부수었다. 수나라 군사 수군과 육군들이 함께 무너져 살아서 요동성(遼東城:지금의 昌黎)으로 돌아간 자는 겨우 이천칠백명 정도였다. 광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구걸하였으나 문덕은 듣지 않고제왕(帝) 또한 그들을 추격하라고 엄히 명하였다. 문덕이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승기를 타고 바로 달려 한 갈래는 현토도(玄菟道)로부터 태원(太原)에 이르고 한갈래는 낙랑도(樂浪道)로부터 유주(幽州)에 이르러 그 주현으로 들어가서 그들을다스리고 그 유민들을 불러서 그들을 안정시켰다. 이에 건안(建安), 건창(建昌),백암(白岩), 창려(昌黎)의 여러 진(鎭)은 안시(安市)에 속하고 창평(昌平), 탁성(涿城), 신창(新昌), 통도(桶道)의 여러 진은 여기(如祈)에 속하고 고노(孤怒), 평곡(平谷), 조양(造陽), 누성(樓城), 사구을(沙溝乙)은 상곡(上谷)에 속하고 화룡(和龍), 분주(汾州), 환주(桓州), 풍성(豊城), 압록(鴨綠)은 임황(臨潢)에 속하였는데모두 예전대로 관리를 두었다. 이에 이르러 강한 병사가 백만이 되고 국경의 영토가 더욱 넓어졌다. 양광은 임신년의 침략자로 출사(出師)를 성대하게 하였는데전대에는 없는 것이었다. 우리 조의(皂衣) 이십만으로 그의 군대를 멸하여 없앴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닌 것이다. 을지공과 같은 분은곧 만고에 시대의 세력을 창출한 한 분의 성스러운 호걸이다.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은 명나라 사신 축맹(祝孟)과 더불어 백상루(百祥樓)에 함께 올라 시를지었는데 이르기를
‘살수 출렁 출렁 출렁거려 창공을 푸르게 하는데 수나라 군사 백만 명이 물고기 밥이 되었네. 지금까지 어부와 나무꾼의 말에 남아 전해지니 나그네의 비웃음거리를 채우는데 지나지 않네.’
구사(舊史)에 이르기를 영양무원호태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 홍무(弘武) 9년에제왕께서 서부 대인 연태조(淵太祚)를 파견하여 가서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韋沖)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百濟)가 병력으로써 제(濟),노(魯), 오(吳), 월(越)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官署)를 설치하고 민호(民戶)를 조사하여 장적(籍)을 만들었다. 왕의 작위를 분봉하여 험색(險塞)에 주둔하여 지키도록 하고 군역과 조세는 모두 내지(內地)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明治) 연간에백제의 군정(軍政)이 쇠퇴하고 부진하여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聖朝)에 돌아오므로 성읍을 획정하고 문무의 관리를 배치하였다. 이내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키고 남과 북에서 사변이 있어 소요가 사방에서 일어나 피해가 생활하는 백성들에게 까지 미치므로 제왕께서 거동하여 몹시 노하여 하늘의 토벌을 받들어 행하니 사해 안에 명령을 듣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수나라 주인 양견(陽堅)이 화가 되는 마음을 은밀히 감추고 감히 복수할 군사를 출동시키고 비밀리에위충(韋沖)을 파견하여 총관(總管)이라고 이름하며 관가를 무너뜨려 부수고 읍락을 불태우고 약탈하자 곧 장병들을 보내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 산동(山東)이 평정되어 복종하니 해성이 편안해졌다. 이 해에 견(堅)이 또 양량(楊諒), 왕세적(王世績) 등 삼십만명을 파견하여 와서 더불어 싸우는데 겨우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요택(遼澤)에 이르지도 못한 채 곧바로 물난리를 만나 군량의이동이 막히고 여역(癘疫)이 극성하였다. 주라구(周羅緱)가 군사로써 등주(登州)를 점거하고 전함 수 백척을 징집하여 동래(東萊)에서 배를 띄워 평양(平壤)으로나아가려다 우리 군사에게 발각된바 후군으로 항전하며 나아가다가 갑자기 큰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거나 수몰되었다. 이때에 백제가 수(隋)나라에 군사의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다가 우리의 밀지를 받고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좌장군고성(高成)이 비밀리에 수나라와 친해 두려는 마음을 가지고 은밀히 막리지의북벌계획을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여러번 군사를 보내달라고 청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부수는데 공이 있었다. 막리지(莫離支) 홀로 힘써 중론을 물리치고 남쪽을 지키고 북쪽을 정벌하는 정책(南守北伐策)을 강력히 고집하여 여러번 이해를 따져 따르게 하였는데 고성이 즉위하자마자 앞의 제왕께서 남겨놓은 법을 모두 폐기하였다. 당(唐)나라에 파견하여 노자상(老子像)을 구하여 나라사람(國人)들이 도덕경(道德經) 강의를 듣도록 하고 또 무리 수 십만명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부여현(夫餘縣)에서 남해부(南海府)에 이르기 까지 천여리였다. 이때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도교(道敎)의 강습을 파하기를 청하고 또 장성쌓는 노역의 중지로서의 이해를 몹시 따지니 제왕께서 매우 불쾌하게 여겨 소문의병사를 빼앗고 장성 쌓는 노역의 감독을 명하고 은밀히 여러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여 그를 죽여 없애려 하였다. 소문이 먼저 들어 알고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어찌 이 몸이 죽으면 나라가 온전하게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 일이 급하구나.때를 놓칠 수가 없다.” 라고 하고 부병(部兵)을 전부 모아서 장차 무인(武)을 사열하는 군사처럼 하고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놓고 여러 대신들을 초대하니그것을 보려고 모두 함께 임하였다. 모두 도착하자 소문이 목소리를 가다듬고말하기를, “문 앞에 호랑이와 이리가 있는데 구원은 하지 않고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느냐.” 라고 하며 마침내 그들을 제거하였다. 제왕께서 변을 듣고 미복차림으로 몰래 도망하여 송양(松壤)에 이르고 조서를 내려 나라사람들을 초대하고 모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는 자가 없으므로 스스로 부끄러워 땀을 억제하지못하여 드디어 저절로 숨이 끊겨 붕어하셨다.
조대기에 이르기를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는데 성은 연씨(淵氏)이고 그의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祚)이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라 하고 증조할아버지는 광(廣)이라고 하는데 모두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홍무(弘武) 14년 5월 10일에 태어났고 나이 9살에 조의선인(皂衣仙人)에 선발되었다. 모습(儀表)이 영웅처럼 위대하고 의지와 기상이 호걸처럼 뛰어나며 항상 병사무리와 더불어 섶을 깔고 자고 손수 바가지로 마시며무리속에서는 자기의 온 힘을 다하고 혼란 속에서도 징후를 파악해 내었다. 상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나누어서 지급하고 정성과 믿음으로 주위를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었다. 땅을 씨줄(緯)로 하고 하늘을 날줄(經)로 하는 재주에 까지 이르러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여 한 사람도 딴 마음을품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법을 집행함에는 엄하고 명백하고 귀한 자든 천한 자든 동일하게 다스리고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한 사람도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조금도 놀라는 마음이 없고 당나라의 사신과더불어 술 권하며 말을 나눌 때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항상 스스로 민족을음해하면 소인이 되고 능히 당나라 사람을 대적하면 영웅이 된다고 하였다. 기쁜 일에는 아무리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고 노여운 일에는 권력있고 귀한사람들도 모두 두려워하였으니 참으로 한 시대의 쾌걸(快傑)이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물속에서 났다고 하여 능히 하루 종일을 물속에서 헤엄쳐도 더욱 건강해지고 피로해 하지 않으니 무리들이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리고 늘어서서 절하며말하기를 창해(滄海)의 용신(龍神)이 다시 몸으로 화하였다고 하였다. 소문이 이미 고성제(高成帝)를 추방함과 더불어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高臧)을 맞아들였는데 이분이 보장제(寶臧帝)가 되었다. 소문이 이미 뜻을 얻어 만법(萬法)이공공을 위하는 도를 행하니 자기를 완성하여 자유로워지고 만물을 열어 평등해지는 것이었다. 세 올(三忽)이 전인(佺)이 되고 조의에게는 법율(律)이 있고 국방에 전력을 다하여 당나라를 방비하니 심히 강성하였다. 이보다 먼저 백제 상좌평과 더불어 함께 존립하자는 의리를 맺고 또한 신라 사신 김춘추(金春秋)를 청하여 사저에 머물게 하고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몹시도 하늘의 뜻을 거스르니 금수(禽獸)에 가깝소. 청하건대 나와 그대와 사사로운 원수를 잠시 잊고 이제부터 삼국부터 서족(敍族)까지 힘을 합해 곧바로 장안(長安)을 도륙내면 당나라의 괴수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바로 옛영토 그대로 연정(聯政)하여 인과 의로 함께 다스리고 서로 침입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영구히 준수할 계획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소.” 이렇게 재삼 권하였으나 김춘추는 끝내 듣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로다.
개화(開化) 4년에 당나라 주인 이세민(李世民)이 여러 신하들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諸夏)의 땅이었는데 수씨(隋氏)가 네 번 출사하였으나얻기가 불가능하였다. 내가 지금 출병함은 제하의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다.” 라고 하였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李世勣), 정명진(程名振) 등 수십만명을 거느리고 요택(遼澤)에 이르렀으나 진흙 수렁이 2백여리나있어서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말을 채찍질하며 급히 달려가 공격하였으나 이미 전쟁에 참여한 행군총관(行軍摠管) 장군차(張君叉)가 크게 패하였다. 이도종(李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세민이스스로 장수 수백기를 거느리고 세적과 함께 모여 백암성(白岩城) 서남쪽을 공격하니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거짓으로 파견하여 항복을 청하고는 실제로는 틈을 타서 반격을 하려고 하였다. 세민이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먼저 당산(唐山)에서 군사들을 내보내어 성을 공격하였지만 북부 욕살(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관병에 말갈병 십오만을 통솔하여 이끌고 바로앞에 이르렀다. 잇달아 안시에 보루(堡壘)를 만들고 높은 산의 험지에 웅거하며성안의 곡식을 먹고 군사들을 종용하여 그의 군마를 약탈하니 당나라 놈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돌아가려 하였으나 진흙 수렁에 막혀 앉아서 그대로 패하였다. 연수는 바로 앞까지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니 안시에서 사십리쯤 나아가게되었다. 사람을 보내어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에게 물었는데 그는 나이도 많고 일에 익숙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정의가 말하기를, “세민은 안으로는 많은 영웅을 제거하고 집을 바꾸어 나라를 만들었으니 역시 범상하지는 않소. 지금 모든 당나라의 군사를 거점으로 침범해 오니 그 예봉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될것이오. 우리를 위한 계책이란 만약에 병사를 주둔시켜 싸우지 않고 여러날 동안 오래 기다렸다가 기습병을 나누어 보내어 그들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 버리는것이오. 식량 보급로가 이미 없어지면 싸움을 하고자 하나 잘 할 수가 없고 돌아 가려하여도 길이 없으니 가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연수는그의 계획에 따라 적이 쳐들어 오면 막고 적이 후퇴하면 공격을 멈추고 또 기습병들을 보내어 식량 보급로를 불태우고 빼앗아 버렸다. 세민이 백가지 계책으로그를 유혹하고 뇌물을 주었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 속으로는 배반하여 수차례 몰래 보내어 기습하고 함정에 빠뜨려 찢어 죽이니 적의 사상자들이 몹시도많았다. 연수 등이 말갈병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오래 기다리는 작전을 펴더니 어느날 밤 돌변하여 급습하고 번개같이 공격하였다. 세민의 군대가 포위되어압박되니 비로소 두려운 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세민이 또다시 사신을파견하여 재물과 보물로 위로하며 연수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강한 신하가 그 위에 있는 임금(君)을 시해한 연유로 와서 죄를 묻는 것이오. 교전에 이르러 귀하의 국경에 들어왔으나 군량미가 공급되지 않는 고로 간헐적으로몇 곳을 불태우고 약탈한 적이 있을 뿐이오. 귀국이 예를 갖추어 너그럽게 우리의 교섭을 받아준다면 즉시 반드시 복구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연수가 말하기를, “알겠소. 귀국의 병사를 삼십리 뒤로 물러나게 한다면 내가 장차 우리 제왕(帝)을 만나 보겠소. 그러나 막리지는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고 군법이 스스로 존재하므로 여러 말이 필요 없소. 그대 임금 세민은 아버지를 폐하고 형을죽이고 음탕하게 형제의 어머니를 받아들였으므로 이 또한 죄를 물을 수 있소.”라고 하고 이것을 그에게 전하였다. 이에 사방에 감찰을 보내어 수비를 더욱 든든히 하였다. 산을 의지하여 스스로 견고히 하고 빈틈을 타서 기습을 하니 세민의 백가지 계책이 쓸모가 없었다. 요동출병의 불리함을 뼈저리게 한탄하였으나이미 후회를 막을 수는 없었다.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이르기를, ‘6군(六軍)이 고구려에 위태롭게 올라탄 바가 되어 장수들이 부진하였다. 척후병이 영공(英公)의 휘하에 있는 흑기(黑旗)가포위당한 것을 고하니 세민이 크게 두려워 하였다. 비록 끝내 스스로 탈출하였으나 위급함과 두려움이 그와 같았다. 신구당서(唐書)와 사마공(司馬公)의 통감(痛鑑)에는 언급한 것이 없으니 어찌 나라를 위하여 치욕스러운 것을 숨긴 것이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세적이 세민에게 말하여 아뢰기를, “건안(建安)은 남쪽에 있고 안시(安市)는북쪽에 있으니 우리의 군량을 요동(지금의 창려)으로 수송할 길을 조기에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를 넘어서 건안을 공격하다가 만약에 고구려가 그 수송로를끊으면 우리의 형세가 반드시 어려워질 것입니다. 안시를 먼저 공격하여 안시가함락되면 곧 북치고 행진해 가서 건안을 취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旗)과 덮개(蓋)를 바라보다가 매번 성에 올라 북을 치며 조롱하고 세민을 공이로 치며 꾸짖고 그의 죄를 낱낱이 헤아려 무리들에게 고하였다. 세민의 노기가 극에 달하게 되어 성을 함락하게 되는 날에남녀를 모조리 그곳에 묻어버리겠다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더욱 더 견고하게 수비하니 그곳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에 장량(張亮)의 군사들이 사비성(沙卑城)에 있어 그들을 부르고자 하였으나 실행되지못하였고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쳤다. 장량이 장차 군사를 이동하여 오골성(烏骨城)을 습격하였다가 도리어 고구려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도종(李道宗)도또한 험지를 만나 부진하니 이에 당나라 놈의 여러 장수들의 의논이 서로 엇갈리게 되었다. 세적은 홀로, “고구려가 안시를 구원하느라 국력이 기울게 되었을테니 안시를 버리고 바로 평양을 두드리는 것보다 못하다.” 라고 하였다.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천자(天子)가 친히 정벌하게 되면 여러 장수들이 서로 다르므로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건안(建安)과 신성(新城)의 적의 무리 수십만과 고연수가 거느리는바 말갈 또한 수십만입니다. 국내성의 군사들이 만약에 또 오골성으로 되돌아 오게 되면 낙랑(樂浪)으로의 여러길의 험지를 막을 것입니다. 저들의 기세가 날로 강성해지는 것이 이와같은즉압박포위를 서두르면 우리는 적을 구경만 할 것이니 후회를 막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안시를 먼저 공격하고 그 다음에 건안을 취한 연후에 계속 그 여세를몰아서 진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이 아주 완전한 계획입니다.” 라고 하였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은 그 소문을 듣고 깊은 밤을 틈타 수백명의 정예부대로 성에 밧줄을 매달아서 아래로 내려 보내니적진이 서로 짓밟아서 사상자들이 아주 많았다. 세민이 이도종으로 하여금 성의동남쪽 모퉁이에 토산(土山)을 쌓게 하자 관병이 성이 허물어진 곳을 따라 나가공격하여 드디어 토산을 빼앗아 참호를 파고 그곳을 지키니 군세가 더욱 더 떨치게 되었다. 당나라 놈들의 여러 진영에서는 거의 전의를 상실하였고 부복애(傅伏愛)가 전쟁에 패하여 참수되었다고 전해지니 도종 이하 모두가 맨발로 달려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난파(灤坡)를 순행하여 정황을 상세히 묻고 총공격의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공격하였다. 연수 등이 말갈과 더불어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에 올라 전쟁을 감독하니 사기가 더욱고양되어 1당 100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세민이 분하여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여 감히 결전에 나섰다. 양만춘이 이에 소리치며 활을 당기고 세민이 진영을 나왔다. 화살이 반쯤 공중에 뜨더니 마침내 적중된바 왼쪽 눈에 박혔다. 이세민이궁지에 빠져 몸둘 곳이 없으므로 샛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수만명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삼았다. 요택은 진흙 수렁이어서군사와 말이 다니기 어려웠다. 무기에게 명하여 1만명을 이끌고 풀을 깍아 길을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교량을 삼았는데 세민도 스스로 말채찍에 섶을묶어 사역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포오거(浦吾渠)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기를 독려하면서 여러 군사들이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는데 사나운 바람과 눈으로 점점이 젖은 사졸(士卒)들의 사망자가 많았다. 길에 불을 피우게 하고 대비하는 그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하여 그들을 매우 빠르게 추격하였다. 추정국(鄒定國)은 적봉(赤峰)으로부터 하간현(河間縣)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장 신성으로 향하여군세를 크게 떨치었다. 당나라 놈들이 갑옷과 병기를 수없이 버리고 역수(易水)를 건너는 방향으로 도주할 때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통도성(桶道城)을 고쳐 쌓게 하니 지금의 고려진(高麗鎭)이다. 또 여러 군사들을 나누어 파견하고 한부대는 요동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지금의 창려이다. 한 부대는 세민의 뒤를 뒤쫓게 하고 한 부대는 상곡(上谷)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이에 세민(世民)이 궁지에 몰려 몸둘바를 모르다가 곧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구걸하였다. 막리지(莫離支)는 정국(定國), 만춘(萬春) 등 수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儀仗)을 펼치고 북치고 피리불며 앞에 인도되어 장안(長安)에 입성하여 세민(世民)과 더불어 산서(山西), 하북(河北), 산동(山東), 강좌(江左)의 땅을모두 우리에게 귀속하도록 약조하였다. 이보다 먼저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밖으로는 경쟁하면서도 함께 존립하였다. 요서땅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는데 이르기를 요서(遼西)와 진평(晋平)이다. 강남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는데 그 속현으로첫째는 산음(山陰), 둘째는 산월(山越), 셋째는 좌월(左越)이라고 하였다. 문자제왕(文咨帝) 명치(明治)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군현을 고쳐정하여 이르기를 송강(松江), 회계(會稽), 오성(吳城),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泉州)라고 하였다. 12년에 신라의 백성들을 천주로 옮겨서 그곳을 채웠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하지 않으므로 병사들을 보내어 공격하여 요서, 진평 등의 군(郡)을 취하고 백제의 군을 폐지하였다.
왕개보(王介甫)가 말하기를, “연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막리지가 살았을 때에는 고구려가 백제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였으나 막리지가 죽자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인걸인 것이다. 막리지는 임종할 때 남생(男生)과 남건(男建)을 돌아보고 일컬어이르기를, “너희 형제는 물처럼 서로를 사랑하여라. 화살대를 묶어 놓으면 강하지만 화살대를 나누어 놓으면 꺾여진다. 반드시 이 말을 잊지 말거라.” 라고 하였다. 장차 유언의 말이 천하의 인접국가의 사람들에게 웃음을 낳았으니 때는개화(開化) 16년 10월 7일이었다. 묘(墓)는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에 있다.고려진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육십리쯤에 있다. 안시성은 개평부(開平府)동북쪽 칠십리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湯池堡)이다. 고려성은 하간현(河間縣)서북쪽 십이리에 있는데 모두 태조 무열제(武烈帝)께서 쌓은 것이다. 당나라 번한(樊漢)의 고려성 회고시 한 수가 세상에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벽지에 성문이 열려있고 구름 걸린 숲속에 꿩이 담처럼 길게 뻗어 있네. 밝은물에 저녁빛이 머물고 어두운 모래에 별빛이 빛난다. 모으는 북소리는 구름따라일어나고 새로 핀 꽃은 흙을 털고 단장하네. 그러한 아침에 시장은 변하는데 다시 들을 수 없는 관현(管絃)의 소리여. 가시 누런 먼지 속이요 쑥대 우거진 옛길가로다. 가벼운 먼지는 비취를 묻어 버렸고 황량한 언덕에 소와 양이 오르네.어찌 할 수 없는 그 해의 일이여. 가을 소리 전하는 기러기 행렬이여.’ 라고 하였다. 내 비록 글에 대한 지식은 없으나 그 운을 따라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요서에는 아직도 옛 성터가 남아 있으니 반드시 이름있는 나라의 운과 복이길었음을 생각하라. 연산(燕山+田)은 험준한데 전쟁의 색채 숱하고 요하는 출렁출렁거리고 하늘의 빛과 한 가지구나. 바람부니 숲속은 계곡처럼 춤추는 모양을보이고 선금(仙禽)이 높은 나무에서 울며 단장을 하려 하네. 관문의 창과 깃발은하루 저녁에 변하고 물건 파는 소리 울리고 요령소리 처량하게 들린다. 연(燕)과양(凉)이 원래 모두 우리 소유였으니 관병이 있어 오래토록 진(鎭)의 마방에서말에게 물을 먹였네. 영웅은 나지 않고 그때 일은 지났으나 양을 몰아내듯 도적을 몰아낼 날은 다시는 없을런가. 이제 우리가 옛 일을 슬퍼하는 한없는 뜻을핵랑(核郞)들의 만리길에 노자로 삼고자 하노라.’
조대기에 이르기를 태조 융무(隆武) 3년에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서 한(漢)나라를 방비하였는데 10성은 하나는 안시이니 개평부(開平府)의 동북쪽 칠십리에 있고 둘은 석성(石城)이니 건안의 서쪽 오십리에 있고 셋은 건안(建安)이니안시 남쪽 칠십리에 있고 넷은 건흥(建興)이니 난하(灤河)의 서쪽에 있고 다섯은요동이니 창려(昌黎)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은 풍성(豊城)이니 안시의 서북쪽 백리에 있고 일곱은 한성(韓城)이니 풍성의 남쪽 이백리에 있고 여덟은 옥전보(玉田堡)이니 옛 요동국으로 한성의 서남쪽 육십리에 있고 아홉은 택성(澤城)이니 요택의 서남쪽 오십리에 있고 열은 요택이니 황하의 북쪽류 왼쪽 연안에있다. 5년 봄 정월에 또 백암성(白岩城)과 통도성(桶道城)을 쌓았다고 하였다.삼한비기에 이르기를 구지(舊志)에 전하기를 요서에 창료현(昌遼縣)이 있는데당나라 때에 요주(遼州)로 고쳤다. 남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그 아래가 바로 백암성인데 역시 당나라 때 소위 말하는 암주(岩州)가 바로 이곳이다. 건안성은 당산(唐山)의 경내에 있고 그 서남을 개평(開平)이라 하고 다른 말로 개평(蓋平)이라고 하는데 당나라 때에 역시 개주(蓋州)이라고 칭한 곳이 이곳이다고 하였다. 자치통감에 이르기를 현토군은 유성(柳城)과 노룡(盧龍)의 사이에 있다고하고 한서(漢書)에는 마수산(馬首山)은 유성의 서남쪽에 있는데 당나라 때에 토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연타발(延佗渤)은 졸본 사람인데 남북 갈사(曷思)를 오가면서 재물을 잘 다스려 부자가 되고 거금을 축적하기에 이르러 음으로 주몽을 도와 그가 터전을 창업하고 도읍을 세울때에 공이 아주 많았다. 후에 무리를 거느리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가서 고기와 소금을 팔아 이익을 보더니 고주몽 성제(聖帝)께서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자 곡식 5천석을 납부하였고 도읍을 눌현(訥見)으로 옮기자먼저 자원하여 납부하였다. 유민과 도망자를 불러 위로하고 왕의 일에 힘쓰니이러한 공으로 좌원(坐原)에 봉함을 받고 나이 80에 돌아가시니 때는 평락(平樂)13년 병신년 봄 3월이었다.
고주몽이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여 이르기를 만약에 적자인 유리(琉璃)가 오면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불리할 것을 우려하였다. 경인년 3월에 사람을 통하여 패대(浿帶)의 땅이비옥하여 만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무리들이 남쪽으로 달아나 진한(辰)과 번한(番) 사이의 바다 가까운 벽지에 이르러 그기서 거주하였다. 10년만에 밭을 사고농장을 두어 부자가 되고 거금을 쌓으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부속하는자들이 많았다. 남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동쪽 해안은 큰 바다였는데 천리의반의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사람을 보내어 주몽 제왕께 글을 올려 국가의속국이 되기를 원하니 제왕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고 책봉하여 소서노라 부르고 어하라(於瑕羅)로 삼았다. 곧 13년 임인년에 이르러 몽어하시고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니 사방의 관경이 부속하지 않았다. 이에 마려(馬黎) 등이 온조(溫祚)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마한(馬韓)이 쇠하여 존립이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가서 도읍을 정할 수 있는 때입니다.” 라고 하였다.온조가 말하여 승낙하고 곧 배를 편성하여 바다를 건너서 처음으로 마한에 도달하여 미추홀(彌鄒忽)에 가서 이르니 사방의 들판은 텅 비어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만에 한산(漢山)에 도착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는데 마려, 오간(烏干) 등 10신하들이 말하기를, “오로지 이 하남(河南)의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비옥한택지가 열려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막혀 있으니 이처럼 하늘같은 가파름과지리적인 이로움을 갖춘 곳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이다.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것이 마땅하고 다시 땅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라고 하였다. 온조는 10신하들의 의논에 따라 마침내 하남(河南)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그대로 백제(百濟)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백제에서 왔기 때문에 이름을 정한 것이다.후에 비류가 몽어하시니 그 신민(臣民)들이 그 땅을 가지고 부속하였다.
사로(斯盧)의 시조왕(始王)은 선도산(仙桃山)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에 부여(夫餘) 제실(帝室)의 딸 파소(婆蘇)가 있어 남편없이 잉태하자 사람들이 의심하는 바가 되었다. 눈수(嫩水)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고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진한의 내을촌(柰乙村)에 도달하여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사람이 있어 이 소문을 듣고 가서 거두어 집에서 길렀는데 나이 13세가되자 높이 성숙하고 빨리 성장하여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六部)가 함께 받들어 거서간(居西干)으로 삼고 서라벌(徐羅伐)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이름을 진한(辰韓)이라고 칭하였는데 또한 사로라고도 한다. 임나(任那)라는 것은 본래 대마도(對馬島)의 서북쪽 경계에 있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히고 다스리는 곳이 있어 국미성(國尾城)이라고 한다. 동쪽과 서쪽은 각각 마을(墟落)이있어 혹은 조공하고 혹은 배반하였는데 후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에게통제되게 된 고로 이로부터 임나는 곧 대마 전부를 지칭하였다. 예로부터 구주(仇州)와 대마(對馬)는 곧 삼한(三韓)이 나누어 다스리던 땅이고 본래 왜인(倭人)들이 대대로 거주하는 땅은 아니었다. 임나는 또한 나뉘어서 삼가라(三加羅)가 되었는데 소위 가라라는 것은 머리 고을(首邑)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로부터삼한(三汗)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 동안 화해하지 않았는데 좌호가라(佐護加羅)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仁位加羅)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雞知加羅)는 백제에 속하였다는 것은 이것이다. 영락 10년에 3가라가 모두 우리에게 귀속되었는데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倭)가 모두 임나가 통합되어 10나라로 나뉘어 통치되니 연정(聯政)되었다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고구려에직접 통할되어 열제(烈帝)의 명령하는 바 없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아유타(阿踰佗)는 삼국유사에서 서역(西域)으로 전해지나 이제 여러 옛기록(古記)를 고찰한즉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暹羅)라고 전한다. 그런즉 아유타 사람들은 혹시 대식국(大寔)의 침략으로 쫓긴바 되어 이곳에 도착하여 사는 것인가. 이명(李茗)의 유기(留記)에 전하기를 옛적에 백제 상인들이 있어 바다로 아유타에가서 재물과 보화를 많이 구하여 돌아왔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따라 오고가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교제가 밀접하여졌다. 그러나 그들의 풍속이 나약하고 군대에 익숙하지 않아서 자주 타인의 통제를 받는 바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평양에 을밀대(乙密臺)가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을밀선인(乙密仙人)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을밀은 안장제(安臧帝)때에 조의(皂衣)로 선발되어 나라에 공이 있었는데 본래 을소(乙素)의 후손이다. 집에 있으면서 글을읽고 활쏘기를 익히고 삼신을 노래하고 읊으며 낭도들을 받아들여 수련하고 의리와 용기로 공공에 이바지하였는데 1세대 조의로 그 낭도가 삼천이었다. 가는곳마다 구름같이 모여들어 일제히 다물흥방가(多勿興邦歌)를 노래하였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 나를 버려 의를 온전하게 하는 기풍을 고취토록 한 것이다. 그노래에 이르기를,
‘앞서 간 것은 법(法)이 되고 뒤에 올 것은 위(上)가 되고 법이 되네. 고로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위가 되네. 고로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도다.사람은 하늘과 땅 가운데에 일(一)이 되고 마음은 몸 즉 본체와 더불어 일(一)이 되네. 고로 그 허함(虛)과 그 조함(粗)이 동일한 즉 본체이네. 고로 오직 신(神)과 오직 만물(物)은 둘이 아니도다.참됨이 만가지 선(善)의 극치를 이루고 신께서 일(一) 가운데의 극치의 주인이네. 고로 세 참됨이 일(一)로 돌아가고 일(一)이 중심이네. 고로 일신(一神)은 즉삼신(三神)이 도다.
하늘 위 하늘 아래에 오로지 내가 스스로 존재하고 그것을 매우 정성스럽게하여 나라를 부흥하고 스스로 존재하네. 고로 무위(無爲)의 일을 정하여 나라를부흥하네. 고로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였도다.참된 명(命)이 크게 생겨나 성(性)이 광명(光明)에 통하고 들어온 즉 효도하고나간 즉 충성하네. 고로 무리들이 선하고 효도와 충성을 봉행(奉行)하지 않음이없네. 고로 여러 악을 일절 짓지 않도다.
오로지 백성의 의로운 바는 곧 나라(國)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가 없어지면 우리가 어찌 나라를 소중히 여기며 살겠는가. 고로 백성들에게는 만물이있어 우리 생을 복되게 하네. 고로 나라에는 혼(魂)이 있어 큰 덕이 되도다.혼에는 생(生)이 있고 자각(覺)이 있고 영(靈)이 있어 일신(一神)께서 유거(攸居)하시는 곳이 천궁(天宮)으로 삼혼(三魂)이네. 고로 지혜(知)와 삶(生)은 일신을 함께 닦음으로써 가능하네. 고로 형체(形)와 혼(魂) 또한 함께 번성함을 얻도다.
우리 자손으로 하여금 선이 나라가 되게 하고 태백교(太白敎)의 가르침이 내가 우리 자손의 스승이 되는 바이네. 고로 통솔함에 바르지 않음이 없고 내가스승인 바이네. 고로 가르침에 새롭지 않음이 없도다.
을밀선인은 일찍이 대(臺)에 있으면서 오로지 하늘에 제사하고 수련하는 것을업무로 삼았다. 대개 선인의 수련법이란 참전인(參佺)을 계율(戒)로 삼고 이름을탈없이 하고 서로 영화롭게 하여 나를 비움으로써 만물을 존재케 하고 나를 버려 의를 완전히 하여 국인(國人)들의 법풍이 되는 것이다. 천추(千秋)를 우러러족히 감흥을 일으킴으로써 또한 인존(人尊)의 상징이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대를 칭하여 을밀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금수강산의 제일의 명승이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환단고기 (신교출판사, 김호영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