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김호영 편역)

  1. 범례
  2. 삼성기전(三聖紀全) 상편(上篇)
  3.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
  4.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세기 서(序)
  5.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세기
  6. 북부여기(北夫餘紀) 상하(上下)
  7.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8. 태백일사(太白逸史) - 삼신오제본기
  9. 태백일사(太白逸史) - 한국본기
  10. 태백일사(太白逸史) - 신시본기
  11. 태백일사(太白逸史) - 삼한관경본기
  12. 태백일사(太白逸史) - 소도경전본훈
  13. 태백일사(太白逸史) - 고구려국본기
  14. 태백일사(太白逸史) - 대진국본기
  15. 태백일사(太白逸史) - 고려국본기
  16. (편역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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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제7(第七)

조대기에 이르기를 개화(開化) 27년 9월 21일에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되니 이때 진국(振國)의 장군 대중상(大仲象)이 서압록강(西鴨綠河)을 수비하다가 변을듣고 마침내 무리를 거느리고 험지로 달아났다. 개원(開原)을 지나는 길에 소문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팔천명이었다. 곧 함께 돌아가서 동쪽으로 동모산(東麰山)에 도달하여 웅거하고 진벽을 견고히 하여 스스로를 보전하였다. 국호를후고구려(後高句麗)이라 칭하고 건국기원을 중광(重光)이라 하고 이르는 곳마다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여러 성에서 부속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오직 옛땅을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중광 32년 5월에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세조이라 하고 시호는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이라고 하였다. 태자 조영(祚榮)이부고를 전하는 사자를 따라 영주(營州)의 계성(薊城)으로부터 무리를 거느리고당도한즉 제왕(帝)에 즉위하였다. 홀한성(忽汗城)을 쌓고 도읍을 옮기고 군사 십만명을 모집하니 위력과 명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이에 정책을 정하고 관제를세우고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으로 삼고 복수하기를 스스로 맹세하였다. 말갈의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더불어 거란의 장수 이진영(李盡榮)이 손을 잡고 군사를 연합하여 당나라 장수 이해고(李楷固)를 천문령(天門嶺)에서 크게 부수었다.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하여 군현(郡縣)을 지키고 유민과 도망자들을 불러 위로하였다. 주변을 보호하여 정착시키니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고 여러가지 법망을 새롭게 고쳤다. 나라이름을 정하여 대진(大震)으로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고구려가 가진 옛영토를 근거로 6천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천통21년 봄에 대안전(大安殿)에서 붕어하시니 묘호는 태조(太祖)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이라고 하였다. 태자 무예(武藝)가 즉위하여 기원을 고쳐 인안(仁安)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더불어 오주목(烏珠牧) 동쪽 십리에 경계를 정하니 황수(潢水)에 이르렀다. 이 해에 개마(蓋馬), 구다(句茶), 흑수(黑水)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신하이라 칭하고 공물을 납부하였다. 또 대장군 장문휴(張文休)를 파견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고 등주(登)와 내주(萊)를취하여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당나라 주인 융기(隆基)가 노하여 군사를 파견하여 와서 토벌하였으나 불리하였다. 다음 해에 수비 장군 연충린(淵忠麟)이 말갈과 더불어 당나라 놈들을 요서의 대산(大山)의 양지(陽)에서 크게 부수었다. 당나라가 은밀히 신라와 더불어 약정을 하고 동남의 여러 군(郡)을 갑자기 습격하여 천정군(泉井郡)에 도달하니 제왕께서 조칙으로 보병과 기병 2만명을 보내어공격하여 그곳을 부수었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신라와 당나라군 중에 얼어서죽는 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요하(河) 서쪽의 니하(泥河)에 이르러경계를 삼았는데 지금의 강릉(江陵) 북쪽 니천(泥川)이다. 해주(海州) 암연현(岩淵縣)은 신라와 동쪽 경계인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瓮津)이다. 이로부터 신라는매년 때마다 들어와 공물을 바치고 임진강 이북의 여러 성들이 모두 우리에게귀속되었다. 또 다음 해에 당나라가 신라와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와서 침입하였다가 공없이 끝내고 돌아갔다.

인안(仁案) 16년에 구다(句茶), 개마(蓋馬), 흑수(黑水)의 여러 나라로써 그들나라들이 와서 항복하니 받아들여서 성읍으로 삼았다. 다음 해에 송막(松漠)에12성을 쌓고 또 요서에 6성을 쌓음으로서 마침내 5경(京), 60주(州), 1군(郡), 38현(縣)이 갖추어져 넓이의 폭(圓幅)이 9천여리였으니 가히 강성하였다고 전할 만하다. 이 해에 당나라, 왜, 신라가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 공물을 바치니천하가 칭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발해사람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당해낸다는 말이 있을 지경이었다. 이때에 임금과 백성들이 평화롭고 즐겁고 역사를 논하여 의로움을 좋아하고 오곡이 풍성하게 익고 사해가 편안하였다. 대진(大震) 육덕(六德)의 노래가 있어 이를 미화하였다. 이듬해 3월에 안민현(安民縣)에 감로(甘露)가 내렸는데 예관이 아뢰어 축하 의례를 청하니 이에 따랐다. 이달16일에 서압록강 상류에서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께 제사를 올렸는데 서압록은 고리(槀離) 옛나라의 땅이다. 19년에 제왕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를 무황제(武皇帝)이라고 하였다. 태자 흠무(欽茂)가 즉위하여기원을 고쳐 대흥(大興)이라고 하였다. 동경 용원부(龍原府)로부터 도읍을 상경용천부(龍泉府)로 옮기고 다음해에 태학(太學)을 세워 천경(天經)과 신고(神誥)로 교육하고 환단(桓檀)의 옛역사로 강론하였다. 또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국사125권을 편찬하였는데 문(文)을 다스려 예약을 부흥하고 무(武)를 떨쳐 여러 오랑캐를 복종시켰다. 태백(太白)의 현묘한 도는 백성들에게 미치고 널리 인간을이롭게 하는 화함이 만방에 퍼지게 되었다.

대흥 45년에 치청(淄靑) 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에 항거하니 제왕께서 장수를 파견하여 전쟁을 도왔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으로 평로(平盧)에서 태어났다. 22년에 군사(師) 무리들이 마침내 군사(軍師) 이희일(李希逸)을 축출하고 정기를 세웠는데 사망하자 아들 납(納)이 아버지의 무리를 통솔하였다. 56년에 납이 사망하니 아들 사고(師古)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곧 사망하니 그 집 사람들이 상(喪)을 치르지 않고 몰래 비밀리에 사도(師道)를맞이하도록 하여 그를 받들었다.

대흥 51년에 제왕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세종(世宗)이라 하고 시호를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이라고 하였다. 국인들이 그의 친족동생(族弟) 원의(元義)를 세웠더니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리기가 불가능하였다. 갑술년에 국인들이그를 폐하고 선제왕의 손자인 화흥(華興)을 맞아들여 즉위케 하였는데 기원을고쳐서 중흥(中興)이라고 하였다. 다음해에 붕어하시니 묘호를 인종(仁宗)이라하고 시호를 성황제(成皇帝)이라고 하였다. 황제의 숙부(皇叔)인 숭린(崇璘)이 즉위하였는데 이가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이다.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 원유(元兪),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 언의(言義),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 명충(明忠)을 거쳐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 인수(仁秀)에 이르렀다. 하늘의 자질이 있고 영웅처럼 밝고 덕과 기가 신과 같고 문무를 겸하여 곧 태조의 풍모가있었다.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니물(泥物), 철원(鐵圓), 사불(沙弗), 암연(岩淵) 등 7주(州)를 설치하고 북쪽으로는 염해(鹽海), 나산(羅珊), 갈사(曷思), 조나(藻那), 석혁(錫赫)을 경략하고 남북 우루(虞婁)에 까지 이르러 여러 부(部)를 설치하였다. 장백(長白)의 동쪽을 안변(安邊)이라 하고 압강(鴨江)의 남쪽을 안원(安遠)이라 하고 목단(牧丹)의 동쪽을 철리(鐵利)이라 하고 흑수(黑水)의 위쪽을회원(懷遠)이라 하고 난하(灤河)의 동쪽을 장령(長嶺)이라 하고 장령의 동쪽을동평(東平)이라고 한다. 우루는 북쪽 대개마의 남북에 있는데 땅의 넓이가 9천리였다. 국경과 거처가 널리 개척되고 문의 다스림이 일어나 흡족하고 위로는 국가 수도로 부터 아래로는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문을 배웠다. 구서(九誓)와오계(五戒)를 아침, 저녁으로 암송하여 익히고 봄, 가을에 공적을 고려하고 무리들의 의논으로 공물을 진상하였다. 개인들은 이미 힘을 축적하고 가정들은 모두사용에 대비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의 세력이 부강해지고 안팎이 편안하고 기쁘니 저절로 도둑의 도적질과 간사한 모의의 폐단이 없어졌다. 당, 왜, 신라 및 거란이 두려워서 복종해 마지않고 천하의 만방이 모두 성인(聖人)이 정치를 부흥하는 해동성국이라고 흠모하여 이를 칭송하였다. 5대(五代)를 지나고 야율(耶律)이 비록 번번히 수차례 침공하였으나 끝내 정복하기 불가능하였다. 후에 장종(莊宗) 화황제(和皇帝) 이진(彛震), 순종(順宗) 안황제(安皇帝) 건황(虔晃),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현석(鉉錫)을 거쳐 애제(哀帝) 인선(諲譔)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하게 되었으니 세조(世祖)로 부터 15대(世)를 전하여 모두 259년이다.목종(穆宗)은 기원을 고쳐 정력(正曆)이라 하고 의종(毅宗)은 기원을 고쳐 영덕(永德)이라 하고 강종(康宗)은 기원을 고쳐 주작(朱雀)이라 하고 철종(哲宗)은기원을 고쳐 태시(太始)이라 하고 성종(聖宗)은 기원을 고쳐 건흥(建興)이라 하고 장종(莊宗)은 기원을 고쳐 함화(咸和)이라 하고 순종(順宗)은 기원을 고쳐 대정(大定)이라 하고 명종(明宗)은 기원을 고쳐 천복(天福)이라 하고 애제(哀帝)는기원을 고쳐 청태(淸泰)이라고 하였다.

대진국의 남경 남해부(南海府)는 본래 남옥저(南沃沮)의 옛나라였는데 지금의해성현(海城縣)이 이것이다. 서경 압록부는 본래 고리의 옛나라였는데 지금의 임황(臨潢)이고 지금의 서요하(西遼河)이다. 즉 옛날의 서압록강이다. 고로 구지(舊志)에 안민현은 동쪽에 있고 그 서쪽은 임황현이라고 하는데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되었다. 바로 옛날의 서안평(西安平)이다.

정주(正州)는 의려국(依廬國)이 도읍한 곳인데 선비 모용외(慕容廆)에게 패한바 되어 핍박을 우려하여 스스로 결단하려다가 문득 생각하기를, ‘내 혼이 아직꺼지지 않았는데 어디로 간들 이루지 못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아들 부라(扶羅)에게 은밀히 부탁하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海口)를 건너니 따르는 사람들이 수천이었다. 마침내 건너가서 왜인(倭人)들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스스로 삼신(三神)의 부명(符命)에 응한다고 함으로써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축하의례를 올리게 하였다. 혹은 전하기를 의려왕(依廬王)이 선비에게 패한바 도주하여 바다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子弟)들이 도주하여 북옥저를 지키다가 다음해에 아들 의라(依羅)가 즉위하였다. 이후로 부터 모용외(慕容廆)가또 다시 침입하여 나라 사람들을 약탈하므로 의라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들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日本)은 옛날에 이국(伊國)에 있었고 또한 이세(伊勢)라고도 하는데 왜(倭)와 더불어 같은 이웃이었다. 이도국(伊都國)은 축자(筑紫)에 있는데 또한 바로 일향국(日向國)이다. 이로부터 그 동쪽은 왜에 속하고 그 남동은 안라(安羅)에 속하는데 안라는 본래 홀본사람(忽本人)이다.

북쪽에는 아소산(阿蘇山)이 있고 안라는 뒤에 임나에 편입되었는데 고구려와일찍부터 이미 화친을 정하였다. 말로국(末盧國)의 남쪽은 대우국(大隅國)이라고하는데 시라군(始羅郡)이 있으며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남만(南蠻) 침미(忱彌), 완하(日+完夏) 비자발(比自㶱)의 무리들을 도륙하고 모두 조공하였는데 남만은 구려(九黎)의 유민들의 후손(遺種)이고 산월(山月)로부터 온자들이다. 비자발은 변진(弁辰)의 비사벌(比斯伐) 사람들이 모여 산 마을이다. 완하는 고구려에 속한 노비들이다. 이때에 왜인들은 산과 섬에 나뉘어 웅거하였는데 각각 100국에 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狗邪韓國)이 가장 컸는데본래 구야국(狗邪國) 사람들이 다스린 곳이다. 바다에서 상업을 하는 선박들은모두 종도(種島)에 모여서 교역하였다.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가모두 교통하였다. 처음에 하나의 바다 천여리를 건너서 대마국(對馬國)에 이르니사방이 4백여리나 되었다. 또 하나의 바다를 천여리를 건너서 일기국(一歧國)에이르니 사방이 3백리나 되었다. 본래 사이기국(斯爾岐國)인데 자다(子多)의 여러섬들이 모두 조공하였다. 또 하나의 바다를 천여리 건너서 말로국(末盧國)에 이르니 본래 읍루(邑婁)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동남쪽의 육지 5백리를 가서 이도국(伊島國)에 이르니 곧 반여언(盤余彦)의 옛읍(古邑)이다. 신당서(新唐書)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한 자들인데 성은 대(大)씨이다. 걸걸중상(乞乞仲象)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유민무리와더불어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보전하고 오루하(奧婁河)를 방어하였다. 중상이 사망하고 태자 조영(祚榮)이 패잔병과 부상병을 이끌고 퇴각하여 곧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고 황량하고 먼 곳에 기대어 이내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震國)의 왕이라 이름하고 부여(夫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해북(海北)의 여러 나라들을 모두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사씨(史氏)가 이르기를 걸걸중상이 패망한 유민으로 험지로 도주하여 스스로보전하였는데 태왕(太王)이 빈(邠)으로 간 것과 같다고 하였다. 고왕(高王) 조영이 창업의 자질로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터전을 여니 구천(句踐)이 월(越)나라를부흥한 것과 비슷하다. 대개 관원이 이미 정해지면 곧 문덕(文德)으로 다스리고제도를 고치고 관작(官爵)을 정하고 군현을 배열하여 큰 나라와 적수가 되었다.방역이 5천리에 이르고 국운(國祚)이 3백년에 이르니 당시에 사방에서 장차 이를 넘어설 나라가 없으니 역시 강성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현종(顯宗) 원문대왕(元文大王) 20년이었다. 거란의 동경(東京)장군 대연림(大延琳)은 태조 고황제(高皇帝)의 7세손이었다. 유수(留守)의 부마 소효원(蕭孝元)과 남양(南陽) 공주를 가두고 호부사(戶部使) 한소훈(韓紹勳) 등을 살해하고 즉위하여 흥요(興遼)이라 이르고 기원을 천경(天慶)으로 고쳤다. 고길덕(高吉德)을 파견하여 와서 건국을 알리고 겸하여 원조를 구하였다.

요동 유수(留守) 소보선(蕭保先)이 정치를 혹독하고 모질게 하였다. 고려 예종(睿宗) 문효대왕(文孝大王) 11년 정월 초하루에 동경의 비장(裨將) 발해사람 고영창(高永昌)이 수십명과 더불어 술기운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담장을 넘어부위(部衛)로 들어가 관청에 올라 유수가 있는 곳을 묻고 급히 전하여 외부 군대의 변란에 대비해 주기를 청하여 보선이 나오자 무리들이 그를 살해하였다.임시유수(假留守) 대공정(大公鼎)과 부유수(副留守) 고청신(高淸臣)이 싸워서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여 서문을 탈취하여 나가 요나라로 달아났다. 영창은 스스로대발해국(大渤海國) 황제이라 칭하고 기원을 융기(隆基)이라 고치고 요동 50여주(州)를 점거하였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의 종족으로 요(遼)에 패한바 되어 그 추장장수(酋帥)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를 보전하고나라를 세우고 기원을 고쳐서 스스로 정안국(定安國)이라고 이름하였다.

개보(開寶) 3년에 그 왕 열만화(烈萬華)가 입조하여 공물을 납부하는 여진에게부탁하여 표문(表)을 붙여 공물을 바쳤다. 태종때에 그 왕 오현명(烏玄明)이 다시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은 본래 고구려 옛토양의 발해 유민무리(遺黎)로서 이 모퉁이를 보전하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태종이 회답한 조서(勅)의 대략에 이르기를, ‘경은 오래 마한(馬韓)의 땅에 있어 큰물결의 겉에 놓이게 되었다.’고 운운하였다. 단공(端拱)과 순화(淳化) 연간에 다시 여진에 부탁하여 표문을 바치더니 그 후로는 당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대진국 애제 청태 26년 봄 정월에 야율배(耶律倍)가 아우 요골(堯骨)과 더불어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자 애제가 나가 항복함으로서 나라가망하였다.

2월 병오년(丙午)에 요나라의 태조가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큰 아들 배(倍)를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 그를 왕으로 하였다. 기원을 감로(甘露)로 정하고홀한성을 고쳐 천복(天福)으로 하고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여 12줄의 면류관(旒冕)을 썼는데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다. 이에 대진국의 옛제도를 사용하여 숙일랄(叔迭刺)을 좌대상(左大相)으로 삼고 대진의 원로 재상(이름 잃음)을 우대상(右大相)으로 삼고 대진의 사도(司徒) 대소현(大素賢)을 좌차상(左次相)으로 삼고 야율우지(耶律羽之)를 우차상(右次相)으로 삼았다. 나라 안의 목베어 죽일 사람 이하는 사면하고 한 해의 공물(歲貢)은 포(布) 10만단과 말 천필로 약정하였다.

감로 27년 겨울 12월 경진년에 요가 동경의 중대성(中臺省)을 파하여 동단국이 없어졌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환단고기 (신교출판사, 김호영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