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김호영 편역)

  1. 범례
  2. 삼성기전(三聖紀全) 상편(上篇)
  3.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
  4.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세기 서(序)
  5.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세기
  6. 북부여기(北夫餘紀) 상하(上下)
  7.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8. 태백일사(太白逸史) - 삼신오제본기
  9. 태백일사(太白逸史) - 한국본기
  10. 태백일사(太白逸史) - 신시본기
  11. 태백일사(太白逸史) - 삼한관경본기
  12. 태백일사(太白逸史) - 소도경전본훈
  13. 태백일사(太白逸史) - 고구려국본기
  14. 태백일사(太白逸史) - 대진국본기
  15. 태백일사(太白逸史) - 고려국본기
  16. (편역자 서문)


북부여기(北夫餘紀) 상(上)

-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편찬(撰)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년 원년 제왕(帝)께서는 타고난 자태가 영민 용맹하시고 신과 같은 빛으로 사람을 뚫어보시므로 그를 바라보면 천왕랑(天王郞)과 같았다. 나이 23세에 하늘을 따라서 내려오시니 이때가 단군 고열가 57년,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웅심산(熊心山)에 의거하여 일어나 난빈(蘭濱)에 궁실을 축성하고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다녔다. 따르는 무리 500인과 더불어 아침에는 정사를 보고 저녁에는 하늘 궁실에 올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계해년 2년. 이해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하였다. 연호법(烟戶法)을 제정하여 오가(五加)의 병력을 둔전(屯田)에 나누어 배치하여 자급하고 준비하였으므로 우려가 없었다.

기사년 8년. 제왕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故都)에서 오가에게 고하여 마침내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철폐하였다. 이에 국인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이 되었는데 이가 북부여의 시조이시다. 겨울 10월에 공공이 태모를 양육하는 법(公養胎母法)의 법을 제정하여 사람들이 반드시 태훈(胎訓)에서 시작하도록 가르쳤다.

임신년 11년.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살해하고 크게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경진년 19년. 비(丕)가 죽자 아들 준(準)이 부왕의 봉지를 습격하여 번조선(番朝鮮)의 왕이 되었다. 관리를 파견하여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이보다 먼저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介)를 파견하여 우리 서쪽 변방을 침입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니 이를 경계로 삼게 되었다.

신사년 20년. 명하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7월에 새로운 궁궐 336칸을 지었다.

계미년 22년.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 한(韓)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박랑사(博浪沙)에서 진(秦)나라 왕(王) 정(政)을 저격하였으나 잘못맞춰 부차(副車)를 맞혔다.

임진년 31년. 진승(陣勝)이 병사를 일으키므로 진(秦)나라 사람들이 크게 소란하였다. 이에 연(燕)나라, 제(齊)나라, 조(趙)나라의 백성들이 번조선으로 부속하였는데 그 무리가 수만 가구였다. 상하의 운장(雲障)에 나누어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하여 그들을 감독하였다.

기해년 38년.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요동의 옛 요새(塞)를 복구하고 수리하여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는데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병오년 4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갔다.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이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하였으나 제왕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제왕께서 병으로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 불가능한 연유로 번조선왕 기준이 여러번 실기(失機)하므로 마침내 위만에게 박사(博士)라는 벼슬을 주어 상하 운장을 구획하여 그를 봉하였다. 이 해 겨울에 제왕께서 붕어하시니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태자 모수리(慕漱離)가 즉위하였다.

 

2세 단군 모수리(慕漱離) 재위 25년

정미년 원년. 번조선 왕 기준(箕準)은 수유(須臾)에 오래 살면서 전에 은혜를 많이 베풀어 백성들은 모두 풍요로웠는데 뒤에 떠돌아다니는 도적(流賊)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제가(諸加)의 무리들은 상장군 탁대(卓大)를 받들어 함께 등정(登程)하여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대의 태어난 고향이다. 이를 중마한(中馬韓)이라고 한다. 이때에 변한(弁)과 진한(辰)의 두 한(韓)도 역시 각각 그 무리로서 100리의 봉함을 받고 도읍을 세워 스스로 나라 이름을 정하였는데 모두 마한의 정치명령을 들어 실행하고 세세토록 배반하지 않았다.

무신년 2년. 제왕께서 상장군 연타발(延佗勃)을 파견하여 평양(平壤)에 성책(城柵)을 설치하여 도적 위만을 방비케 하였는데 위만도 또한 억압되어 침범의 우려를 반복하지 않았다.

기유년 3년. 해성을 평양도(平壤道)에 속하게 하고 황제의 동생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니 중부여(中夫餘) 일대는 모두 군량미(糧餉)에 따랐다. 겨울 10월에 경향분수(京鄕分守)의 법을 제정하여 경성(京)은 천왕이 친히 모두 위수(衛戍)하고 지방은 사출분진(四出分鎭)하니 마치 윷놀이로 전쟁을 보고 용그림(龍圖)으로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신미년 25년. 제왕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高奚斯)가 즉위하였다.

3세 단군 고해사(高奚斯) 재위 49년 임신년 원년. 정월에 낙랑왕(樂浪王) 최숭(催崇)이 곡식 300석을 해성(海城)에 납부하였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산(樂浪山)에서 진귀한 보물을 쌓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의 겨울이었다.

계축년 42년. 제왕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위만의 도적을 남려성(南閭城)에서 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년 49년. 일군국(一群國)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이해 9월에 제왕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高于婁)가 즉위하였다.

 

4세 단군 고우루(高于婁 또는 해우루(解于婁)) 재위 34년

신유년 원년. 장수를 파견하여 우거(右渠)를 토벌하다가 불리하므로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지키게 하고 병력을 증강하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방비하는데 공이 있으므로 승격하여 고구려(高句麗) 제후로 삼았다.

계해년 3년. 우거의 도적이 대거 침략하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두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갑자년 4년. 제왕께서 장수를 파견하여 해성을 공격하였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병인년 6년. 제왕께서 친히 정예군 5,000명을 거느리고 해성을 습격하여 격파한 후에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니 구려하(九黎河)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하였다.

정묘년 7년. 목책(木柵)을 좌원(坐原)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려(南閭)에 배치하여 방비하므로 근심이 없었다.

계유년 13년. 한(漢)나라 유철(劉徹)이 평나(平那)에 침입하여 우거를 멸망시키고 이에 4군(四郡)을 바꾸어 놓고자 강력히 군사로써 사방에서 침입하였다. 이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곳곳에 이르러 한(漢)나라 침략군(寇)을 연파하고 유민들이 사방에서 호응함으로써 전쟁의 군대를 도와 큰 기세에 보답하였다.

갑오년 34년. 10월에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와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로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곳에서 옮겨가시오.” 하셨다. 제왕께서 매우 걱정하시다가 이 달에 제왕께서는 근심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시고 황제(皇)의 아우인 해부루(解夫婁)가 즉위하였다. 동명왕이 병사로써 위협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군신들은 매우 걱정하였다.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진언하기를, “통하(通河)의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 오곡을 심기 적당하므로 도읍지로 가합니다.” 라고 하였다. 권유에 따라 왕께서 도읍을 옮겼는데 이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혹은 동부여(東夫餘)라고 전한다.

 

북부여기(北夫餘紀) 하(下)

 

5세 단군 고두막(高豆莫 혹은 두막루(豆莫婁) 재위 22년, 재제위(帝) 27년)

계유년 원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왕께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준수하고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漢)나라 도적(寇)들이 기승을 부리자 개연히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이에 졸본에 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고 이름하였는데 혹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을해년 3년. 제왕께서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적이 없었다. 불과 10개월이 되지 않아서 무리들이 5,000매(每)에 이르렀다. 싸울 때마 다 한나라의 도적들은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거나 풍문만 들어도 무너져 달아 나 버리므로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추격하여 요동의 서 안평(西安平)에 이르렀다. 이는 곧 옛 고리국(?離國)의 땅이다.

갑오년 22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 34년이다. 제왕께서 장수를 보내어 배천(裵 川)의 한나라 도적을 쳐서 부수었다. 유민과 함께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연파하고 그 수비장수를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갖추어서 적을 막 았다.

을미년 23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고 여러 차례 애원하여 제위를 보 전하고자 하므로 제왕께서 이를 듣고 해부루(解夫婁)를 낮추어 봉하여 제후로 삼아 차릉(?陵)으로 옮기게 하였다. 제왕께서 앞에 인도되어 북 치고 나팔 불면 서 무리 수 만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왔는데 이를 일컬어 북부여(北夫餘)라고 하 였다. 가을 8월에 한나라의 도적과 더불어 여러 차례 싸워서 서압록강의 위에서 크게 이겼다.

임인년 30년.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차릉에서 탄강하였다.

신유년 49년. 제왕께서 붕어하시니 유명에 따라 졸본천(卒本川)에서 장례를 지 냈다. 태자 고무서(高無胥)가 즉위하였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임술년 원년. 제왕께서 졸본천에서 즉위하고 부로(父老)들과 함께 백악산(白岳 山)에서 모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고 행사를 반포하니 참석한 내외의 사 - 37 - 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제왕께서는 태어나면서 신덕(神德)이 있어 능히 주술로 써 바람을 부르고 비를 불러 잘 구휼하였으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小 角+羊慕漱)라고 불리었다. 이때에 한나라의 도적들이 요하(遼)의 왼편에 두루 미 쳐 소란하였는데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계해년 2년. 제왕께서 순행하시다가 영고탑에 이르러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에 제왕께서 붕어하시고 고주몽이 유명에 따라 들어와 대통을 이었다. 이보 다 앞서 제왕께서는 자식이 없으므로 고주몽을 보시고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딸 로서 아내(妻)를 삼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당시 나이가 23세였다.

당시에 하부여(下夫餘) 사람들이 장차 그를 죽이려 하므로 어머니의 명을 받 들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俠父) 등과 함께 3인이 덕으로 맺은 벗이 되 어 길을 떠나 차릉수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으므로 추격하는 병 사들이 그곳까지 압박할까 두려워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금일 도주하는데 추격하는 병사들이 곧 이르니 어찌하면 좋은가.” 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와 다리를 만들어 주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물고기와 자라는 이내 흩어졌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환단고기 (신교출판사, 김호영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