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太祖) 신성대왕(神聖大王) 천수(天授) 2년에 도읍을 송악(松岳)의 양지에정하고 26년에 임금께서 훈요(訓要)를 지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생각컨대우리 동방(東方)이 옛적에 당나라풍(唐風)을 사모하여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법제를 따랐는데 나라가 다르고 풍토가 다르면 사람의 성품도 제각기 다르게 마련이니 구차하게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태봉국왕(泰封國王) 궁예(弓裔)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으로 본래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의 먼 후예였는데 그의 아버지 강(剛)이 점술가의 말을 따라 어머니의 성을 따서 궁씨(弓氏)로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모잠(牟岑) 대형이 피폐한 백성들을 규합하여 안승을 받들어 후고구려왕으로 삼아 신라에 구원을 청하니 신라왕이 거처를 나라의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정하였는데 뒤에 고쳐서 보덕왕(報德王)으로 삼았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고 보덕왕을 불러 소판(蕭判)으로 삼으니 그의 친족의 아들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면서 모반하여 왕이라고 칭하였다. 그가 주살되자 남은 무리들이 관리를 살해하고 보덕성(報德城)에 웅거하여 또 반란을 일으키니 신라가 평정하여 그 사람들을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으로 이주시켰다.
대진국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천복(天福) 9년 5월 5일에 궁예가 외가에서태어났다. 그 지붕 위에 소광이 생겨 마치 긴 무지개처럼 하늘로 뻗쳤다. 신라의일관(日官)이 그것을 바라보고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이 말을듣고 왕이 이를 꺼려 사람을 시켜 그 집을 헐고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그 어머니가 진귀한 보물을 뇌물로 주고 끌어안고 도망하여 숨어살게 하여 달라고 청하여 고생스럽게 힘써 양육하였다. 나이 10여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고 이름하였다. 장성하여서도 마음대로 놀고 이러한 고로 승려의 계율(僧律)에 구애되지 않고 털털하고 담력과 기운이 있었다. 어느날 바리때를 가지고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까마귀가 상아점대(牙籤)를 물고 있다가 바리때 안에 떨어뜨렸다. 이를 보니 왕(王)자가 있으므로 비밀로 하여 말하지 않고 자뭇 스스로뿌듯해 하였다.
이전 안승 때부터 왕실의 일에 노고가 있었으나 신라가 보답하지 않고 오히려그 토지와 백성들을 거두어 모조리 빼앗고는 다만 왕의 누이로 아내(妻)를 삼도록 할뿐이었다. 고구려 유민들이 대대로 원한이 쌓인 고로 기세좋게 변을 일으켰으나 여러번 패하였다. 궁예에 이르러 국가가 쇠하고 어지러운 것을 보고 기회를 타서 무리를 모아 조종(祖宗)의 옛영토를 회복하고 대대로 쌓인 원수를 씻고자 하였다. 이에 죽주(竹州)의 도적 기훤(箕萱)에게 의탁하니 훤이 거만하게업신여기며 예우하지 않았다. 궁예는 근심에 쌓여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 몰래훤의 가까운 부하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결탁하여 벗이되고 북원(北原)의도적 양길(梁吉)에게 의탁하였다. 길이 그를 잘 대우하고 그에게 일을 맡겨 군사100기(騎)를 나누어 동쪽으로 주군을 공략하게 하여 모두 항복하게 하였다. 또아슬나(阿瑟那)를 공격하여 무리가 600에 이르니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 병사들과 더불어 즐거움과 어려움을 함께 하고 주고 뺏는 것을 사사로이 하지 않으니 무리들이 마음속으로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천복 27년에 태수 왕륭(王隆)이 송악군(松岳郡)을 바쳐 궁예에게 귀속되며 그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에 조선(朝鮮), 숙신(肅愼), 변한(卞韓)의땅에서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을 점령하는 것만 같지 않으니 나의 장자인 건(建)을 그 주인(主)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이때에 이훤(李萱)이 무진주(武珍州)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이에 무리들에게 소리 내어 말하기를, “우리 원삼국의 시작은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는 뒤에 일어났으며 변한이 그 뒤를 따랐다. 백제가 나라를 열어 대대로 전한지 600년이었는데 신라가당나라와 연합하여 공격하여 그를 멸하였으니 지금 내 비록 부덕하나 의자왕의분을 풀고자 한다.” 라고 하며 마침내 완산(完山)에 도읍하고 왕이라 칭하고 나라이름을 후백제(後百濟)이라고 하였다.
궁예도 또한 다음해에 왕이라 칭하고 일컬어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으니 이는 가히 부끄러운 것이다. 나는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 라고 하며 나라를 세워 이름하여 후고구려(後高句麗)이라 하고 건국기원을 무태(武泰)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남행하여 흥주사(興州寺)에 이르러 벽에 걸린 신라 전왕(前王)의 화상을 보고 검을 빼어 이를 쳤다.궁예는 신라를 병합하여 삼키려는 뜻을 가지고 도읍을 멸한다고 부르짖으며 신라로부터 귀부하는 자들을 모두 모아 그들을 죽였다. 이로부터 궁예는 스스로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고 머리에 금책(金幘)을 쓰고 또 스스로 불경(經) 20권을 저술하여 간혹 정좌하여 강설하였다. 승려 석총(釋聰)이 일컬어 말하기를,“모두 사설과 괴담으로 가르침으로는 불가하다.” 라고 하니 궁예가 노하여 철추로 그를 쳐서 죽였다. 천수(天授) 원년 무인년 여름 6월에 왕건(王建)이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 여러 장군들에게 추대된바 날이 밝을 무렵 곡식더미 위에 앉아서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들에게 명하여 달리면서 또 “왕공이 이미 의기(義旗)를 들었다.” 라고 외쳐 말하게 하였다.몹시 바삐 달려와 도달한 사람들의 무리가 먼저 궁문(宮門)에 이르고 소란하게북을 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또한 만여명이었는데 마침내 포정전(布政殿)에서즉위하고 건국기원을 천수(天授)이라고 하였다. 이에 태봉왕(泰封王) 궁예는 정변을 듣고 미복으로 궐문을 탈출하여 도망가다가 곧 부양(斧讓)의 백성들에게수색되어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거란의 성종(聖宗)은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파견하여 침입하여 봉산(逢山)을부수고 우리의 선봉을 잡아갔다. 성종(成宗) 문의대왕(文懿大王)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니 혹은 항복을 구걸해야 한다고 말하고 혹은 영토를 할양하여그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중군(中軍) 서희(徐熙)가 홀로 말하기를, “지금 그들의 세력이 크게 강성한 것을 보고 두려워서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여그들에게 준다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또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터이니 저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졸라 만족하지 않으면 모두 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영토를 할양하면 참으로 만고의 치욕이 될 것입니다. 원컨대 어가를타고 도성(都城)으로 귀환하여 신 등으로 하여금 한번 그들과 더불어 싸우게 한후에 이를 논의하여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희가 국서를 받들고거란의 진영으로 나아가 서로 접견하는 예절을 물으니 손녕(遜寧)이 말하기를,“나는 대국 조정의 귀인(貴人)이니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희가 말하기를, “양국의 대신(大臣)으로 어찌 이와같이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손녕이 희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의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입하여 이를 잠식하였다. 또우리와 더불어 영토가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건너가 송(宋)나라를섬기는 고로 오늘날의 출사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영토를 할양하여 바치고 조정의 사신 파견(朝聘)에 힘쓴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것을 이은 고로 고려이라고이름하고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만약에 영토의 경계를 논한다면 곧 귀국의동경(東京)이 모두 우리 경계에 있거늘 어찌하여 그것을 침입하여 잠식하였다고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영토를 돌려준다면감히 사신의 파견에 힘쓰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말을 하는 기운이 강개하니 손녕이 강제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군사를 파하기로 결정하고 잔치를베풀어 위로하고 환송하였다.
도원수(都元帥) 윤관(尹瓘)이 여진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비를 선춘령(先春嶺)에 세워 경계로 삼고 아들 언이(彦頤)를 파견하여 표문(表)을 봉행하여 축하하였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 김경용(金景庸), 참지정사(參知政事) 임의(任懿), 추밀원사(樞密院事) 이위(李偉) 등이 선정전(宣政殿)에 들어와 마주하였는데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임언(林彦) 등이 망령되게 명분없이 군사를 위법하게 일으켜 군사를 패하게 하여 나라를 해한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극히 논하였다. 간관(諫官) 김연(金緣), 이재(李載) 등도 역시 서로 연이어 이들을 탄핵하여말하기를, “사람의 주인이 토지를 가짐은 본래 백성을 양육하려 함인데 지금은성을 차지하려고 사람을 죽이니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만같지 않습니다. 지금 돌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틈이 생길 것입니다.” 라고하였다. 상(上)이 말하여,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처음9성을 쌓을 때 사신을 보내서 거란에 알렸는데 표문에 여진의 궁한리(弓漢里)는곧 우리의 옛영토이고 그 거주민들도 또한 우리에게 편입된 백성들이다. 근래에계속 변방을 침입하여 그치지 않는 고로 수복하여 그 성을 쌓은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표의 글이 이러하므로 궁한리 추장(酋長)은 거란의 관직을 많이 받은 자이므로 거란이 우리로서 망언하게 한다하여 이로써 더욱 땅을 요구할 것입니다.우리가 만약에 동으로 여진을 방비하고 북으로 거란을 방비하게 되면 신은 9성이 삼한(三韓)의 복이 되지 아니할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간의대부(諫議大夫) 김인존(金仁存)도 역시 옛땅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상(上)이 선유(宣諭)하여 말하기를, “두 원수(元帥)가 여진을 정벌한 것은 선황제의 유지를 받들고 짐이 몸소 말한 일을 본받은 것이오. 몸으로 창끝과 화살촉을 무릅쓰고 적의 보루에 깊이 들어가 참수하여 목을 베고 사로잡아 온 포로가헤아리기 불가하고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9주의 성을 쌓아서 국가의 치욕을 씻었으니 그 공이 가히 많다고 일컬을 것이오. 그러나 여진은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마음(人面獸心)을 가져 다시 뒤집는 것이 일상이고 그 남아있는 무리들이 의탁할 곳이 없는 고로 추장이 항서를 바쳐 화친을 청하면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로써 편안함으로 삼으니 짐 또한 참지 못하는 것이오. 그런데 담당자가 법을 고수하여 자못 탄핵을 논하여 그 직책을 박탈하려 하나 짐은 끝내 이를 허물로 삼지 않으니 이는 맹명(孟明)이 제(濟)를 수복함과 같은 바램이오.” 라고 하였다.예종(睿宗) 문효대왕(文孝大王) 4년 가을에 9성을 철폐하여 여진의 옛땅을 돌려주었다. 이보다 먼저 여진이 사신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을 입조시켜 아뢰어 말하기를, “옛적에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방(大邦)으로부터 나와 자손들에 이르렀으므로 당연히 귀부(歸附)하는 것이 가합니다. 지금의 태사 오아속(烏雅束) 또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았습니다. 갑오년 간에 이르러 궁한촌(弓漢村) 사람들이 스스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만들었으나 본래 태사가 지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조(國朝)에서 죄를 알려그를 토벌하고 다시 수교를 허락하는 고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습니다. 지난해에 크게 거병하여 우리의 노약자와 어린이를 죽이고 9성을 축조,설치하여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가 살 곳을 없게 하니 태사가 우리를 보내어 와서 땅을 돌려주기를 청합니다.” 운운 하였다. 또 재상(宰), 추밀원(樞), 대(臺), 성(省), 지제고(知製誥), 시신(侍臣), 도병마 판관(都兵馬判官)과 문무 3품이상을 모아서 다시 9성의 반환의 가부를 논하니 모두가 가하다고 말하였다. 구사(舊史)에 전하기를 두 장군이 비를 선춘령에 세우고 이곳까지 고려의 경계로삼는다고 말하였다. 선춘령은 두만강(豆滿江) 7백리밖 송화강(松花江) 근처의 땅에 있다고 전한다.
광주목사(廣州牧使) 윤언이(尹彦頤)는 스스로 표문(表)을 풀어 전하기를, ‘새벽이 되어 중군(中軍)이 아뢰어 말한바 ‘언이가 정지상(鄭知常)과 더불어 죽음을각오한 당(黨)을 결성하여 크고 작은 일을 열매와 뿌리와 같이 의논하였습니다.임자년에 서경으로 거동하셨을 때 기원을 세우고 이름을 칭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국학생(國學生)들을 말로 부추겨서 지난 사건들을 아뢰게 하였사온대 대개 대금국(大金)을 충동질하여 일을 저지르고 그 틈을 타서 자의적으로 처치하고 붕당 밖의 사람들과 공모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남의 신하된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두번 세번 읽은 연후에 마음을겨우 안정시켰습니다. 이 기원을 정하자는 청은 본래 왕을 높이자는 정성으로우리 본조에서도 존재한 바로 태조(太祖)와 광종(光宗)의 고사(故事)가 있습니다.아울러 지난 역사를 살피건대 비록 신라와 발해가 그것을 정해 사용했어도 대국이 일찍이 군사를 보내지 아니하였고 소국이 감히 그 실을 논한 적이 없으니 어찌 이 성대에 반하여 참람하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 일을 논의한 죄로 이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비록 죽음을 각오한 당을 결성하여 대금국을 충동질하여 노하게 하였다는 말이니 그 말은 비록 심히 거창하나 본말이서로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정하여 강한 적이 우리 강토를 쳐들어온다면무릇 이를 막아낼 겨를도 없거늘 편안히 순간을 틈타서 일을 꾸밀 수 있겠습니까. 그 가리키는 붕당자(朋黨者)이라는 것이 누구이며 그 처치하려고 하는 자가누구입니까. 무리들이 만약에 화합하지 못하고 싸워서 패하면 또 몸을 담을 곳이 없으니 어찌 자의적으로 이와같이 모의하겠습니까. 성상을 신뢰하고 있고 중신들을 알고 있어 신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질임을 생각하면서도 서경 정벌의 역무에 따라나서 몸을 잊고 이 나라를 방위하고자 하였으므로 이러한 의기와분수는 당연한 것입니다. 일을 이루는 것은 모두 사람에서 비롯된 것이니 어찌부지런히 힘쓰는 것의 길을 멈추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금사(金史)에 이르기를 세종(世宗) 대정(大定) 15년 9월에 고려의 서경 유수조위총(趙位寵)이 서언(徐彦) 등을 파견하여 표문(表)을 올리고 자비령(慈悲嶺)이서와 압록강 이동을 바치고 부속하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고 하였다.고려사에 이르기를 예종 11년 3월 을미년 초하루에 상(上)이 요(遼)의 내원(來遠)과 포주(抱州)의 두 성이 여진의 침공을 받은바 성중에 식량이 떨어졌다는소문을 듣고 도병마 녹사(都兵馬錄事) 소억(邵億)을 파견하여 쌀 천석을 보내었는데 내원(來遠)의 통군(統軍)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8월 경진년에 금나라 장수 철갈(撒喝)이 요(遼)의 내원(來遠)과 포주(抱州) 두 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시키니 그 통군 야율령(耶律寧)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주하려 하였다. 상이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한교여(韓皦如)를 파견하여 초대하여 타일러 보려 하였으나 녕(寧)이 왕의 교지(王旨)가 없다고 사절하였다. 교여가 말을 달려와서 아뢰니 상이 추밀원에 명하여 서식(箚子)을 갖추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재신(宰臣)과 간관(諫官)이 아뢰어 말하기를, “저들이 왕의 교지를 요구하고 있어 그 뜻을헤아리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그 명령을 거두어 주소서.” 라고 하였다. 상이곧 사신을 파견하여 금나라에 같이 청하여 말하기를, ‘포주(抱州)는 본래 우리의옛영토이니 원하건대 이를 위해 요를 좀 봐달라.’ 라고 하니 금나라 주인이 사자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당신들이 그 일은 스스로 그곳을 차지하라.” 라고 하였다.
후암(厚庵) 이존비(李尊庇)는 고려 경효왕(景孝王) 때의 인물이다. 일찍이 서연(書筵)에 있으면서 자주부강의 정책(自主富强策)을 논하였는데 이에 아뢰어 말하기를, ‘본국이 환단조선(桓檀朝鮮)으로 부터 북부여, 고구려 이래로 모두 강하여스스로 주인(主)이었고 또 건국기원을 정하고 황제로 칭한 일은 우리 태조의 초년에 이르고 또한 일찍이 이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곧 사대의 의논(論)이 국시(國是)로 정해져 군신상하가 굴욕을 달게 여기고 스스로 그것을 새롭게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바 하늘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전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하니 어찌 천하 후대의 웃음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또 왜(倭)와 더불어 원한을맺고 있으니 만일에 원나라 왕실(元室)에 변고가 생기면 장차 어느 곳을 믿고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황제를 지칭하는 일은 지금 시대에는 꺼리는 바가 되어갑자기 회복하기는 매우 어렵겠지만 스스로를 강하게 하는 대책은 강구하지 않기가 불가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비록 상소(奏)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말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도 이를 옳지 않다고 하지 않았다. 후에 또 왜에 대비하는 다섯가지 일을 개진하였다. 첫째로 이르기를 호구(戶口)를 상세히 갖추어 모든 백성을 병사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둘째로 이르기를 병역과 농사를 함께일으켜 바다와 육지를 함께 지키도록 한다. 셋째로 이르기를 군량을 쌓아두고전함을 수리하고 건조하도록 한다. 넷째로 이르기를 수군을 확장하여 육군의 조종도 겸하여 익히도록 한다. 다섯째로 이르기를 모든 지리를 상세히 살펴두고사람의 화합을 확보하도록 한다. 일찍이 회당(晦堂) 상인(上人)에게 보낸 시(詩)가 있어 이르기를,
‘만물이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끝내에는 쓰이게 마련이니 신(苦) 오얏나무(李)에 과일이 많이 달렸다고 누가 탓하리오. 맏아들은 오래토록 천자(天子)가계시는 곳을 찾아들었고 둘째아들은 새로이 법왕가(法王家)에 부탁하였노라. 충성을 견고히 하는 이것이 신하의 본분이나 애착을 끊고 그것이 속세를 떠나간들어떠하랴. 돌아보며 웃음짓는 늙은이 아직도 미련이 남아 때로는 혼의 꿈(魂夢)이 있으나 하늘 끝에 아득하구나.’ 라고 하였다.
상(上)께서 연경(燕京)에 계시면서 연꽃녀에게 혹하였다. 작별에 임하여 손수연꽃 한송이를 주면서 말하기를, “상께서 돌아가시는 길에 이 꽃을 보시고 만약에 시들면 이 목숨이 장차 다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며칠 뒤에 꽃을 보니꽃이 파리해져 가는지라 상이 연꽃녀가 죽을까 두려워 다시 연경(燕)으로 가려하니 존비가 가서 알아보고 돌아오겠다고 청하였다. 연꽃녀가 울면서 시를 바쳐이르기를, ‘상께서 연꽃향을 주었어요. 처음에는 고요하고 나긋하고 붉은 것이었지요. 꽃송이 옮긴지 몇일인지 물어봅니다. 그대와 더불어 함께 파리해져 갔으면합니다.’ 라고 하였다. 존비는 상께서 이 시를 보면 돌아갈 생각이 더 커질까 두려워 연꽃녀를 대신하여 시를 지어 바치면서 이르기를, ‘이 어리석은 사내야, 이어리석은 사내야, 길에 머무르지 마세요. 길에 머무르지 마세요. 이 몸은 연잎위의 구슬처럼 편해서 저쪽으로 거처를 옮기면 이쪽도 둥글어집니다.’ 라고 하였다. 상(上)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나라로 돌아왔다. 뒤에도 상이연꽃녀를 잊지 못하고 원망하자 존비가 아뢰어 말하기를, “신이 그 때에 받들어돌아오시게 하는데 급급하여 부득이 거짓으로 베꼈으니 업드려 기망의 벌을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상이 노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문의(文義)로 귀양보내자태자와 조정의 신하들이 반복하여 그를 풀어주기를 계청하고 상도 또한 후회하고 뉘우쳐 관직을 회복하여 소환하였으나 사자(使者)가 이르기도 전에 존비는숨을 거두었다. 부음(訃音)을 듣고 상이 몹시 슬퍼하여 조회를 폐하였으며 태자가 문상(喪)에 임하여 말하기를, “이존비는 정직하여 국가의 사직(司直)이었는데어찌하여 이와같이 요절하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명하여 장사에 왕례(王禮)를사용하도록 하고 마침내 형강(荊江)의 위쪽으로 그곳 산의 4리(四里)를 둘러 봉하였는데 오늘날까지 그 동(洞)을 왕묘(王墓)이라 하고 그 리(里)를 산사(山四)이라고 한다.
시중 행촌 이암(杏村李侍中嵒)은 일찍이 권신배(權臣輩)들이 국호를 폐하고 행성(行省)을 세우기를 청하는 논의를 상소로 저지하였는데 그 상소의 대략에 이르기를, ‘천하의 사람들이 제 각각 그 나라로써 나라를 삼고 제 각각 그 풍속으로써 풍속을 삼으니 국가의 경계는 파괴하는 것이 불가하고 민속도 또한 뒤섞는것이 불가합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환단(桓檀) 이래로 부터 모두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하는 일을 행하고 있으니 스스로 나누어 봉(封)한 여러제후(侯)와는 원래 서로 같지 않습니다. 지금 비록 잠시 남의 멍에 아래에 있으나 이미 혼(魂), 정기(精), 피(血), 살(肉)은 한 근원의 조상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시(神市)의 하늘 열림과 삼한(三韓)관경이 천하 만대의 사람들에게 크게 이름난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천수(天授) 태조께서 창업의 자질을 갖추어 고구려 다물(多勿)의 나라 세움의 여풍을 계승하여 세상의 안을 평정하여 국가의 명성이 크게 떨치었습니다. 그 사이에 강한 이웃이 날아올라 사나워져 유영(幽營) 이동이 아직까지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이 차에 임금(君)과 신하(臣)는 밤낮으로 분발하여 자주부강의 정책을 도모해야 합니다. 감히 시퍼런(潛淸) 무리들이 간특하게 제멋대로 음모를 꾸미니 우리나라가 비록소국이나 국호를 폐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고 주인의 세력이 비록 약하나 위호(位號)를 어찌 낮출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러한 거동은 모두 간사한 소인배들의배반에서 나온 것으로 나라 사람들의 공적인 언론(公言)이 아닙니다. 마땅히 도당(都堂)에 청하여 그 죄를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행촌 시중에게는 저서(著書) 3종류가 있는데 그는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지어 원시국가의 체통(體統)을 밝혀 놓았고 또 태백진훈(太白眞訓)을 지어 환단시대에 서로 전한 도학심법(道學心法)을 이어서 서술하고 있다. 농상집요(農桑集要)는 곧 세상을 경영하는 실무의 학문이다. 문정공(文靖公) 목은 이색(李牧隱穡)이 그 서문에서 이르기를 ‘무릇 의식(衣食)을 만족하게 하는바 재화(財)를 풍부하게 하는바 종자(種)를 심고 얼자(蘖)를 키워 주변을 정비하는 바를 부문별로 모아 자세히 분석하고 촛불처럼 밝히지 아니한 바가 없으니 실생활을 다스리는 살아있는 우량서(良書)이로다.’ 라고 하였다.
행촌선생은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 유람갔다가 밤에 태소암(太素庵)에서 묵었는데 소전(素佺)이라는 한 거사(居士)가 있어 숨겨진 옛 서책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더불어 함께 신서(神書)를 구하였는데모두 옛적 환단(桓檀)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진짜 비결(眞訣)이었다. 그는 옛학문에 통달하여 해박하고 탁월하였다고 가히 칭찬할만 하고 그의 참전수계(參佺修戒)의 법은 대개 성(性)을 뭉쳐서 지혜를 짓고 명(命)을 뭉쳐서 덕(德)을 짓고 정(精)을 뭉쳐서 힘을 지었다. 그것은 우주에 존재하여 삼신(三神)이 늘 존재하고 그것은 인물에 존재하여 세 참됨(三眞)이 멸하지 않는 것으로 마땅히 천하만대의 대정신(大情神)과 더불어 혼연히 그 체(體)를 같이하여 나서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선생이 말하기를, “도(道)는 하늘에 있고 이것이 삼신(三神)이 되고도는 사람에게 있고 이것이 세 참됨(三眞)이 되니 그 근본을 말한즉 일(一)이 될뿐이다. 오직 일(唯一) 이것이 도(道)가 되고 둘이 아닌 것(不二) 이것이 법(法)이 된다. 위대하도다. 환웅(桓雄)이여. 먼저 무리와 만물(庶物)이 나오고 도를 천원(天源)에서 얻고 교(敎)를 태백(太白)에 세워 신시 개천의 대의가 비로소 세상에 크게 밝혀졌도다. 이제 우리들이 글(文)에 연유하여 도를 구하고 참전인(參佺)이 계율(戒)을 받아 우리교(吾敎)를 존경해 보았으나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또 수많은 방도를 들었으나 노장(老將)을 이내 모으기 어려우니 가히 한스럽도다.” 라고 하였다. 선생은 시중(侍中)에 이르러 사임하고 물러나 강도(江都)의 홍행촌(紅杏村)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호를 홍행촌수(紅行村叟)이라 하고 마침내 행촌 3서(杏村三書)를 저술하여 집에 소장하였다.
경효왕(敬孝王) 이후 5년 3월에 행촌 이암이 왕명으로 참성단(塹城壇)에서 하늘에 제사올릴 때 백문보(白文寶)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덕(德)을 입고 신(神)을수호하는 제일은 신념에 달려 있고 영재를 길러서 나라를 보위하는 공(功)은 발원(發願)함에 달려있다. 이에 신은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도 또한 신을 의지하여백성이고 나라이고 영원히 편안함과 강녕함을 얻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올리는정성(誠)은 근본에 보답하는 것으로 돌아가게 되어 그것이 인간세상을 구하니감히 가벼이 여길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하였다.
정지상(鄭之祥)은 하동사람인데 그의 누이로 인하여 원나라에 자주 왕래하였다. 경효왕(敬孝王) 당시에 들어와 모시고 수시로 따르는 일에 노고가 있어 왕이즉위하자마자 즉시 선발되어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이르렀고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 안염사(按廉使)가 되어 임지에 부임하고 세도가를 만나서 수차례 볼기를 쳐서 여러 군에 조리돌려 보여 전 도민의 마음을섬뜩하게 하였다. 야사불화(埜思不花)는 본국사람으로 원나라에 있으면서 순제(順帝)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의 형 서신계(徐臣桂)는 육재(六宰)가 되고 아우 응려(應呂)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는데 세력에 의지하여 위세와 복록을 누리니국인들이 그를 두려워 하였다. 불화가 향(香)을 내리려 본국에 이르러 가는 곳마다 많은 존무사(存撫)나 안렴사(按廉)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그들을 모욕하고 꾸짖으니 위반하고 거스르지 않음이 없었다. 전주(全州)에 이르자 지상이 맞아들여공손히 모셨으나 불화는 대접에 매우 거만하게 대하였다. 반접사(伴接使) 홍원철(洪元哲)이 지상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으나 지상이 들어주지 않자 원철이 불화를 충동하여 노하게 하여 말하기를, “지상이 천자의 사자(天使)를 업신여긴다.” 라고 하니 불화가 그를 옭아서 결박하였다. 지상이 분노하여 주(州)의 관리(吏)에게 재빨리 크게 소리치며 말하기를, “국가가 이미 여러 기씨(奇氏)들을 주살하고 다시는 원나라에 사대하지 않으며 재상(宰相) 김경직(金敬直)에게 명하여원수(元帥)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 따위 사자는 쉽게 제압할 수있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장차 너희 주(州)가 강등되어 작은 현(縣)이 되는 것을 보겠느냐.” 라고 하였다. 읍의 관리들이 왁자지껄하게 들어와 결박을 풀고 탈출을 도와주자 지상이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불화와 원철 등을 잡아서 그들을 가두었다. 불화가 차고 있는 금패(金牌)를 빼앗아말을 달려 경성(京)으로 돌아오다가 공주(公州)를 통과하면서 응려(應呂)를 잡아서 철추로 그를 치니 수일 만에 사망하였다. 지상이 와서 왕께 아뢰니 왕이 매우 놀라 순군(巡軍)에 가두고 행성원외(行省員外) 정휘(鄭暉)에게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崔英起)와 읍의 관리 등을 체포하고 또 차포온(車浦溫)을 파견하여 쌀로 빚은 술을 가져가서 불화를 위로하고 그의 금패를 돌려주었다. 원나라에서단사관(斷事官) 매주(買住)를 파견하여 와서 지상을 추국하였다. 왕이 여러 기씨를 주살하고 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巡軍提控)으로 삼고 다시 호부시랑(戶部侍郞), 어상중승(御使中丞)을 거쳐 관직이 판사(判事)에 이르러 돌아가셨는데 성격이 엄하여 무릇 죽을 죄인을 죽일때에는 반드시 그를 파견하였다. 지상의 아내(妻)는 담양(潭陽)에서 홀어미로 살다가 왜인(倭)에게 살해되고 아들은 박위(朴葳)를 따라서 대마도(對馬島)를 타격하였다.
문대(文大)는 고종(高宗) 안효대왕(安孝大王) 18년에 낭장(郎將)으로서 서창현(瑞昌縣)에 있다가 몽고병에게 포로가 되었다. 몽고병이 철산성(鐵山城) 아래에이르러 문대에게 명하여 주(州)의 사람들에게, “진짜 몽고병이 왔다. 빨리 나와서 항복하는 것이 좋다.” 라고 소리쳐 알리게 하니 문대가 곧 외쳐 말하기를,“가짜 몽고병이다. 항복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였다. 몽고인이 그를 참수하려하다가 다시 시켜 외치게 하였으나 이전과 같이 되풀이하니 마침내 그를 참수하였다. 몽고병이 성을 매우 급하게 공격하니 성안에 양식이 떨어져 지켜낼 수가없었다. 장차 함락되려하자 판관(判官) 이희적(李希績)이 성안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모아 창고안에 들여보낸 뒤 그기에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인솔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경효왕 12년 계묘년 3월에 밀직사 이강(李岡)이 명을 받들어 참성단에 제사올리고 곧 시를 지어 나무판에 새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바람불고 경치좋은 봄날에 만물은 풍성하고 해마다 꽃이 피네. 왕명을 받들고먼 거리의 길을 와서 유람하네. 아침에 역마를 달려 제문(辭)을 붉은 보자기에싸서 궁궐(鳳闕)을 하직하고 저녁에 배를 노저어 파도치는 흰 갈매기를 쫓네. 푸른 창공 가운데 산은 색을 띄워 비취색이고 골짜기에 서기가 가득하고 싱싱한화초는 스스로 꽃을 피우네. 봉래산(蓬萊)이 어느 곳인가 빌어 물으니 사람들은이 땅이 곧 선인의 집(仙家)이라고 말하네.
마음은 고요하고 몸은 한가로워 골이 선인(仙)이 되려 하였더니 사람의 일을멀리 생각하니 참으로 아득해지는구나. 마름 올리는 신비한 자리(秘席)는 중흥이후이고 돌로 쌓은 영험한 단(靈壇)은 태고 이전이라. 이미 눈은 천리땅에 도달한 듯하니 이에 몸은 구중천(九重天)에 있는듯 하네. 이번 행차에 짝은 없으나의탁함은 같으니 꼭 환도하던 첫해 같기만 하구나.’ 라고 하였다.강릉왕(江陵王) 우(禑) 5년 신미년 3월에 명으로 사자를 보내어 참성단에서 극진히 제사를 올렸다. 대제학 권근(權近)이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올렸는데 그글에 이르기를,
‘첫번째 술잔을 올림(初獻). 바다 위에 산이 높아 인간세상의 번거로움과 근심스러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이로다. 단의 중앙은 하늘에 가까워 가히 신선(仙)이 말을 몰아 강림하심을 맞이하는 듯 하도다. 소박한 제수를 이렇게 진설하오니 밝은 신(明神)께서 계시는 듯 합니다.
두 번째 술잔을 올림(二獻). 신은 미혹하지 아니하고 들으시사 이렇게 인간을감싸주신다. 하늘은 사사로움 없이 살피고 땅 아래에 내리어 비추어 주신다. 섬김을 예로서 하니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게 되도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리산(摩利山)은 단군께서 제사올린 곳이다. 성조(聖祖)로부터 백성들을 위하여 극함(極)을 세우시고 옛것을 이어 실체를 전하도록 하였다. 후왕(後王)에 이르러 북방 오랑캐를 피하여 도읍을 옮기고 또한 여기에 의지하여 근본을 보전하시었다. 고로 우리 조정이 이를 지켜 무너지지 않았고 짐(朕)소자가 이를 계승하여 경건함을 더합니다. 하늘이시여, 어찌 외부의 도적무리(外寇)의 개들이 훔쳐서 우리 백성을 익은 물고기처럼 만드실 수 있습니까. 비록먼 강역의 업신여김을 받았고 높이 받들고 나아가 표문(表)을 듣고 하물며 궁궐과 읍성이 저들에게 침략당했는데 어찌 그렇게 참고 보기만 하십니까. 그 밝은위엄의 증험이 없고 이 덕에 어긋나 좋은 일이 없는 것은 실로 허물을 다른데서찾기 어렵고 오직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에 그들의업(業)에 안정되지 않으면 신께서 장차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에 옛전범(舊典)을 준수하여 감히 당시의 환란을 고하고 낮추어 고요히 정성을 다하니 보배로운 거울(寶鑑)을 밝게 밝혀주십시오. 바다에 명하여 파도를 거두게 하시고 배에 올라 그 닻이 나아가는 이들을 크게 향유케 하소서. 하늘이시여, 거듭 명하여사직의 안정된 반석에 빛이 내리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천수(天授) 기원 439년 경효왕 5년 이해 여름 4월 정유년에 기철(奇轍), 권겸(權謙), 노책 등이 반역을 꾀하다 숨거나 주살되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으로 삼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이때에 원나라 왕실(元室)이 극히 쇠하여 피폐하게 되고 오나라 왕(吳王) 장사성(張士誠)이 강소(江蘇)에서 일어나니 사태가 몹시 소란하였다. 최영(崔瑩) 등이 고우(高郵)로 부터돌아오자 상(上)께서 비로소 영(瑩) 등의 의논에 따라 드디어 서북(西北)을 되찾을 계획을 정하시고 먼저 정동행성을 폐지하였다. 이어서 인당(印璫), 최영 등여러 장수를 파견하여 압록강 이서의 8참(站)을 공격하여 그곳을 부수고 또 류인우(柳仁雨),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 등을 파견하여 쌍성(雙城) 등의 땅을 수복하였다.
10년 겨울 10월에 홍건적(紅頭賊)의 반성(潘誠), 사유(沙劉), 주원장(朱元璋) 등10만여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를 도둑질하고 11년에 도적들이 안주(安州)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음(李蔭)과 조천주(趙天柱)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12월에 상께서 복주(福州)에 이르러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總兵官)으로 삼았는데 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렴하였다. 파천(播遷)한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하게 여겨 홍건적을 소탕하여 경성(京城)을 수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상 역시도 그를 신임하셨다. 세운은 누차에 걸쳐 빨리 애통(哀痛)한뜻을 담은 조칙을 내려 이로써 민심을 위무하시고 여러 도에 사자를 파견하여이로서 징병을 독려하시라는 청을 올렸다. 상께서 마침내 조칙을 내리니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이 전하며 말하기를, “천하가 안정되면 재상(相)에게 마음이 쏠리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장수(將)에게 마음이 쏠리는 법이다. 나는 문신으로 약하여 군사를 움직일 수 없으니 그대가 그 일에 힘쓰길 바라오.” 라고 하였다. 세운(世運)이 도당(都堂)에 이르러 분한 어조로 소리 높여 류숙(柳淑)에게 말하기를, “군사 징집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장군이 가는데 암이 세운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강한 도둑떼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황성(皇城)에 이르도록 지키는 승기를 놓쳐 어가가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이자 삼한의 치욕이 되었으니 공이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주창하고 의장과무기를 가지고 군사들에게 가시오. 사직의 재차 안녕과 왕업의 중흥이 이 한번의 거사에 달려있소. 우리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기를 바라겠소.” 라고 하였다. 힘써 달래어 그를 파견하고 매일같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고 대의를 주창하고 모의를 도출하여 계책을 주니 안우(安祐), 이순(李珣:개명 희열, 이암의 종질), 한방신(韓方信) 등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를쫒아 공을 세웠다.
20년 신해년 2월 갑술에 여진의 천호(千戶) 이두란(李豆蘭), 첩목아(帖木兒)가백호(百戶) 보개(甫介)를 파견하여 100호를 거느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윤 3월을미년에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의 평장사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 등이 요양이 본래 고구려 땅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 부속하고자 사람을 파견하여와서 청하거늘 이때에 조정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나라일이 몹시 어지러웠다.그런 연유로 상께서 정몽주(鄭夢周)를 파견하여 명(明)나라에 가서 촉(蜀)의 평정을 축하하였다.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살해하니 조정과 민간이 소란한 연유로 곳곳에서 사건들을 말하려는 자가 매우 적었다. 이러한 고로즉시 회보하지 못하니 유익 등은 마침내 금주(金州), 복주(復州), 개평(蓋平), 해성(海城), 요양(遼陽) 등의 땅을 가지고 명나라에 부속하고 말았다. 오호라. 당시퍼런 담론(淸論)의 무리들이 이 일에 맴돌기만 한 까닭으로 스스로 좋은 기회를놓쳐 마침내 옛강토를 수복하지 못하였으니 지사(志士)의 한이 이에서 깊어지는구나.
강릉왕(江陵王)이 선황제(先帝)의 명으로 즉위하니 이때에 요동의 도사(都司)가 승차(承差)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에 이르러 방문(榜)을 널여 말하기를, ‘철령(鐵嶺)의 이북, 이동, 이서는 본래 개원(開元)에 속하니 그 관할의군인(軍人), 한인(漢人), 여진(女眞), 달달(達達), 고려(高麗)는 이에 요동에 속한다.’ 라고 운운 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여 일치하지 않다가 마침내 전쟁을독려하기로 결정함으로서 중앙과 지방의 병사(兵)와 말(馬)을 크게 징발하고 이로서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았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환단고기 (신교출판사, 김호영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