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김호영 편역)

  1. 범례
  2. 삼성기전(三聖紀全) 상편(上篇)
  3.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
  4.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세기 서(序)
  5.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세기
  6. 북부여기(北夫餘紀) 상하(上下)
  7.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8. 태백일사(太白逸史) - 삼신오제본기
  9. 태백일사(太白逸史) - 한국본기
  10. 태백일사(太白逸史) - 신시본기
  11. 태백일사(太白逸史) - 삼한관경본기
  12. 태백일사(太白逸史) - 소도경전본훈
  13. 태백일사(太白逸史) - 고구려국본기
  14. 태백일사(太白逸史) - 대진국본기
  15. 태백일사(太白逸史) - 고려국본기
  16. (편역자 서문)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편찬()

 

시조 해부루(解夫婁) 재위 39

을미년 원년. 왕은 북부여에서 제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차릉으로 부르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을 심기에 적당하였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호랑이, 표범, , 이리 등이 많아서 사냥하기 편리하였다.

정유년 3. 명하여 국상 아란불(阿蘭弗)에게 진휼()을 설치하여 멀고 가까운 유민들을 초대하여 위무케 하였다. 때에 맞춰 배부르고 따뜻하게 하고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년 이내에 국가는 부강해지고 백성들은 융성해졌다. 때마침 비가 차릉을 기름지게 하므로 백성들은 왕정춘(王正春)의 노래를 불렀다.

임인년 8. 이보다 먼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놀러 나갔다가 부여의 황손인 고모수(高慕漱)의 처소에 유혹되어 강제로 압록 강변의 집안에 이르러 사통하였다. 이내 승천(升天)하여 돌아오지 않으므로 부모는 유화가 중매없이 따른 것을 책망하여 변두리 집에 귀양살이로 거주하게 하였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弗離支)이며 혹은 고진(高辰)의 손자라고 한다. 왕은 이상하게 여겨 유화와 함께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었다. 이해 55일에 유화부인은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남자가 있어 껍질을 깨고 나오니 이를 일러 고주몽(高朱蒙)이라고 하였다. 모습이 영리하고 장대하였는데 나이 7세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었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는데 고로 이로써 이름이 되었다.

갑진년 10.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하루는 산천(山川)에 제사올리고 대를 이을 아들이 있기를 빌었다. 그기서 말을 타고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이 서로 함께 눈물을 흘리므로 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마침내 하늘이 내게 지금의 아들을 준 것이다.” 하시며 이에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임술년 28. 나라 사람들은 고주몽이 국가에 이롭지 않으므로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렀다. 이듬해에 새 나라를 열었는데 이가 고구려의 시조이다.

계유년 39. 왕이 몽하고 태자 금와(金蛙)가 즉위하였다.

 

2세 금와(金蛙) 재위 41

갑술년 원년. 왕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정유년 24. 유화 부인이 몽어하시자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례지냈다. 명하여 황태후(皇太后)의 예로서 벼슬을 주고 산릉(山陵)을 만들고 그 옆에 묘사(廟祠)를 세웠다.

갑인년 41. 왕이 몽어하시고 태자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3세 대소(帶素) 재위 28

을묘년 원년. 봄 정월에 왕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질자(質子)를 교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고구려의 열제(烈帝)는 태자 도절(都切)로서 질자를 하였으나 도절은 가지 않았다. 왕은 이에 화가나 겨울 10월에 병력 5만으로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으로 동사자가 많으므로 퇴각하였다.

계유년 19. 왕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러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임오년 28. 2월에 고구려가 대거 침공해오므로 왕은 몸소 무리를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진흙탕을 만나 왕의 어가의 말이 수렁에 빠져 나오지 못하므로 고구려의 상장군 괴유(怪由)가 바로 앞에서 왕을 죽였다. 그럼에도 아군은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때마침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므로 고구려 열제는 군사를 감추어 밤에 탈출하여 샛길을 따라 돌아가 버렸다. 여름 4월에 왕의 아우는 따르는 무리 수백인과 함께 달아나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해두왕(海頭王)이 사냥나온 것을 보고 마침내 그를 죽여서 그 백성들을 취하고 일어나 갈사수(曷思水) 연안을 보전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니 이것이 갈사(曷思)이다. 태조 무열제(武烈帝) 융무(隆武) 168월에 이르러 도두왕(都頭王)은 고구려가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나라를 들어 스스로 항복하니 모두3세 역년 47년만에 나라의 명이 끊어졌다. 도두를 우태(于台)로 하고 관직과 집을 하사하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하고 이에 동부여후(東夫餘侯)에 봉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의 종제(從弟)가 나라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선왕께서는 시해되고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다. 갈사는 구석에 치우쳐 있어 안전하지만 국가가 자립하기 불가능하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없어 이후로 나라를 다시 부흥할 가망이 없으므로 차라리 항복하여 살길을 도모하리라.”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옛도읍의 백성 만여 가구가 고구려에 투항하므로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낙문(絡文)이 있으므로 낙씨 성을 하사하였다.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開原) 서북에서 백랑곡(白狼谷) 또 연나라 근처에 이르렀다. 문자열제(文咨烈帝) 명치(明治) 갑술년(甲戌)에 이르러 그 나라를 꺾음으로써 고구려에 편입시키니 연나부 낙씨는 마침내 제사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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