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요, 어머니는 웅씨 왕의 딸인데 신묘년(辛卯) 5월 2일 인시에 단수(檀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신인(神人)
의 덕이 있으므로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나이 14세 되던 갑 진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받들어 대읍(大 邑)의 국사(國史)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무진년 당요(唐堯)때에 단국(檀國)으 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의 터에 이르니 국인들이 추대하여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이에 9환이 하나로 되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 었다.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고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에 있기를 93년, 수명은 130세였다고 하였다.
무진 원년. 대시에 신시(神市)의 세상에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계곡 에 널리 퍼져 살며 풀로 옷을 하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上月) 3일 에 신인 왕검이 있어 오가(五加)의 수장이 되어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목의 터에 와서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께 제사하였다. 그는 신의 덕(德)에 이르고 성인 의 어짐(仁)을 겸하였다. 이에 능히 조서를 받들어 하늘(天)을 계승하니 위탕유 열하여 9환의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하여 추대하니 천제(天帝)의 화신(化身)이 되어 제왕이 되니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신시의 옛 법규를 회 복하고 아사달에 도읍을 세워 조선(朝鮮)이라는 연방국(邦)을 세웠다.
조서(詔)에 이르기를 하늘의 규범(天範)은 오직 하나(一)요 두 개의 그 문(厥 門)이 아니다. 너희들이 오로지 하나에 순수하게 정성을 다하면 너희 마음이 즉 하늘에 보일 것이다. 천범은 항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로지 동일하다. 자기 를 금기하고 마음을 잡는 것으로서 사람의 마음에 미치고 사람의 마음은 오로지 교화하고 또한 천범에 합해져야 이에 만방에 작용하고 나아간다.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있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니 너희 부 모를 공경하는 것이고 이에 능히 하늘을 공경함으로서 방국(邦國)에 미치는 것 이 바로 충성과 효도이다. 너희가 능히 이 도(道)를 체득한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먼저 화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짐승도 쌍이 있고 헌 가죽신도 짝이 있나니 너희 남녀는 서로 화목하여 원망 하지 말며 질투하지 말며 음란하지 말라.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아픈 것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헐뜯지 말고 서로 돕고 서로 해치지 말아야 가정도 국가도 흥하게 된다.
너희들 소와 말과 원숭이를 보아라. 서로 나누지 않느냐. 너희들 서로 양보하 고 서로 약탈하지 말고 함께 지어 서로 도둑질하지 말아야 국가가 융성할 것이다.
너희들 또 호랑이를 보아라. 사납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설을 지었 다. 너희는 난폭하게 날뛰지 말고 모진 심성(?性)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고 항상 하늘의 규범을 준수하고 모든 사물을 사랑하라. 너희는 위태로움을 보면 도와주고 약한 자를 능멸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규휼하고 낮은 자를 경멸하지 말아라. 너희가 이것을 어긴다면 영원히 신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몸과 가정 이 낙후되리라.
너희가 충동적으로 벼논에 불을 놓으면 장차 심을 벼들은 사라지게 되므로 하늘과 사람이 이에 노할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두껍게 싸서 감춘다 해도 냄새 는 반드시 새어나올 것이다. 너희는 바른 성품을 공경하고 지녀서 사악한 마음 을 품지 말고 나쁜 것을 감추지 말고 화나는 마음을 지니지 말고 하늘을 공경하 고 백성과 친하라. 이에 너희는 복록(福祿)이 무궁할 것이다. 너희 오가 무리들 은 이 뜻을 잘 따라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토지를 개척하고 성조(成造)에게 궁실을 짓게 하 고 신지(臣智)에게는 서계(書契)를 만들게 하고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설치하 게 하고 나을(那乙)에게는 판적(版籍)을 관장하게 하고 희(羲)에게는 괘점(卦筮)
을 편찬하게 하고 우에게는 병마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斐西岬) 하 백(河伯)의 딸로 하여금 왕후(后)로 삼고 누에치는 것을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 ?)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비치었다.
정사년 50년. 홍수가 범람하여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제왕(帝)께서는 풍백 (風伯)인 팽우에게 치수(治水)를 명하여 고산대천(高山大川)에 정주하여 백성들 이 편하게 살게 하니 우수주(牛首州)에 비석이 있다.
무오년 51년. 제왕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마리산(摩璃山)에 제천단(祭天檀)을 축조하게 하였는데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이것이다.
갑술년 67년. 제왕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우사공(虞司空)과 더불어 도 산(塗山)에서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의 법(五行治水法)을 전하여 주고 나라의 경계를 정하여 유영(幽營) 두 주가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또 회대(淮 垈) 지방의 여러 제후들을 정하고 분조(分朝)를 설치하여 그것을 다스리고 우순 (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 93년. 제왕께서 버들궁궐(柳厥)에 계시면서 흙 계단(土階)을 스스로 쌓았다. 풀과 숲을 없애지 않았고 박달나무 우거진 그늘에서 곰, 호랑이와 더불어 놀면서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또 전답 사이에는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 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고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니 백성들은 재물이 쌓여 살림 에 보태었다. 상월(上月)에 국중대회를 열어 하늘에 제사하고 백성 모두가 비추 고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이로부터 황제의 교화는 9역(九域)의 멀고 먼 지방까지 미치어 덕의 교화는 점차로 위대해지고 광대해지게 되었다.
앞서 이 지역은 천하의 땅을 구획하여 삼한(三韓)을 다스렸는데 삼한은 모두 5가(家) 64족(族)이었다. 이 해 3월 15일에 제왕께서 봉정(蓬亭)에서 붕서(崩)하 시므로 교외의 10리 땅에 장사하였다. 만 백성들이 마치 부모의 상(喪)인 것처럼 단기(檀?)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앉아 경배(敬拜)하고 항상 생각 하여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였다. 태자 부루(扶婁)가 즉위하였다.
2세 단군 부루(扶婁) 재위 58년 신축년 원년.
제왕께서는 현명하시고 복이 많아서 재물을 많이 저장하시니 부 유하였다.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니 한 명의 백성도 굶주리거나 추 위에 떨지 않았다. 매년 봄, 가을 마다 나라 안을 살펴보시고는 예법에 따라 하 늘에 제사하였다. 여러 한(汗)들의 선악을 관찰하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시고 도 랑을 파서 농상(農桑)을 권장하시고 집을 짓고 학문을 일으키시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
처음에 우순(虞舜)이 남국(藍國)의 옆에 유영(幽營) 두 주를 설치하므로 제왕 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고 그 임금(君)을 모두 축출한 후에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봉함으로서 그 공을 표창하였다.
신시 이래로 매당 하늘에 제사하는 국중대회(國中大會)때 덕의 찬송을 제창하 고 모두 화합하여 어아가(於阿歌)를 부르고 근본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신인(神 人)으로서 사방을 다 화합하는 의식을 올리니 이것이 참전인의 계(參佺戒)가 되 었다. 그 가사에서 말한다.
‘어아어아 우리들 대조신(大祖神)의 크신 은덕 배달국 우리들 모두는 백백 천 천년 잊지 마세.
어아어아 선심(善心)은 큰 활을 이루고 악심(惡心)은 화살의 과녁을 이루니 우 리들 백백 천천 사람 모두 큰 활의 현은 선심(善心)과 같고 곧은 화살은 일심 (一心)과 같네.
어아어아 우리들 백백 천천 사람 모두 큰 활의 한 무리가 많은 화살 과녁을 관파(貫破)하니 비탕(沸湯)이 선심(善心) 가운데 한 줄기 눈(雪) 악심(惡心)과 같네.
어아어아 우리들 백백 천천 사람 모두 큰 활은 견고하고 굳세어서 마음과 같 네. 배달국은 빛나고 번영하리라. 백백 천천년 크나 큰 은덕 우리들 대조신이여, 우리들 대조신이여.’ 임인년 2년. 제왕께서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을 초대하여 정치의 도(道)를 물 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루었는데 사흘 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석달 동안을 태만하지 않았고 그 해 동안을 애통해 하였고 삼년까 지 슬퍼하였다. 이로부터 온통 세속에서는 다섯 달로 멈추었던 상을 오래 하는 것이 영광이 되었다. 이것은 천하의 큰 성스러움이 그 덕화의 유행이 마치 역마 (郵)의 속도로 전해진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두 련(二連)은 이렇듯 효(孝)로 써 소문이 났고 또한 공자(孔子)도 칭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저 효라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근본으로 사해(四海)에 두루 알려져 표준 이 되었다.
계묘년 3년. 9월에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에 얹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도량형의 모든 기기는 관(官)의 것을 표준 으로 하도록 하였다. 포와 서의 시장 가격이 있는 곳이 없으나 두 백성이 서로 속이지 않으므로 어디서나 편리하였다.
경술년 10년. 4월에 구정(邱井)을 획정하여 전결(田結)로 하고 백성들이 스스 로 사리(私利)를 취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임자년 12년. 신지(神誌)와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년 58년. 제왕께서 붕서하셨다. 이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 어 미친 듯 산위에서 울부짖었다. 만 백성들이 매우 통곡하였다. 후에 국인들은 집안에 땅을 골라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하니 토기에 화곡(禾穀)을 성대하게 담 아 단(壇) 위에 놓고 이것을 부루단지(扶婁檀地)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업신(業 神)으로 삼았다. 또 전인의 계율(佺戒)을 칭함으로서 모든 사람이 계율(戒)을 받 는 것을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하였는데 곧 사람과 더불어 업(業)이 갖추어져 완전해지라는 의미이다. 태자 가륵(嘉勒)이 즉위하였다.
3세 단군 가륵(嘉勒) 재위 45년 기해년 원년.
5월 제왕께서 삼랑(三朗) 을보륵(乙普勒)을 초대하여 신(神)과 왕 (王)과 종인(倧)과 전인(佺)의 도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 른손에 올려놓고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한 다음 나아가 말씀드렸다. 말하기를, “신(神)은 능히 만물을 인출(引出)하고 그 성(性)을 각각 온전히 하므로 신의 존 재함과 현묘함을 백성들 모두는 의탁하고 믿습니다. 왕은 능히 덕과 의리로 세 상을 다스리니 각각 그 생명을 안전하게 하는 것이 왕이 존재하고 베푸는 바이 므로 백성들 모두가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종인(倧)은 국가의 존재가 선 택한 것입니다. 전인(佺)은 백성의 존재가 받드는 바입니다. 모두 7일이 다시 이 어지게 삼신(三神)께 맹세하면 세 올(三忽)은 전인(佺)이 되고 9환은 종인(倧)이 되어 그 도를 덮을 것입니다. 부모(父)가 되려고 하는 자는 곧 부모이게 하고 임 금(君)이고자 하는 자는 곧 임금이게 하고 스승(師)이고자 하는 자는 곧 스승입 니다. 아들이고자 하고 신하이고자 하고 무리이고자 하는 이들 또한 아들이게 신하이게 무리이게 합니다. 고로 신시개천의 도는 또한 신(神)으로써 교단을 설 치하여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니 나를 아는 것을 홀로 구하고 나를 비움으로서 만물을 존재케 하면 능히 인간세상에서 자기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천신(天神)
을 대신하여 왕은 천하의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 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사람이 없게 하고 만왕(萬王)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고 병을 없애고 원 망을 풀고 생명을 해치는 그 어떠한 것도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妄)됨을 고치는 것이 곧 참(眞)임을 알게 하는 것이니 3?7 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서 계율(戒)을 지키면 이로부터 스스로 조정에는 종인의 가르 침(倧訓)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인의 계율(佺戒)이 있어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 게 태양 안에 모이고 삼광오정(三光五精)이 응결하고 뇌(腦)의 바다가 현묘하여 스스로 광명을 얻고 함께 구제(濟)하니 이를 거발환(居發桓)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9환과 9환의 백성들에게 베푸니 모두 돌아와 통솔되고 하나가 되었습니 다.” 라고 하였다.
경자년 2년. 이때 풍속이 항상 같지 아니하여 방언(方言)이 서로 달랐다. 상형 표의(象形表意)의 진서(眞書)가 있었으나 10가(家)의 읍(邑)의 말이 대부분 통하 지 않고 100리의 국가의 글이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편찬하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 그 문자는 다음 과 같다.
신축년 3년. 신지(神誌) 고결 (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培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년 6년.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索靖)을 약수(弱水)에 옮겨 종신동 안 구치토록 명한 뒤 그를 사면하여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시조(祖)가 되 었다.
병오년 8년.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제왕께서 지백특(支伯特)에서 그 를 토벌하였다. 초여름 4월에 제왕께서 불함산(不咸山)에 올라 민가를 내려다보 시고 밥하는 연기가 적게 나는 곳은 조세를 감하여 차등있게 하였다.
무신년 10년.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여수기(余守 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참수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칭하여 말하 기를 소시모리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전음되어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그 후손 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있어 해상으로 도망하여 삼도(三島)에 웅거하면서 천왕(天王)이라고 참칭하였다.
계미년 45년. 9월에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즉위하였다.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 재위 38년 갑신년 원년.
황제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봉하여 몽고리한(蒙古里汗)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몽고족은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 에 북쪽을 순시하시고 돌아서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삼신께 제사하고 신령한 약초를 얻으니 인삼(人蔘)이라고 불렀다. 또는 선약(仙藥)이라고 칭하였다. 그 후 로 신선불사(神仙不死)의 설(說)과 더불어 삼(蔘)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 일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간간이 채득하여 얻은 집이 있다고 전하고 신이(神 異)가 나타나고 영(靈)이 편재한다는 많은 기이한 경험들이 말로 전해진다.
무오년 5년. 둥근 구멍이 뚫린 패전(貝錢)을 주조하였다. 가을 8월에는 하(夏)
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방물(方物)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하여 갔다. 10월에 조야(朝野)에서 신서(書)를 백성들에게 공개하기 위하여 돌에 별도로 기록하였 다.
경인년 7년. 살수(薩水)의 위에서 조선소(造船)를 설치하였다.
임인년 19년. 하나라 주인(主) 상(相)이 덕을 잃으므로 제왕께서 식달(息達)에 게 명하여 남(藍)?진(眞)?변(弁)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그를 정벌토록 하 니 천하가 이를 듣고는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년 38년. 6월에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美+鳥加의 구을(丘乙)이 즉위하였다.
5세 단군 구을(丘乙) 재위 16년 임술년 원년.
태백산에 단을 쌓도록 명하고 사자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 다.
계해년 2년. 5월에 황충(蝗?)이 크게 일어나 들에 가득하였다. 제왕께서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들을 둘러보시고는 이를 없애주기를 삼신께 고하니 수일내에 모두 사라졌다.
을축년 4년.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사용하여 월력을 만들었다.
을사년 8년. 신독인(身毒人)이 표류하여 동해가에 이르렀다.
정축년 16년.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봉축(封築)하 고 환화(桓花)를 많이 심었다. 7월에 제왕께서 남쪽으로 순행하여 풍류강(風流 江)을 답사하시고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이윽고 붕서하셨다. 대박산(大 博山)에 장사하였다. 우가(牛加)의 달문(達門)이 중인(衆人)들에게 피선되어 대통을 이었다.
6세 단군 달문(達門) 재위 36년 무인년 원년.
임자년 35년. 여러 한(汗)들이 항상 봄에 모여서 구월산(九月山)에서 제사하고 신지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 그 글(詞)에서 말하기 를, ‘아침의 빛을 가장 먼저 받는 이 땅에 삼신(三神)이 혁혁히 세상에 임하시고 환인(桓因)께서 나시어 무리들에게 먼저 덕을 심고 넓히고 또 깊이하고 여러 신 (神)과 의논하여 환웅을 보내어 조칙(詔)을 이어받게 하여 개천(開天)토록 하였 습니다. 치우(蚩尤)께서 청구에서 일어나 무(武)의 명성을 만고에 떨치시니 회대 (淮垈)의 모든 지방이 왕의 천하에 들어왔습니다. 누구도 능히 왕검(王儉)을 침 노할 수 없다는 대명을 받으니 환호성이 9환(九桓)을 진동시켰습니다. 고기에 물 처럼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풀에 바람처럼 덕으로 새롭게 교화하니 원한이 있는 자는 먼저 원한을 풀고 병이 있는 자는 먼저 병을 제거하여 한마음으로 존재하 니 어짐(仁)과 효도(孝)가 사해(四海)에 가득하였습니다. 밝게 빛나는 진한(眞韓) 진국(鎭國) 가운데 다스림의 도는 모두 새롭기만 하고 모한(慕韓)은 그것을 왼쪽 에서 보전하고 번한(番韓)은 그 남쪽을 당겨서 암으로 4벽을 에워쌌습니다. 성주 (聖主)께서는 저울추와 극기(極器)와 같은 신경(新京)에 행차하시었는데 극기는 백아강(白牙岡)이요 저울대는 소밀랑(蘇密浪)이요 저울추란 안덕향(安德鄕)입니 다.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평하면 덕을 신뢰하고 신의 정(神精)을 수호하고 나라가 크게 일어나 태평을 보전하고 일찍이 70국이 항복을 하여 영원히 삼한이 보 전되고 왕업(王業)이 의로워 흥할 것입니다. 일어나고 망하는 것은 물론 말로 되 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으로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한(汗)들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대저 나와 같이 이 약속을 한 사람 은 환국(桓國)의 오훈(五訓)과 신시(神市)의 오사(五事)로써 영구토록 준수할 표 본(案)으로 삼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의 근본이고 국가의 도이 고 먹는 것의 우선이다. 농자(農者)는 만사의 근본이고 제사자(祭者)는 오교(五 敎)의 근원이니 마땅히 국인과 더불어 함께 다스려서 만드는 것이다.” 하셨다.
먼저 중족(重簇)에게 강론(講)하시고 다음으로 죄인들을 놓아주시고 아울러 사 형과 책화(責禍)를 제외하고 국경을 지키고 화백(和白)을 공개하여 처음으로 전 하였다. 함께 화합하는 마음을 베풀고 겸손하고 낮추고 스스로 육성하니 이로서 어진 정치가 시작되었다. 때에 맹세하고 폐물을 바치는 자는 대국이 둘, 소국이 스물, 허락(墟落)이 3,624곳이었다.
계축년 36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美+鳥加의 한율(翰栗)이 즉위하였다.
7세 단군 한율(翰栗) 재위 54년
갑인년 원년.
정미년 54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우서한(于西翰)이 즉위하였다.
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 혹은 오사함(鳥斯含)) 재위 8년
무신년 원년. 20분의1 세법을 정하여 널리 통용하니 있고 없는 사람이 서로 보충하여 부족함이 없었다.
기유년 2년. 이 해에 풍년이 들어 하나의 줄기(莖)에 여덟 개의 이삭이 달렸 다.
신해년 4년. 제왕께서 미복(微服)으로 잠행하여 국경의 밖으로 나가 하(夏)나 라의 정세를 시찰하고 돌아와 관제를 크게 개혁하였다.
갑인년 7년. 세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대궐의 동산(苑) 안으로 날아들어 왔 는데 그 날개의 넓이가 삼척(三尺)이나 되었다.
을묘년 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아슬(阿述)이 즉위하였다.
9세 단군 아슬(阿述) 재위 35년
병진년 원년.
제왕께서 인덕이 있어 백성이 금지하는 것을 침범하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똥 웅덩이가 아무리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 때에 버려지는 것이다.” 하시고 그 금지하는 것을 침범한 것을 논하지 않 으시고 이것을 교화하시니 덕의 맑고 큰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이날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뜨니 이를 구경하는 자가 마치 긴 담과 같았다.
정사년 2년. 청해(靑海)의 욕살 우착(于捉)이 거병하여 궁궐을 침범하니 제왕 께서는 상춘(常春)으로 피해 구월산 남쪽 산기슭에 새로운 궁궐(宮)을 짓고 우지 (于支), 우속(于粟) 등을 보내어 그를 토벌하여 주살케 명한 후 3년 뒤에야 환도 하였다.
경인년 3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우가(牛加)의 노을(魯乙)이 즉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魯乙) 재위 59년
신묘년 원년. 대유(大?)를 만들어서 가축 이외의 짐승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임진년 2년. 친히 마을에 행차하셔서 가정(駕停) 야외의 현자들에게 많이 물으 시고 돌아왔다.
을미년 5년. 궁문 밖에 신원목(伸?木)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사정을 들으시니 나라 안팎이 크게 기뻐하였다.
병진년 16년. 동문 밖 10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었는데 서로 같지 아니하고 누워있던 돌들이 저절로 일어났다. 천하(天河)에서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그림 (圖)을 짊어지고 나타났는데 그림은 윷판(柶板)과 같았다. 발해(渤海) 연안에서 금괴가 나왔는데 그 수량이 열 하고도 3석(石)이었다.
을축년 35년. 감성(監星)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기축년 59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도해(道奚)가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도해(道奚) 재위 57년
경인년 원년. 제왕께서 오가에게 명하여 열두 명산의 최고로 경치 좋은 곳을 택해 국선(國仙) 소도(蘇塗)를 설치하게 하였다. 둘레에 단수(檀樹)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택하여 환웅상으로 봉하고 여기에 제사하였는데 웅상(雄常)이라 고 하였다. 국자(國子)의 사부(師傅)인 유위자(有爲子)가 책(策)을 올리며 말하기 를, “오직 우리 신시에서만 실로 환웅 개천으로부터 무리를 받아들여 전인(佺)으 로서 설시하고 계율(戒)로서 교화하였습니다. 천경(天經)과 신고(神誥)를 가르쳐 설명하니 윗사람들은 옷과 갓을 갖추고 대검을 차고 즐거움을 누리고 아래의 백성들은 죄를 범하지 않고 함께 야인을 다스리니 도적이 없어 스스로 안락하였습 니다. 세상 사람들은 병이 없어 스스로 수명을 누렸고 흉년이 없어 스스로 여유 를 누렸고 산에 올라 노래하고 달을 맞이하여 춤추었습니다. 먼 곳에 까지 미치 지 않는 곳이 없고 어느 곳이든 흥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덕의 교화가 만 백성 들에게 베풀어져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를 넘쳤습니다. 이와 같이 하시기를 청합 니다.” 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령하니 매우 장대하고 화려하였다.
천제 환웅의 유상(遺像)을 안치하여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서는 광채가 섬섬하 여 마치 큰 태양이 있어 둥근 빛을 우주에 비추는 듯하고 단수의 아래 환화(桓 花)의 위에 앉아 마치 원심(圓心)을 품은 하나의 진실된 신과 같았고 천부인표 (天符印標)를 가진 대원일의 도기(圖旗)가 누전(樓殿)에 걸려 세워져 있었는데 이것을 거발환(居發桓)이라고 칭하였다. 3일을 계율(戒)하시고 7일을 강독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는듯 하였다. 그 염표문(念標文)에서 이르기를, ‘하늘은 현묵(玄?)으로 위대하니 그 도(道)이다. 보원(普圓)은 그것이 일(事)이다. 진일(眞一)이다.
땅은 축장(蓄藏)으로 위대하니 그 도이다. 효원(效圓)이 그 일이다. 근일(勤 一)이다.
사람은 지능(知能)으로 위대하니 그 도이다. 택원(擇圓)이 그 일이다. 협일 (協一)이다. 고로 일신(一神)이 충(衷)에 내려 성통(性通) 광명하고 재세이화하 고 홍익인간 한다.’ 하시고 그것을 돌에 새겼다.
정사년 28년. 장소를 설치하고 방물(方物)을 모아서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헌납하여 진설한 것들이 산처럼 쌓였다.
정묘년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들을 뽑아서 모두 병사가 되게 하였다. 사 족(士) 20명을 선발하여 하나라 수도로 보내어 국훈(國訓)을 전하고 위성(威聲)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을해년 46년. 관청을 송화강 연안에 세워 운영하니 배와 노와 기기와 물건들 이 세상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3월에 산 남쪽(山南)에서 삼신께 제사하였는데 술 을 바치고 선물을 준비하여 치사(致詞)하고 초제하였다. 이날 밤 특별히 선온(宣 ?)을 내려서 국인들과 더불어 환음(環飮)하고 백희(百戱)를 관람하고 파하였다.
이윽고 누전에 올라 경(經)을 논하시고 신고(誥)를 강연하셨다. 오가를 불러 이 르기를, “지금 이후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고 옥문을 열고 거지에게 밥을 먹이고 아울러 사형을 없애도록 하라.” 하시니 내외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 다.
병술년 57년. 제왕께서 붕서하시니 만 백성들이 부모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 - 18 - 단군세기 하고 3년을 근신하니 사해에는 노래 소리가 멈추었다. 우가의 아한(阿漢)이 즉위 하다.
12세 단군 아한(阿漢) 재위 52년
정해년 원년.
무자년 2년. 여름 4월에 뿔 하나 난 짐승을 송화강 북변(北邊)에서 발견하였 다. 가을 8월에 제왕께서 나라 안을 순행하시고 요하(遼河)의 좌편에 이르러 순 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우고 역대 제왕의 이름과 묘호를 새겨 전하였는데 이 것이 금석문의 최고이다. 후에 저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은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弁韓)땅에 수상 한 돌이 있는데 대(臺)는 무너지고 철쭉만 붉게 피고 글자는 함몰되고 이끼만 푸르다네. 비를 세운 처음 그 자리에 서서 흥망의 석양을 바라본다. 문헌은 징후 가 없으나 이것이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을묘년 29년. 명하여 청아(菁莪)의 욕살 비신(丕信)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 고사침(高士琛), 맥성(貊城)의 욕살 돌개(突盖)를 봉하여 열국의 제후(汗)로 삼았 다.
무인년 52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우가의 흘달(屹達)이 즉위하였다.
13세 단군 홀달(屹達 혹은 대음달(代音達)) 재위 61년
기묘년 원년.
갑오년 16년. 주현(州縣)을 정하여 직책의 구분하는 제도를 수립하였다. 관리 (官)는 권력(權)을 겸하지 않고 정치(政)는 규칙(則)을 넘지 않고 백성(民)들은 고향(鄕)을 떠나지 않으니 스스로 소사(所事)가 편안하고 현가(絃歌)가 지역에 넘쳤다.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므로 그 주인(主) 걸(桀)
이 구원을 요청하였다. 제왕께서 읍차(邑借)인 말량(末良)으로 9환의 군사를 이 끌고 가서 전쟁을 돕게 하므로 탕(湯)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이에 군사를 되돌리도록 명하였으나 걸은 조약을 어기고 병사를 보내어 길을 막으며 금맹을 깨고자 하므로 은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걸을 정벌하였다. 몰래 신지 우량(于亮)
을 보내어 견군(?軍)을 이끌고 낙랑(樂浪)과 합하여 관중(關中)의 빈기(?岐)의 땅을 점거하여 관제(官制)를 설치하였다.
무술년 20년. 소도를 많이 세워 천지화(天地花)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 - 19 - 단군세기 금 글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니 이들을 이름하여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 였다. 국자랑들은 출행할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고로 그때 사람들은 천지화랑이라고 칭하였다.
무진년 50년. 5성(星)이 루(婁)에 모이고 황학(黃鶴)이 와서 동산의 소나무에 깃들어 살았다.
기묘년 61년. 제왕께서 붕서하시니 만 백성들은 밥을 먹지 않고 곡성이 끊이 지 않았다. 이에 명하여 죄수와 포로를 석방하고 살생을 금지하고 방생을 하고 해를 넘겨 장사를 지냈다. 우가의 고불(古佛)이 즉위하였다.
14세 단군 고불(古佛) 재위 60년 경진년 원년.
을유년 6년. 이 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제왕께서 친히 하늘에 비 오기를 기원 하였는데 하늘에 바친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하늘이 비록 크다 하더라도 백성이 없으면 어찌 베풀 수가 있으며 비가 비록 기름지다 하더라도 곡식이 없 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 있는 곳의 하늘은 곡식이요 하늘 있는 곳의 마음은 사람이라 하늘과 사람은 일체(一體)인데 하늘이 어찌 백성을 버릴 수 있습니까?
곧 비가 곡식을 적시게 하여 때에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 하였다. 기원을 마치 자 곧 큰 비가 선채로 수 천리에 내렸다.
신유년 42년. 9월에 고목에서 싹이 나고 오색 빛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가 (子村家)에서 났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잘못 알고 봉황이라고 하였다.
을해년 56년. 사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호구를 조사하여 계산하여 보니 모두 1 억 8천만 호구(口)였다.
기묘년 60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대음(代音)이 즉위하였다.
15세 단군 대음(代音 혹은 후흘달(後屹達)) 재위 51년 경진년 원년. 은(殷)나라 주인(主)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구하였 다. 이 해에 80분의1세 제도를 개혁하였다.
신사년 2년. 홍수가 크게 넘쳐 민가가 많이 피해를 입었다. 제왕께서 심히 불 쌍하게 여겨서 조(粟)를 창해 사수(蛇水)의 지역에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구제하셨다. 겨울 10월 양운국(養雲國)과 수밀이국(須密爾國)의 두 국인(國人)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기축년 10년. 제왕께서 약수(弱水)에 서행(西幸)하여 신지 우속(禹粟)에게 명하 - 20 - 단군세기 여 금, 철, 고유(膏油)를 채취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에 우루인(虞婁人) 20가(家)
가 투항해 오므로 명하여 염수(鹽水)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정미년 28년. 제왕께서 태백산에 올라 비를 세우고 열국의 성인(聖)과 임금 (君)과 한(汗)들의 공을 새겼다.
기미년 40년. 황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여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삼 았다.
경오년 51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우가의 위나(尉那)가 즉위하였다.
16세 단군 위나(尉那) 재위 58년
신미년 원년.
무술년 28년. 9환의 여러 한(汗)들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 께 제사하고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배향하였다. 향사하고 5일 동안 백 성과 더불어 큰 연회를 베풀었는데 등을 밝힌 밤을 밝히고 경(經)을 창(唱)하고 뜰을 밟았다. 한쪽은 횃불을 나열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돌아가며 춤을 추고 애 환가(愛桓歌)를 제창하였다. 애환이란 즉 고대의 신의 노래의 일종이다. 선인(先 人)들은 환화에 이름을 붙이지 아니하고 바로 꽃이라고만 불렀다. 애한의 노래 가 있어 전하기를 ‘산유화(山有花)야, 산유화야 지난해에도 수없이 심고 올해에 도 수없이 심네. 불함산에 봄이 오니 꽃은 만홍(萬紅)이라. 천신을 섬기고 태평 을 즐긴다네.’ 라고 하였다.
무신년 5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여을(余乙)이 즉위하였다.
17세 단군 여을(余乙) 재위 68년
기사년 원년.
경신년 52년. 제왕께서 오가와 더불어 나라 안을 역순(歷巡)하시다가 개사성 (蓋斯城)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축가를 바치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선인(仙人)의 나라에서 즐겁게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 습니다. 제왕의 덕은 얼그러짐이 없고 제왕의 도는 치우침이 없으시니 백성들과 이웃들은 수심과 고통을 볼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책화(責禍)하고 은혜로 관경 (管境)하니 성(城)도 나라도 전쟁과 정벌을 겪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맙구나. 고맙구나. 짐의 닦은 덕이 일천하여 백성들 의 여망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구나.” 하셨다.
병자년 6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동엄(冬奄)이 즉위하였다.
18세 단군 동엄(冬奄) 재위 49년 정축년 원년.
병신년 20년. 지백특(支伯特) 사람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을축년 49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구모소(?牟蘇)가 즉위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牟蘇) 재위 55년 병인년 원년.
기축년 24년. 남상인(南常人)이 입조(入朝)하였다.
기미년 54년.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 었다.
경신년 5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우가의 고홀(固忽)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흘(固忽) 재위 43년 신유년 원년.
신미년 11년. 가을에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년 36년. 영고탑을 수축하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경자년 40년. 공공(共工)의 공흘(工忽)이 9환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년 43년. 사해가 아직 평안하지 못한데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소태(蘇 台)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蘇台) 재위 52년
갑진년 원년.
은나라 주인(主) 소을(小乙)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경인년 47년. 은나라 주인 무정(武丁)이 이미 귀방(鬼方)을 이기고 다시 대군 을 이끌고 침공해 왔다. 색도(索度), 영지(令支) 등의 나라가 우리를 위해 대패시 키므로 은이 화의를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임진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高登)이 은밀히 군사로 귀방을 습격하여 멸 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 지역을 공략하여 세력이 매우 강성하였는데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제왕께서 이를 - 22 - 단군세기 윤허하지 않았으나 거듭하여 요청하므로 이에 허락하고 이름을 두막루(豆莫婁)라고 하였다.
을미년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고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이어서 우현왕 이 되었다. 제왕께서 나라 안을 순행하며 사냥하시고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 러 부로(父老)들을 많이 모아서 하늘에 제사하고 가무(歌舞)를 하였다. 그리고 오가를 소집하고 그들과 더불어 왕위 계승을 의논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늙으 면 근면하고자 하나 권태로와 진다. 정치를 서우여(徐于餘)에게 위임하고자 한 다.” 하셨다. 이에 살수(薩水)의 땅 100리를 서우여에게 봉해주고 명하여 섭주 (攝主)로 삼고 이름하여 기수(奇首)라고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 내어 제왕께서 그것을 중지케 하였으나 제왕은 끝내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 왕은 좌우의 엽호(獵戶) 수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 하였다. 제왕도 부득이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 (庶人)으로 하였다. 제왕은 아사달에 숨어서 마침내 생을 마쳤다. 이 해에 백이 (伯夷)와 숙제(叔齊)도 또한 고죽국(孤竹) 임금(君)의 자손으로서 나라를 도망하 여 동해가에 살면서 힘써 밭을 갈아 자급하였다.
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 재위 48년
병신년 원년.
제왕께서 명하여 녹산(鹿山)을 수축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가 을 9월에 친히 장당경에 행차(親幸)하여 고등왕의 묘(廟)를 세우고 제사하였다.
11월에 친히 9환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번 싸워 은나라 수도를 파괴하였다.
이어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파괴하였다. 이듬해 2월에 이들을 강의 상류까지 추격하여 승첩(捷)의 하례를 받았다. 변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 에 이주시켜 그들로 하여금 목축과 농업을 하게 하니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신축년 6년. 신지 육우(陸右)가 진언하기를, “아사달은 천년제업(千年帝業)의 땅으로 이미 대운이 다하였고 영고탑은 왕기(王氣)가 농후하여 백악산(白岳山)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라고 하고 성을 쌓아 그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요청 하였으나 제왕께서 불허하며 말하기를, “새 수도가 이미 자리를 잡았는데 어찌 다시 다른 곳으로 갈 것인가.” 하셨다.
을묘년 20년. 이 때에 남국(藍國)이 자못 강성하여 고죽국의 임금(君)과 더불 어 여러 적들을 몰아내고 남으로 천도하여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은나라 국 경에 가까운 곳에 살았다.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누어 진격하게 하 여 빈기(?岐)를 점거하고 그곳의 유민과 더불어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 (黎)라고 칭하였다. 서융(西戎)과 더불어 은가(銀家)의 여러 제후 사이에 있는 잡 - 23 - 단군세기 처(雜處)였다. 남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 山)의 이남의 땅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년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申督)이 군사로서 병란을 일으키므로 제왕께서 잠시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그를 따랐다.
계미년 4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아흘(阿忽)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홀(阿忽) 재위 76년
갑신년 원년. 명하여 황제의 아우인 고불가(古弗加)에게 낙랑홀(樂浪忽)을 다 스리게 하였다. 웅갈손(熊乫孫)을 보내어 남국의 임금(君)과 함께 남쪽을 정벌하 는 병사를 살피게 하였다. 은나라 지역에 6읍(邑)을 설치하였다. 은나라 사람들 이 서로 싸워 결정을 내리지 못하므로 병력을 보내어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가 을 7월에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명하여 죄수와 포로들을 석방하였 다.
을유년 2년. 남국(藍國)의 임금(君) 금달(今達)이 청구의 임금(君) 및 구려(句 麗)의 임금(君)과 더불어 주개(周愷)에서 회합하였다. 몽고리의 병력과 합하여 이르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城柵)을 부수고 오지까지 깊이 들어가 회대의 땅 을 평정하였다. 포고씨(浦古氏)를 엄(淹)에 영고씨(盈古氏)를 서(徐)에 방고씨(邦 古氏)를 회(淮)에 분봉하였다. 은나라 사람들은 들리는 통문에 지레 겁을 먹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년 5년. 두 한(韓)과 오가(五加)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기는 일에 대한 논의를 중지하였다.
기해년 76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연나(延那)가 즉위 하였다.
24세 단군 연나(延那) 재위 11년
경자년 원년. 명하여 황제의 숙부인 고불가가 섭정하게 하였다.
신축년 2년. 여러 한(汗)들은 조서를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하였 다. 나라에 큰일이 있거나 재앙이 있을 때마다 그곳에 기원하여 백성의 뜻이 하 나로 정해지게 하였다.
경술년 11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솔나(率那)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나(率那) 재위 88년
신해년 원년.
정해년 37년.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거주하면서 인사(人事)를 사절 하였다.
정유년 47년. 제왕께서 상소도(上蘇塗)에 계시면서 옛 예법을 강론하시고 이어 영신(?臣)과 직신(直臣)의 구분법을 물으셨다. 삼랑(三郞) 홍운성(洪雲性)이 나 아가 대답하여 아뢰기를,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이요, 위세를 두려 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이옵니다. 임금은 원천이요 신하는 유천이니 원 천이 이미 탁한데 유천이 맑기를 바라는 것이 불가한 것처럼 고로 임금이 성스 럽게 된 이후에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왕께서 “훌륭한 것 같 다.” 하셨다.
기유년 59년. 농사가 풍년이 들어 줄기 하나에 이삭이 5개나 되는 조(粟)가 있 었다.
무인년 8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추로(鄒魯)가 즉위하였다.
26세 단군 추로(鄒魯) 재위 65년
기묘년 원년. 가을 7월에 백악산 계곡에 흰 사슴 200마리가 무리를 지어 와서 놀았다.
계미년 6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두밀(豆密)이 즉위하였다.
27세 단군 두밀(豆密) 재위 26년
갑신년 원년. 천해(天海)의 물이 넘쳐서 사아란산(斯阿蘭山)이 무너졌다. 이 해 에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묘년 8년. 큰 가뭄 끝에 많은 비가 쏟아져 하류의 백성들은 수확이 없으므 로 제왕께서 명하여 창고를 열어 두루 나누어 주게 하였다.
기유년 26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해모(奚牟)가 즉위하였다.
28세 단군 해모(奚牟) 재위 28년
경술년 원년. 제왕께서 병이 있어 백의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에 축원하 도록 하였더니 곧 병이 나았다.
경신년 11년. 여름 4월에 회오리바람(旋風)이 크게 일고 폭우가 쏟아지니 땅 위에 어류가 어지럽게 떨어졌다.
정묘년 18년. 빙해(氷海)의 여러 한(汗)들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정축년 2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마휴(摩休)가 즉위하였다.
29세 단군 마휴(摩休) 재위 34년
무인년 원년. 주(周)나라 사람이 조공을 바쳤다.
을유년 8년. 여름에 지진이 있었다.
병술년 9년. 남해의 조수가 3자(尺)나 물러났다.
신해년 34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내휴(奈休)가 즉위하였다.
30세 단군 내휴(奈休) 재위 35년
임자년 원년. 제왕께서 남쪽으로 순행하여 청구(靑邱)의 정사를 살핀 후에 돌 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분조(分朝)의 여러 한(汗)들을 모아 병사를 사열하고 하늘에 제사하였다. 주나라 사람과 수호 (修好)하였다.
병진년 5년. 흉노(凶奴)가 공물을 바쳤다.
병술년 3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등올(登?)이 즉위하였다.
31세 단군 등올(登?) 재위 25년
정해년 원년.
임인년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上苑)에서 놀았다.
신해년 2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아들 추밀(鄒密)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임자년 원년.
갑인년 3년. 선비산(鮮卑山)의 추장(酋長) 문고(們古)가 조공을 바쳤다.
계해년 12년. 초(楚)나라의 대부(大夫) 이문기(李文起)가 입조하였다.
갑자년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병인년 15년.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신사년 43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감물(甘勿)이 즉위하였다.
단군세기 33세 단군 감물(甘勿) 재위 24년
임오년 원년.
계미년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
무자년 7년.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밑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 히 제사하였다. 서고문(誓告文)이 있어 이르기를, “삼성의 존귀하심은 신과 더불 어 그 공이 나란하고 삼신의 덕은 삼성으로 인하여 더욱 커집니다. 허(虛)와 조 (粗)는 한 몸이요 개체(個)와 전체(全)는 하나와 같으며 지혜(智)와 삶(生)을 같 이 닦고 형체(形)와 혼(魂)을 함께 넓힙니다. 진실한 가르침은 이렇게 세워지고 믿음은 오래되면 저절로 밝아지고 이러한 세력이 상승함으로서 존귀함은 회복되 고 빛납니다. 가파른 저 백악은 만고로부터 한결같이 푸르고 열성(列聖)은 계승 되고 문(文)은 만들어지고 예악(禮樂)은 흥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규모가 이처럼 크니 도술(道術)은 연못처럼 넓습니다. 하나를 잡으면 셋이 들어와 있고 셋을 모 으면 하나로 돌아가니 하늘의 규범(天戒)을 널리 강연하시어 영세(永世)의 법이 되게 하소서.” 하셨다.
을사년 24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오루문(奧婁門)이 즉위하였다.
34세 단군 오루문(奧婁門) 재위 23년
병오년 원년.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으므로 만 백성이 기쁘고 평안하여 도리가를 지어 불렀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는 아침 해가 있어 밝은 빛을 환하게 비추고 나라에는 성인이 있어 덕 의 교화를 널리 입히네. 대읍국(大邑國) 우리 배달성조(倍達聖朝) 많고 많은 사 람들이 가혹한 정치를 못 보았네. 밝고 밝은 노래 소리 오래토록 태평일세.’ 을묘년 10년.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니 누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였다.
무진년 23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사벌(沙伐)이 즉위하였다.
35세 단군 사벌(沙伐) 재위 68년
기사년 원년.
갑술년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큰 홍수가 있었다.
임오년 14년. 호랑이가 궁전에 들어왔다.
임진년 24년. 큰 물이 나서 산이 붕괴되고 골짜기가 메워졌다.
무오년 50년. 제왕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파견하여 평해(平海) 위의 - 27 - 단군세기 웅족(熊)을 습격하였다.
갑술년 66년. 제왕께서 조을(祖乙)을 파견하여 곧바로 연(燕)나라의 수도를 돌 파하고 제(齊)나라 병사와 함께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첩(捷)을 고 하였다.
병자년 6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매륵(買勒)이 즉위하였다.
36세 단군 매륵(買勒) 재위 58년
정축년 원년.
갑진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신년 32년. 서촌의 민가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년 35년. 용마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 별문자(星文)가 있었다.
갑인년 38년. 협야후(陜野侯) 배반(裵?)을 파견하여 가서 해상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12월에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년 52년. 제왕께서 병력을 보내어 수유(須臾)의 병사와 함께 연나라를 정 벌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므로 제나라 사람들이 대 거 고죽국(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에 만나 싸움이 불리해지므로 화 해를 구걸하고는 돌아갔다.
갑술년 5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마물(麻勿)이 즉위하였다.
37세 단군 마물(麻勿) 재위 56년
을해년 원년.
경오년 56년. 제왕께서 남쪽을 순행하시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붕서하셨다.
태자 다물(多勿)이 즉위하였다.
38세 단군 다물(多勿) 재위 45년 신미년 원년.
을묘년 4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두홀(豆忽)이 즉위하였다 39세 단군 두홀(豆忽) 재위 36년 병진년 원년.
신묘년 36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달음(達音)이 즉위하였다.
40세 단군 달음(達音) 재위 18년
임진년 원년.
기유년 1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음차(音次)가 즉위하였다.
41세 단군 음차(音次) 재위 20년
경술년 원년.
기사년 20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42세 단군 을우지(乙于支) 재위 10년
경오년 원년.
기묘년 10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물리(勿理)가 즉위하였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년 원년.
을묘년 36년. 융안(隆安)의 엽호(獵戶) 우화충(于和?)이 스스로 장군을 칭하며 무리 수 만 명을 이끌고 서북 36군(郡)을 함락하였다. 제왕께서 병력을 파견하였 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에 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습하였다. 제왕께서는 좌우의 궁인(宮人)과 함께 묘사(廟社)의 신주(主)를 받들고 배를 띄워 해두(海 頭)로 가시더니 곧 붕서하셨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 욕살 구물(丘物)이 어명 을 받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였다. 9지(九地)의 군사들이 그를 따르고 동서압록의 18성이 모두 병사를 보내어와 원조하였다.
44세 단군 구물(丘物) 재위 29년
병진년 원년. 3월에 큰 물이 도성을 휩쓸었다. 적들은 크게 어지러움에 빠졌 다. 구물이 병사 1만명을 이끌고 가서 적을 토벌하니 적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졌다. 우화충을 참수하였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에게 추대되어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하고 이어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 - 29 - 단군세기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고치고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하였다. 이후로 삼 조선은 단군을 일존(一尊)으로 받들어 모시는 임리(臨理)의 제도를 유지하였으나 화전(和戰)의 권한은 일존에게 있지만은 않았다. 7월에 명하여 해성(海城)을 개 축하여 평양(平壤)으로 하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정사년 2년. 예관(禮官)이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행할 것을 청하니 곧 3월 16일이었다. 제왕께서 친히 행차하여 경배하였는데 첫 번째 절에서는 세 번 고 두하고 두 번째 절에서는 여섯 번 고두하고 그리고 세 번째 절에서는 아홉 번 고두하는 예법이었다. 따르는 무리들은 특별히 열 번을 고두하였는데 이것을 삼 육대례(三六大禮)라고 한다.
임신년 17년. 주와 군에 감찰관을 파견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살피게 하고 효 도하는 사람과 청렴한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년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신정(正)을 축하하였다.
갑신년 29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여루(余婁)가 즉위하였다.
45세 단군 여루(余婁) 재위 55년
을유년 원년. 장령(長嶺)과 낭산(狼山)에 성을 쌓았다.
신축년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방의 군(郡)에 침입하므로 수장(守將) 묘장춘(苗 長春)이 이를 쳐부수었다.
병진년 32년. 연나라 사람이 배도(倍道)하여 쳐들어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 키고 운장(雲障)을 위협하였다. 번조선(番朝鮮)이 명하여 상장군 우문언(于文言)이 이를 막게 하였다. 진(眞)과 막(莫) 두 조선(朝鮮)도 역시 병사를 보내어 도우 러 왔다. 미리 복병을 두었다가 연나라와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공격하여 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모두 회복하였다.
정사년 33년. 연나라 사람이 패하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면서 배를 만들 어 장차 습격하려 하므로 우문언이 추격하여 크게 부수고 그 장수를 사살하였 다.
신미년 47년. 북막(北漠)의 추장 액니차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와서 말 200필 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하였다. 번조선의 소장(少將) 신불사(申不 私)가 병사 1만명을 이끌고 연나라 상곡(上谷)을 함께 공격하여 그것을 빼앗고 성읍(城邑)을 설치하였다.
무인년 54년. 상곡에서의 공사(役)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공해 오더니 이때 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다시 조양(造陽)으로 서쪽 경계를 삼았다.
기묘년 55년.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드니 죄 없이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가 생각하여 크게 사면하고 친히 나가서 비를 빌었다. 9월에 제왕께서 붕하 시고 태자 보을(普乙)이 즉위하였다.
46세 단군 보을(普乙) 재위 46년
경진년 원년. 12월에 번조선의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에서 보낸 자객의 해를 입으니 오가들이 다투어 일어났다.
무술년 19년. 정월에 읍차(邑借) 기후(箕?)가 병력으로 입궁하여 스스로 번조 선의 왕이 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할 것을 청하였다. 제왕께서 이를 허락하시 고 연나라를 굳게 방비토록 하였다.
정사년 38년. 도성(都城)이 큰 불에 타버리므로 제왕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나아갔다.
계해년 44년. 북막의 추장 니사(尼舍)가 음악을 바치므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후한 상을 내렸다.
을축년 46년. 한개(韓介)가 수유의 병사를 이끌고 궁궐에 침범하여 스스로 왕 이 되려하므로 상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제왕께 서 환도한 후에 대사면하였다.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미약해져서 국고가 늘어나지 않았다.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대를 이을 자식이 없으므로 고열가가 단 군 물리(勿理)의 현손으로 무리들의 사랑으로 추대되고 또 공이 있으므로 마침 내 즉위하였다.
47세 단군 고열가(高列加) 재위 58년
병인년 원년.
기묘년 14년. 단군왕검의 묘사(廟)를 백악산에 세우고 명하여 유사(有司)가 그 곳에 사시사철에 제사하게 하고 제왕께서 1년에 한 번 친히 제사하였다.
기유년 44년.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였다.
계축년 48년. 10월 1일에 일식이 있었다. 이 해 겨울에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 (阿里當夫)가 군사(軍師)를 출정시켜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제왕께서 따르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며 조공하지 않았다.
임술년 57년. 4월 8일에 해모수(角+羊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 내려와서 병사 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離國) 사람이었다.
계해년 58년. 제왕께서는 어질고 여리고 결단력이 없으므로 명령을 내려도 시 - 31 - 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다.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화란(禍亂)을 자주 일으키 므로 나라의 재물은 늘지 않고 백성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져 갔다. 3월에 하늘 에 제사하고 그날 저녁에 오가와 더불어 의논하고 말하기를, “옛날 우리 열성(列聖)께서는 조극수통(肇極垂統)하시어 덕을 넓고 멀리까지 심어 영세의 법이 되었으나 지금은 왕도는 쇠약하고 여러 한(汗)들이 강함을 다 투게 되었다. 오직 짐이 덕이 적고 나약하고 능히 다스리지 못하고 초대하여 위 로할(招撫) 방책이 없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있다. 오직 그대 오가들이 현자를 택 하여 천거하도록 하라. 옥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포로들을 놓아 보 내라.” 하셨다. 이튿날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여 신선에 올랐다. 이에 오가들이 함께 국사를 6년 동안 다스렸다.
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은밀히 수유(須臾)와 더불어 약속하고 옛 도 읍지(古都)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거하고 천왕랑(天王郞)이라고 칭하였다. 4경계 내의 모든 사람들이 명령을 받들었다. 여러 장군을 봉하고 수유후(須臾侯) 기비 (箕丕)를 승격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가서 상하의 운장(雲障)을 지키도록 하였 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었고 고구려 이곳은 해모수가 태어난 고향이다. 고로 고구려라고 칭하였다.
단군기원 원년 무진년부터 금상(今上) 즉위 후 12년 계묘년 까지 약 3,616년이 었다. 이해 10월 3일 홍행촌수(紅杏村?)가 강도(江都)의 해운당(海雲堂)에서 쓰 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환단고기 (신교출판사, 김호영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