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본문 + 배송지(裵松之) 주석 완역. 한문 원문과 번역 1:1 대역, 역주 포함. 연구용 참고본으로 출간서적과 대조 바랍니다.



예전(濊傳)

1. 동예의 지리, 조선 유민과 고유 풍속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戶二萬。昔箕子既適朝鮮,作八條之教以教之,無門戶之閉而民不為盜。其後四十餘世,朝鮮侯(淮)〔準〕僭號稱王。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燕人衛滿,魋結夷服,復來王之。漢武帝伐滅朝鮮,分其地為四郡。自是之後,胡漢稍別。無大君長,自漢已來,其官有侯邑君、三老,統主下戶。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其人性愿愨,少嗜欲,有廉恥,不請(句麗)〔匄〕。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衣服有異。男女衣皆著曲領,男子擊銀花廣數寸以為飾。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自領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為民。後省都尉,封其渠帥為侯,今不耐濊皆其種也。漢末更屬句麗。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分,不得妄相涉入。同姓不婚。多忌諱,疾病死亡輒損棄舊宅,更作新居。有麻布,蠶桑作綿。曉候星宿,豫知年歲豐約。不以誅玉為寶。常用十月節祭天,晝夜飲酒歌舞,名之為舞天,又祭虎以為神。其邑落相侵犯,輒相罰責生口牛馬,名之為責禍。殺人者償死。少寇盜。作矛長三丈,或數人共持之,能步戰。樂浪檀弓出其地。其海出班魚皮,土地饒文豹,又出果下馬,漢桓時獻之。〔一〕

【번역】 예(濊)는 남쪽으로 진한(辰韓),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동해)에 다다른다. 지금의 조선(낙랑) 동쪽 지역이 모두 그 땅이다. 호수는 2만 호이다.

옛날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건너가 8조의 가르침을 만들어 백성을 교화하니, 문을 닫아걸지 않아도 백성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후 40여 세가 지나 조선후 준(準)이 참람하게 왕을 칭했다.

진승(陳勝) 등이 봉기하여 천하가 진(秦)나라를 배반하자, 연·제·조나라의 백성 수만 명이 난리를 피해 조선 땅으로 망명해왔다.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옷을 입고 들어와 다시 왕이 되었다.

한 무제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두었다. 이때부터 오랑캐와 한나라 백성이 점차 구별되었다.

【역주: 기자·준왕·위만 서사와 ‘호한호별(胡漢稍別)’】

  1. 기자 8조교(八條之敎)와 ’40여 세’의 서사:
    • “기자→40여 세→준(準) 참호칭왕→진승기병 전후 연제조 망명 수만 구→위만(추계이복) 내왕”이라는 도식은, 진수가 한서 조선전을 요약해 예(濊)의 내력을 설명한 것입니다. ’문호를 닫지 않아도 도둑이 없다’는 8조교 찬미는 중원 유자의 이상화된 회고이므로, 사실 여부는 『한서』·『사기』 등 인접 사료와 엄밀히 대조해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2. 4군 설치와 ‘호한이 점차 갈라짐’:
    • 무제 원봉 2~3년(기원전 109~108) 위만조선 멸망 뒤 낙랑·진번·임둔·현도 4군 설치를 계기로 “오랑캐(濊)와 한(漢) 백성이 구별”되었다는 것은, 군현이 토착민과 이주 한인을 호적(名籍)·현(縣) 체제로 갈라 다스리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다음 문장의 “단단대산령 서쪽은 낙랑, 영동 7현은 동부도위가 주관, 뒤에 도위 폐지하고 현후(縣侯)로 봉함”이 그 행정 변천입니다.

동예에는 나라를 통솔하는 대군장이 없으며, 한나라 이래로 관직에 후(侯), 읍군(邑君), 삼로(三老)가 있어 하호 백성들을 통솔하고 다스린다. 그곳의 노인들은 예로부터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전한다.

사람들의 성품은 온순하고 정직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구걸하지 않는다. 언어와 법도,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동일하지만 의복에 차이가 있다. 남녀 모두 곡령(曲領: 둥근 깃)의 옷을 입으며 남자는 너비 수 치 되는 은으로 만든 꽃 모양 장식(銀花)을 가슴에 달아 꾸민다.

단단대산령 서쪽은 낙랑군에 속하고 영동 7현은 동부도위가 주관하였는데 모두 예족 백성들로 구성되었다. 뒤에 도위를 폐지하고 그 족장들을 현후(縣侯)로 봉하였으니 지금의 불내예(不耐濊)가 모두 그 종족이다. 한나라 말기에 다시 고구려에 예속되었다.

그 풍속은 산과 내를 몹시 소중히 여겨, 산과 내마다 각 부락의 경계 구역이 정해져 있어 함부로 남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동성불혼).

꺼리고 꺼리는 금기(금기)가 많아 질병이 돌거나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옛집을 버리고 헐어버린 뒤 새집을 짓고 산다.

마포(삼베)를 짤 줄 알고 누에를 쳐서 비단솜을 만든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여 한 해 농사의 풍흉을 미리 예견할 줄 안다. 진주와 옥을 보물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부른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 지낸다.

부락들끼리 서로 영역을 침범하면 번번이 벌로 노비와 소, 말을 바쳐 변상하게 하니 이를 ’책화(責禍)’라 부른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으로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자가 적다.

길이가 석 장(三丈)이나 되는 긴 창을 만드는데,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 다루며 보병 전투에 능하다. 낙랑단궁(樂浪檀弓: 박달나무 활)이 이 땅에서 산출된다.

바다에서는 얼룩무늬 물범 가죽(반어피)이 생산되고 땅에는 표범(문표)이 많으며, 또 과하마(果下馬: 키가 작아 과수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조랑말)가 산출되는데 한 환제 때 바쳤다.

【역주: 동예(東濊)의 사회 질서와 특산물 3총사】

  1. 무천(舞天)과 10월 추수 제천의식:

    • 매년 10월 농경을 마친 후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며 하늘과 호랑이 신(虎神)에게 제사를 지낸 의식으로, 오늘날 추석과 수확제의 원형입니다. 호랑이를 신으로 숭배한 것은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 생태계 속에서 맹수로부터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던 고대 토테미즘 신앙을 보여줍니다.
  2. 책화(責禍)와 족외혼(同姓不婚)의 엄격한 사회 규범:

    • 책화: 읍락 간에 산과 하천으로 뚜렷한 경계선을 긋고, 이를 침범하면 노비(생구), 소, 말로 엄하게 배상하게 한 제도로, 사유재산과 배타적 영역권이 성립했음을 보여줍니다.

    • 동성불혼: 같은 혈족 간의 혼인을 금지한 족외혼 풍속으로, 씨족 질서의 순결성을 지키고 유전적 결함을 피하려 했던 고대인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3. 동예의 명품 특산물 3총사 (단궁·과하마·반어피):

    • 낙랑단궁(樂浪檀弓): 박달나무로 만든 강하고 탄력 있는 활로, 고구려의 맥궁과 함께 중국에 널리 알려진 명궁입니다.

    • 과하마(果下馬): 키가 3척(약 90cm)에 불과하여 과수나무 가지 밑을 타고 다닐 수 있었다는 조랑말로, 오늘날 천연기념물 제주마(조랑말)의 조상 계통으로 추정됩니다.

    • 반어피(班魚皮): 동해안에서 잡히는 점박이물범(바다표범)이나 바다사자의 가죽으로, 무늬가 아름답고 질겨 고급 장식재로 중원에 수출되었습니다.

2. 과하마에 대한 주석 (배송지 주석)

〔一〕 臣松之按:果下馬高三尺,乘之可于果樹下行,故謂之果下。見博物志、魏都賦。

【번역】 신 배송지(裵松之)가 살펴보건대, 과하마(果下馬)는 키가 석 자(三尺)에 불과하여 그 말을 타면 과일나무 가지 아래로 지나갈 수 있으므로 ’과하마’라 부른다. 이는 『박물지(博物志)』와 『위도부(魏都賦)』에 상세히 실려 있다.

3. 관구검 원정과 불내예왕 책봉

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興師伐之,不耐侯等舉邑降。其八年,詣闕朝貢,詔更拜不耐濊王。居處雜在民間,四時詣郡朝謁。二郡有軍征賦調,供給役使,遇之如民。

【번역】 정시 6년(서기 245년),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은 영동(嶺東)의 동예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음을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이에 불내후(不耐侯) 등이 온 읍락을 이끌고 항복했다.

정시 8년(서기 247년), 불내후가 낙양의 대궐로 나아가 조공을 바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책봉하였다.

그들은 평소 일반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사계절마다 군의 관아에 나아가 조알(朝謁)한다. 낙랑·대방 두 군에서 군사 동원이나 세금 징발이 있을 때마다 노역과 군역을 공급하니 위나라 군현에서는 그들을 마치 일반 백성처럼 대우한다.

【역주: 불내예왕(不耐濊王) 책봉과 위(魏)·고구려 사이의 동예】

  1. 불내성(不耐城)과 영동 7현의 역사적 의미:
    • 불내성은 오늘날의 강원도 안변(또는 강릉) 방면으로 추정됩니다.
    • 기원전 108년 한사군 설치 시 낙랑군에 속했으나, 험준한 태백산맥(단단대령)으로 가로막혀 통치가 어렵자 한나라는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고 토착 족장들을 현후(縣侯)로 봉하여 간접 통치했습니다.
  2. 위나라와 고구려의 쟁탈전:
    • 후한 말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동예는 고구려의 지배 하에 들어갔으나, 244년 관구검의 고구려 원정 때 낙랑·대방 태수가 동예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 위나라는 족장인 불내후를 ‘불내예왕’으로 격상 책봉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완충 세력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왕이라 불리면서도 일반 백성 틈에 살며 군현에 노역과 조세를 바쳐야 했던 기록은, 동예가 고대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주변 강대국(고구려, 조위, 훗날 신라)의 군사적 각축장으로 흡수되어 간 비운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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