鮮卑〔一〕步度根既立,眾稍衰弱,中兄扶羅韓亦別擁眾數萬為大人。建安中,太祖定幽州,步度根與軻比能等因烏丸校尉閻柔上貢獻。後代郡烏丸能臣氐等叛,求屬扶羅韓,扶羅韓將萬餘騎迎之。到桑乾,氏等議,以為扶羅韓部威禁寬緩,恐不見濟,更遣人呼軻比能。比能即將萬餘騎到,當共盟誓。比能便於會上殺扶羅韓,扶羅韓子泄歸泥及部眾悉屬比能。比能自以殺歸泥父,特又善遇之。步度根由是怨比能。文帝踐阼,田豫為烏丸校尉,持節并護鮮卑,屯昌平。步度根遣使獻馬,帝拜為王。後數與軻比能更相攻擊,步度根部眾稍寡弱,將其眾萬餘落保太原、鴈門郡。步度根乃使人招呼泄歸泥曰:「汝父為比能所殺,不念報仇,反屬怨家。今雖厚待汝,是欲殺汝計也。不如還我,我與汝是骨肉至親,豈與仇等?」由是歸泥將其部落逃歸步度根,比能追之弗及。至黃初五年,步度根詣闕貢獻,厚加賞賜,是後一心守邊,不為寇害,而軻比能眾遂彊盛。明帝即位,務欲綏和戎狄,以息征伐,羈縻兩部而已。至青龍元年,比能誘步度根深結和親,於是步度根將泄歸泥及部眾悉保比能,寇鈔并州,殺略吏民。帝遣驍騎將軍秦朗征之,歸泥叛比能,將其部眾降,拜歸義王,賜幢麾、曲蓋、鼓吹,居并州如故。步度根為比能所殺。
【번역】 선비(鮮卑)의 보도근(步度根)이 대인으로 선 뒤에 무리가 점차 쇠약해졌는데, 그의 둘째 형 부라한(扶羅韓) 또한 따로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려 대인이 되었다.
건안(建安) 연간에 조조(太祖)가 유주(幽州)를 평정하자, 보도근과 가비능(軻比能) 등은 오환교위 염유(閻柔)를 통해 조조에게 공물을 바쳤다. 그 후 대군(代郡)의 오환 수령 능신저(能臣氐) 등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부라한에게 귀속하기를 청하자, 부라한이 1만여 기를 이끌고 그들을 맞이하러 상간(桑乾)에 이르렀다. 능신저 등이 의논하기를, “부라한 부락은 위엄과 규율이 느슨하여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할까 두렵다” 하고는 몰래 사람을 보내 가비능을 불렀다.
가비능이 곧 1만여 기를 이끌고 도착하여 마땅히 함께 동맹을 맹세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비능은 회맹 자리에서 부라한을 전격 살해하였고, 부라한의 아들 설귀니(泄歸泥)와 그 휘하 부락 무리는 모두 가비능에게 예속되었다. 가비능은 자신이 설귀니의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도리어 그를 극진히 우대하였다. 보도근은 이 일로 말미암아 가비능을 깊이 원망하게 되었다.
위 문제(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전예(田豫)를 오환교위로 삼아 사절을 지니고 선비족까지 아울러 감독하게 하여 창평(昌平)에 주둔시켰다. 보도근이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니 황제는 그를 왕으로 책봉했다.
그 후 보도근은 가비능과 자주 서로 공격하였는데, 보도근의 부락 무리가 점차 줄어들고 쇠약해지자 무리 1만여 가구를 이끌고 태원(太原)과 안문(鴈門) 두 군으로 들어와 몸을 의탁했다. 보도근이 사람을 보내 설귀니를 달래며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가비능에게 살해당했는데도 원수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수 밑에 속해 있느냐? 지금 비록 그가 너를 후대하고 있으나 이는 너를 방심하게 만들어 죽이려는 계책일 뿐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것만 못하니, 나와 너는 뼈와 살을 나눈 지친(至親)인데 어찌 원수와 같겠는가!”
이에 설귀니가 자기 부락을 이끌고 도망쳐 보도근에게 귀순하였고, 가비능이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했다.
황초(黃初) 5년(서기 224년), 보도근이 대궐에 나아가 공물을 바치자 황제가 후하게 상을 내렸다. 그 후 보도근은 일심으로 변방 요새를 지키며 중국을 침범하지 않았으나, 가비능의 군세는 더욱 강성해졌다.
명제(조예)가 즉위한 후 이민족들을 어루만져 전쟁을 쉬게 하고 두 부족을 적절히 기미(羈縻)하여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청룡(靑龍) 원년(서기 233년), 가비능이 보도근을 꾀어 깊이 혼인 동맹을 맺자, 보도근은 설귀니와 부락 무리를 모두 이끌고 가비능에게 합세하여 병주(并州)를 침략하고 관리와 백성들을 살육·약탈했다.
명제가 효기장군(驍騎將軍) 진랑(秦朗)을 파견하여 토벌하게 하자, 설귀니가 가비능을 배반하고 자기 부락을 이끌고 위나라에 항복했다. 이에 설귀니를 ’귀의왕(歸義王)’에 봉하고 당휘(幢麾)와 곡개(曲蓋), 고취(鼓吹)를 하사하여 예전처럼 병주에 살게 하였다. 한편 보도근은 결국 가비능에게 살해당했다.
【역주: 보도근·부라한·가비능의 삼각관계와 위의 기미책】
- 형제 분립에서 부자(父子) 살해의 복수극으로:
- 보도근(막내)-부라한(둘째형)의 분립, 상간(桑乾) 회맹에서의 부라한 피살, 아들 설귀니의 가비능 예속→보도근 “골육지친” 호소로 탈출→황초 5년(224) 입조 하사→청룡 원년(233) 혼인동맹으로 재결합→진랑 토벌에 설귀니가 다시 배반하고 보도근은 피살,이라는 20년 추이는, 선비에 단일 왕권이 없고 대인(大人)간 이합집산이 본질임을 보여줍니다.
- 염유(閻柔)→전예(田豫)로 이어지는 감독 체제:
- 건안 연간 염유(오환교위, 한나라 사절 지님, 광녕 주둔)에서 문제 때 전예(오환교위, 사절 지니고 선비까지 아울러 감독, 창평 주둔)로 이어지는 것은, 위가 선비를 요새 안(태원·안문)으로 끌어들여(保塞內附) 왕(王)·귀의왕으로 책봉하며 분할 통치한 기미(羈縻)책입니다. 명제 때 “무욕수와화융적, 기미양부이이(務欲綏和戎狄, 羈縻兩部)”라는 서술이 이를 자인합니다.
- 당휘·곡개·고취 하사의 격:
- 설귀니에게 준 당휘(幢麾, 깃발)·곡개(曲蓋, 굽은 일산)·고취(鼓吹, 군악대)는 번왕 책봉 의장의 일종으로, 오환 선우에게 준 안거·화개 세트(오환전 §3 역주 참조)보다 한 등급 아래의 귀순왕(歸義王) 예우입니다.
〔一〕 魏書曰:鮮卑亦東胡之餘也,別保鮮卑山,因號焉。其言語習俗與烏丸同。其地東接遼水,西當西城。常以季春大會,作樂水上,嫁女娶婦,髡頭飲宴。其獸異於中國者,野馬、羱羊、端牛。端牛角為弓,世謂之角端者也。又有貂、豽、鼲子,皮毛柔蠕,故天下以為名裘。鮮卑自為冒頓所破,遠竄遼東塞外,不與餘國爭衡,未有名通於漢,而(由)自與烏丸相接。至光武時,南北單于更相攻伐,匈奴損耗,而鮮卑遂盛。建武三十年,鮮卑大人於仇賁率種人詣闕朝貢,封於仇賁為王。永平中,祭肜為遼東太守,誘賂鮮卑,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於是鮮卑自燉煌、酒泉以東邑落大人,皆詣遼東受賞賜,青、徐二人州給錢,歲二億七千萬以為常。和帝時,鮮卑大都護校尉廆帥部眾從烏丸校尉任尚擊叛者,封校尉廆為率眾王。殤帝延平中,鮮卑乃東入塞,殺漁陽太守張顯。安帝時,鮮卑大人燕荔陽入朝,漢賜鮮卑王印綬,赤車參駕,止烏丸校尉所治甯下。通胡市,築南北兩部質宮,受邑落質者〔百〕二十部。是後或反或降,或與匈奴、烏丸相攻擊。安帝末,發緣邊步騎二萬餘人,屯列衝要。後鮮卑八九千騎穿代郡及馬城塞入害長吏,漢遣度遼將軍鄧遵、中郎將馬續出塞追破之。鮮卑大人烏倫、其至鞬等七千餘人詣遵降,封烏倫為王,其至鞬為侯,賜采帛。遵去後,其至鞬復反,圍烏丸校尉於馬城,度遼將軍耿夔及幽州刺史救解之。其至鞬遂盛,控弦數萬騎,數道入塞,趣五原(寧貊)〔曼柏〕,攻匈奴南單于,殺左奧鞬日逐王。順帝時,復入塞,殺代郡太守。漢遣黎陽營兵屯中山,緣邊郡兵屯塞下,調五營弩帥令教戰射,南單于將步騎萬餘人助漢擊卻之。後烏丸校尉耿曄將率眾王出塞擊鮮卑,多斬首虜,於是鮮卑三萬餘落,詣遼東降。匈奴及北單于遁逃後,餘種十餘萬落,詣遼東雜處,皆自號鮮卑兵。投鹿侯從匈奴軍三年,其妻在家,有子。投鹿侯歸,怪欲殺之。妻言:「嘗晝行聞雷震,仰天視而電入其口,因吞之,遂妊身,十月而產,此子必有奇異,且長之。」投鹿侯固不信。妻乃語家,令收養焉,號檀石槐,長大勇健,智略絕眾。年十四五,異部大人卜賁邑鈔取其外家牛羊,檀石槐策騎追擊,所向無前,悉還得所亡。由是部落畏服,施法禁,〔平〕曲直,莫敢犯者,遂推以為大人。檀石槐既立,乃為庭於高柳北三百餘里彈汗山啜仇水上,東西部大人皆歸焉。兵馬甚盛,南鈔漢邊,北拒丁令,東卻夫餘,西擊烏孫,盡據匈奴故地,東西萬二千餘里,南北七千餘里,罔羅山川、水澤、鹽池甚廣。漢患之,桓帝時使匈奴中郎將張奐征之,不克。乃更遣使者齎印綬,即封檀石槐為王,欲與和親。檀石槐拒不肯受,寇鈔滋甚。乃分其地為中東西三部。從右北平以東至遼,(遼)〔東〕接夫餘、〔濊〕貊為東部,二十餘邑,其大人曰彌加、闕機、素利、槐頭。從右北平以西至上谷為中部,十餘邑,其大人曰柯最、闕居、慕容等,為大帥。從上谷以西至燉煌,西接烏孫為西部,二十餘邑,其大人曰置鞬落羅、日律推演、宴荔游等,皆為大帥,而制屬檀石槐。至靈帝時,大鈔略幽、并二州。緣邊諸郡,無歲不被其毒。(嘉)〔熹〕平六年,遣護烏丸校尉夏育,破鮮卑中郎將田晏,匈奴中郎將臧旻與南單于出鴈門塞,三道並進,徑二千餘里征之。檀石槐帥部眾逆擊,旻等敗走,兵馬還者什一而己。鮮卑眾日多,田畜射獵,不足給食。後檀石槐乃案行烏侯秦水,廣袤數百里,停不流,中有魚而不能得。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徙置烏侯秦水上,使捕魚以助糧。至于今,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檀石槐年四十五死,子和連代立。和連材力不及父,而貪淫,斷法不平,眾叛者半。靈帝末年數為寇鈔,攻北地,北地庶人善弩射者射中和連,和連即死。其子騫曼小,兄子魁頭代立。魁頭既立後,騫曼長大,與魁頭爭國,眾遂離散。魁頭死,弟步度根代立。自檀石槐死後,諸大人遂世相襲也。
【번역】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선비(鮮卑) 역시 동호(東胡)의 남은 후예이다. 따로 선비산(鮮卑山)으로 들어가 의지하였으므로 산 이름을 따서 족명으로 삼았다. 그들의 언어와 풍속은 오환과 동일하다. 그 땅은 동쪽으로 요수(遼水)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서역 서성(西城)에 닿는다.
해마다 늦봄(季春)이 되면 큰 모임을 열어 물가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딸을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맞아들이며 머리를 깎고 음주와 연회를 즐긴다. 그 땅의 짐승 중 중국과 다른 것으로는 야생말(野馬), 큰뿔양(羱羊), 단우(端牛)가 있다. 단우의 뿔로 활을 만드는데 세상에서 이른바 각단(角端)이라 부르는 활이다. 또 담비(貂), 나(豽), 쥐(鼲子) 등이 있는데 털이 몹시 부드러워 천하에서 명품 모피 코트(裘)로 귀하게 여긴다.
선비는 옛적에 흉노 묵돌선우에게 격파된 후 요동 요새 밖으로 멀리 달아나 숨어 살며 다른 나라와 세력을 다투지 못했으므로 일찍이 한나라에 이름이 통하지 않았고, 오환과 서로 인접해 있을 뿐이었다.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가 남북 선우로 나뉘어 서로 공격하여 소모되자 선비가 비로소 번성하기 시작했다.
건무 30년(서기 54년), 선비 대인 어구분(於仇賁)이 부족민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조공하니 그를 왕으로 봉했다. 영평 연간에는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선비를 회유하고 뇌물을 주어 반란을 일으킨 오환 흠지분 등의 목을 베어 바치게 했다. 이에 돈황과 주천 동쪽의 선비 부락 대인들이 모두 요동에 와서 상을 받아갔는데, 청주와 서주 두 주에서 거둔 세금 중 해마다 2억 7천만 전을 이들에게 주는 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안제(安帝) 때 선비 대인 연여양(燕荔陽)이 입조하자 선비왕의 인수와 붉은 수레를 주고 오환교위가 다스리는 영현 아래에 머물게 했다. 호시(胡市: 오랑캐 시장)를 열고 남북 두 곳에 볼모 관사(質宮)를 지어 120개 부락에서 볼모를 받았다. 그 후로 어떤 때는 배반하고 어떤 때는 항복하며 흉노, 오환과 서로 공격했다.
후에 선비 8~9천 기가 대군과 마성 요새를 뚫고 침입하자, 한나라가 도요장군 등준(鄧遵)과 중랑장 마속(馬續)을 보내 격파했다. 선비 대인 오륜(烏倫), 기지건(其至鞬) 등 7천여 명이 등준에게 항복하여 오륜을 왕으로, 기지건을 후로 봉했다. 그러나 등준이 떠난 뒤 기지건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수만 기를 거느리고 여러 갈래로 침입하여 흉노 남선우를 치고 좌오건일축왕을 죽였다. 순제 때에는 대군태수를 살해하기도 했다.
그 후 오환교위 경엽(耿曄)이 대규모로 선비를 쳐서 많은 수급을 베자 선비 3만여 부락이 요동에 와서 항복했다. 흉노의 북선우가 패망하여 서쪽으로 달아난 후, 그곳에 남은 10여 만 부락이 요동의 선비족과 섞여 살며 모두 스스로 ’선비’라 일컬었다.
투록후(投鹿侯)라는 자가 흉노 군대를 따라 종군한 지 3년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아 있었다. 투록후가 기괴하게 여겨 아이를 죽이려 하자 아내가 말하기를,
“낮에 길을 가다가 천둥소리를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벼락이 입속으로 들어와 삼켰더니 이내 임신하여 열 달 만에 낳았습니다. 이 아이는 반드시 기이한 인물이 될 터이니 부디 키워주십시오.”
투록후가 끝내 믿지 않자 아내는 친정에 말하여 거두어 기르게 하였으니, 그 아이의 이름을 단석괴(檀石槐)라 했다. 장성하자 용맹하고 건장하며 지략이 남달리 뛰어났다. 나이 14~15세 때 다른 부족 대인 복분읍(卜賁邑)이 그의 외가 소와 양을 약탈해가자, 단석괴가 말을 달려 추격하여 앞을 가로막는 자를 모두 쳐부수고 빼앗긴 가축을 모조리 되찾아왔다.
이 일로 말미암아 부락민들이 모두 두려워 복종하며 그를 대인으로 추대했다. 단석괴가 대인이 되자 고류(高柳) 북쪽 3백여 리 탄한산(彈汗山) 삭구수(啜仇水) 가에 군영을 세우니 동서부 대인들이 모두 귀순해왔다.
군세가 강성해지자 남으로는 한나라 국경을 약탈하고, 북으로는 정령(丁令)을 막았으며, 동으로는 부여(夫餘)를 물리치고, 서로는 오손(烏孫)을 쳐서 옛 흉노의 땅을 모조리 차지했다. 그 영역이 동서 1만 2천여 리, 남북 7천여 리에 달하여 산천과 수택, 염지가 매우 광활했다.
한나라 환제(桓帝) 때 장환(張奐)을 보내 쳤으나 이기지 못하자 사신을 보내 왕으로 봉하고 화친하려 했으나 단석괴가 거절하고 약탈을 더욱 심하게 했다. 그는 광대한 영토를 중부·동부·서부의 세 부로 나누어 통치했다.
영제 희평 6년(서기 177년), 한나라가 3로로 군사를 내어 2천여 리를 진격하여 쳤으나 단석괴가 요격하여 한나라 군사를 대패시키니 살아서 돌아온 자는 열에 한둘뿐이었다.
단석괴는 45세에 죽었고 아들 화련(和連)이 뒤를 이었다. 화련은 재주와 능력이 아비만 못하고 탐욕스러우며 법을 판결함이 공평하지 못하여 무리의 절반이 배반했다. 영제 말년에 북지(北地)를 약탈하다가 활을 잘 쏘는 백성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아들 견만(騫曼)이 어려 조카 괴두(魁頭)가 섰고, 후에 견만이 자라 괴두와 자리를 다투다 무리가 흩어졌다. 괴두가 죽자 아우 보도근이 대를 이었다. 단석괴 사후 여러 대인들이 대대로 자리를 세습하게 되었다.
軻比能本小種鮮卑,以勇健,斷法平端,不貪財物,眾推以為大人。部落近塞,自袁紹據河北,中國人多亡叛歸之,教作兵器鎧楯,頗學文字。故其勒御部眾,擬則中國,出入弋獵,建立旌麾,以鼓節為進退。建安中,因閻柔上貢獻。太祖西征關中,田銀反河間,比能將三千餘騎隨柔擊破銀。後代郡烏丸反,比能復助為寇害,太祖以鄢陵侯彰為驍騎將軍,北征,大破之。比能走出塞,後復通貢獻。延康初,比能遣使獻馬,文帝亦立比能為附義王。黃初二年,比能出諸魏人在鮮卑者五百餘家,還居代郡。明年,比能帥部落大人小子代郡烏丸修武盧等三千餘騎,驅牛馬七萬餘口交市,遣魏人千餘家居上谷。後與東部鮮卑大人素利及步度根三部爭鬥,更相攻擊。田豫和合,使不得相侵。五年,比能復擊素利,豫帥輕騎徑進掎其後。比能使別小帥瑣奴拒豫,豫進討,破走之,由是懷貳。乃與輔國將軍鮮于輔書曰:「夷狄不識文字,故校尉閻柔保我於天子。我與素利為讎,往年攻擊之,而田校尉助素利。我臨陳使瑣奴往,聞使君來,即便引軍退。步度根數數鈔盜,又殺我弟,而誣我以鈔盜。我夷狄雖不知禮義,兄弟子孫受天子印綬,牛馬尚知美水草,況我有人心邪!將軍當保明我於天子。」輔得書以聞,帝復使豫招納安慰。比能眾遂彊盛,控弦十餘萬騎。每鈔略得財物,均平分付,一決目前,終無所私,故得眾死力,餘部大人皆敬憚之,然猶未能及檀石槐也。
【번역】 가비능(軻比能)은 본래 선비족의 작은 갈래 출신이었으나, 용맹하고 건장하며 법을 엄정하고 공평하게 판결하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으므로 무리들이 추대하여 대인으로 삼았다.
그 부락이 요새와 가까웠는데, 원소가 하북을 점거한 이래로 중국인들 중 도망쳐 그에게 귀순하는 자가 많았다. 그 망명자들은 가비능에게 갑옷과 방패 등 무기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문자도 꽤 배우게 했다. 그러므로 가비능이 부락 무리를 통솔하고 규율하는 것은 흡사 중국의 방식을 모방하여, 출입하고 사냥할 때 깃발을 세우고 북소리와 징소리로 진퇴의 신호로 삼았다.
건안 연간에 염유를 통해 조조에게 공물을 바쳤다. 조조가 관중을 정벌할 때 하간(河間)에서 전은(田銀)이 모반하자 가비능이 기병 3천여 명을 이끌고 염유를 따라 전은을 격파했다. 그 후 대군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가비능이 도왔으나 조조의 아들 언릉후 조창(曹彰)이 북벌하여 대파하자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조공을 통했다.
문제(조비) 때 부의왕(附義王)에 봉해졌고, 황초 2년에는 선비족에 머물던 중국인 5백여 가구를 돌려보냈다. 이듬해에는 소와 말 7만여 두를 몰고 와 시장에서 교역하고 중국인 1천여 가구를 상곡으로 귀환시켰다.
그 후 동부 선비 대인 소리(素利) 및 보도근 등 세 부족이 서로 다투어 공격하자, 오환교위 전예(田豫)가 중재하여 서로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황초 5년 가비능이 다시 소리를 공격하자 전예가 경기병을 이끌고 배후를 찔렀다. 가비능은 딴 장수 쇄노(瑣奴)를 보내 막게 했으나 전예가 쳐부수니, 이로 인해 가비능은 딴마음을 품게 되었다.
가비능이 보국장군 선우보(鮮于輔)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 이적(夷狄)은 문자를 알지 못하므로 오환교위 염유가 저를 천자께 보증해 주었습니다. 저는 소리와 원수가 되어 지난해에 그를 공격하였는데 전교위가 소리를 도왔습니다. 제가 진전에서 쇄노를 보냈다가 사군(使君)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사를 물려 물러났습니다. 보도근이 번번이 우리를 약탈하고 제 동생까지 죽였으면서 도리어 우리를 노략질꾼이라고 무고했습니다.
우리 오랑캐가 비록 예의를 알지 못하나 형제와 자손이 천자의 인수를 받았으니, 소와 말도 좋은 물과 풀을 알진대 하물며 사람의 마음을 가진 저이겠습니까! 장군께서는 마땅히 천자께 저의 억울함을 밝혀주십시오.”
선우보가 편지를 조정에 올리자 황제는 전예를 시켜 다시 회유하고 안무하게 했다. 가비능의 무리가 마침내 강성해져 활을 쏘는 기병이 10여 만 기에 달했다. 노략질하여 재물을 얻을 때마다 눈앞에서 모든 부하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끝내 사사로이 챙기는 법이 없었으므로 부하들이 목숨을 바쳐 충성했고, 다른 부족 대인들도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했다. 그러나 군세는 아직 옛날의 단석괴에는 미치지 못했다.
【역주: 가비능의 인물평과 ‘중국식 군제’ 모방】
- 소종(小種) 출신의 추대형 대인:
- “용맹·공평·불탐재물로 추대”되었다는 평가는, 혈통 세습이 아니라 무예·판결·분배의 공정성으로 뽑히는 대인제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단석괴 사후 세습(자→제→질)으로 굳어진 것과 대비되는 초기 유목 연맹체의 통치 원리를 보여줍니다.
- 망명 한인의 기술 전수(병기·문자·군령):
- 원소가 하북을 차지한 뒤(건안 이전) 중원 망명자들이 갑주·방패 제조법과 문자를 가르치고, 정기(旌麾)·고절(鼓節) 진퇴 신호로 부중을 “중국을 본뜬(擬則中國)” 통솔을 한 대목은, 3세기 초 선비가 농경-유목 복합 군사조직으로 진화했음을 뜻합니다. 황초 2년(221) 500여 가, 이듬해 1천여 가구의 위인(魏人) 송환과 소·말 7만 두 교역(朝市·互市) 기록도 같은 맥락입니다.
- 소리·보도근과의 삼부 쟁투와 선우보 서신:
- 동부 소리(素利)와 수차례 공방, 전예의 중재→배후 기습(쇄노 격파)으로 “회이(懷貳, 딴마음)”를 품은 뒤 올린 선우보(鮮于輔)宛 서신은, 가비능 스스로 “염유가 천자께 보증(保)한 몸, 형제자손이 인수(印綬)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책봉 체제 안의 억울함을 호소한 외교 문서입니다. 위가 전예로 초무(招納安慰)한 것은 토벌보다 회유가 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太和二年,豫遣譯夏舍詣比能女婿鬱築鞬部,舍為鞬所殺。其秋,豫將西部鮮卑蒲頭、泄歸泥出塞討鬱築鞬,大破之。還至馬城,比能自將三萬騎圍豫七日。上谷太守閻志,柔之弟也,素為鮮卑所信。志往解喻,即解圍去。後幽州刺史王雄并領校尉,撫以恩信。比能數款塞,詣州奉貢獻。至青龍元年,比能誘納步度根,使叛并州,與結和親,自勒萬騎迎其累重於陘北。并州刺史畢軌遣將軍蘇尚、董弼等擊之,比能遣子將騎與尚等會戰於樓煩,臨陳害尚、弼。至三年中,雄遣勇士韓龍刺殺比能,更立其弟。
【번역】 태화(太和) 2년(서기 228년), 전예가 통역 하사(夏舍)를 가비능의 사위 울축건(鬱築鞬) 부락에 보냈는데 하사가 그에게 살해당했다. 그해 가을 전예가 서부 선비의 포두(蒲頭)와 설귀니를 이끌고 요새를 나가 울축건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돌아오는 길에 마성(馬城)에 이르렀을 때 가비능이 친히 3만 기를 이끌고 와서 전예의 군대를 7일 동안 겹겹이 포위했다. 상곡태수 염지(閻志)는 염유의 동생으로 평소 선비족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다. 염지가 포위망 속으로 직접 들어가 타이르고 설득하자 가비능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 후 유주자사 왕웅(王雄)이 오환교위를 겸임하면서 은혜와 신의로 회유하자, 가비능이 누차 요새를 두드려 유주에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청룡 원년(서기 233년), 가비능이 보도근을 유인하여 병주를 배반하게 하고 혼인 동맹을 맺은 뒤, 친히 1만 기를 이끌고 형북(陘北)에서 보도근의 치중을 맞이했다. 병주자사 필궤(畢軌)가 장군 소상(蘇尚), 동필(董弼) 등을 보내 쳤으나 가비능이 아들을 시켜 누번(樓煩)에서 회전하여 진전에서 소상과 동필을 베어 죽였다.
청룡 3년(서기 235년), 유주자사 왕웅이 비밀리에 용사 한룡(韓龍)을 파견하여 가비능을 암살하게 했다. 가비능이 피살되자 선비족은 다시 분열되어 그의 아우를 세웠으나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역주: 마성 포위와 한룡의 암살(228~235)】
- 태화 2년(228) 마성 포위와 염지(閻志)의 중재:
- 전예가 통역 하사 피살에 보복해 포두·설귀니와 울축건을 깨뜨리고 귀환하다 마성에서 3만 기에 7일간 포위된 사건은, 가비능이 위 변경군을野戰에서 압도할 수준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염유의 동생 염지(상곡태수, 선비의 신망)를 포위망 안으로 들여보내 풀게 한 것은, 위가 신뢰 인맥(염씨 형제)으로 모면한 사례입니다.
- 왕웅(王雄)의 자객과 ‘종락분산(種落離散)’:
- 서언 총서(總序)가 “청룡 중제가 왕웅의 계책을 받아들여 자객을 보내 찔렀다(遣劍客刺之), 이후 종락이 흩어져 강자는 달아나고 약자는 항복”이라 요약한 사건의 본문이 바로 이 조목입니다. 정사(正史)가 암살을 합리화한 서술이므로, 도덕적 평가는 삼국지집해(盧弼) 등 주석과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 동부 소리·미가·궐기의 위상(§5와 함께 읽기):
- 요서·우북평·어양塞外의 소리·미가·궐기는 “종중이 가비능보다 많았으나 길이 멀어 초에는 변경의 우환이 아니었다”가 특징입니다. 건안 중 염유 경유 조공·호시(互市) 개설, 조조의 표봉(表寵)으로 왕 작호, 궐기 사후 아들 사말한(沙末汗)을 친한왕(親漢王)으로, 문제 때 소리·미가를 귀의왕으로 삼은 것은, 위가 동부 선비를 가비능 견제용으로扶植한 것입니다. 태화 2년(228) 소리 사망 후 아우 성률귀(成律歸)가 대섭한 것도 대인 세습화의 한 예입니다.
素利、彌加、厥機皆為大人,在遼西、右北平、漁陽塞外,道遠初不為邊患,然其種眾多於比能。建安中,因閻柔上貢獻,通市,太祖皆表寵以為王。厥機死,又立其子沙末汗為親漢王。延康初,又各遣使獻馬。文帝立素利、彌加為歸義王。素利與比能更相攻擊。太和二年,素利死。子小,以弟成律歸為王,代攝其眾。
【번역】 소리(素利), 미가(彌加), 궐기(厥機)는 모두 대인으로서 요서, 우북평, 어양 요새 밖 먼 곳에 살았으므로 처음에는 변경의 우환이 되지 않았으나 부족민의 수는 가비능보다 많았다.
건안 연간에 염유를 통해 조공을 바치고 시장을 열어 교역하자, 조조가 모두 표를 올려 왕으로 봉하고 총애했다. 궐기가 죽자 그의 아들 사말한(沙末汗)을 세워 친한왕(親漢王)으로 삼았다.
연강(延康) 초(서기 220년)에 각자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니, 문제(조비)가 소리와 미가를 귀의왕(歸義王)으로 책봉했다. 소리는 가비능과 자주 서로 공격했다. 태화 2년(서기 228년)에 소리가 죽었는데 아들이 어려 동생 성률귀(成律歸)를 왕으로 삼아 무리를 대신 통솔하게 했다.
【역주: 선비(鮮卑)의 거대한 족적과 동아시아사에 미친 파장】
- 오환과 선비의 갈래와 차이:
- 흉노에 의해 멸망한 동호(東胡)의 두 갈래 중 남쪽 오환산에 자리 잡은 집단이 오환이었고, 북쪽 대흥안령 북부 선비산에 자리 잡은 집단이 선비였습니다.
- 오환이 한나라와의 잦은 교류 및 조조의 백랑산 전투로 일찍 중원에 흡수·소멸된 반면, 선비는 몽골 초원과 만주 서부를 아우르는 광활한 영토에서 독자 세력을 보존하며 무섭게 팽창했습니다.
- 단석괴(檀石槐)와 가비능(軻比能)의 영웅적 대두:
- 2세기 중엽 단석괴가 혜성처럼 나타나 동서 1만 2천 리, 남북 7천 리의 몽골 초원 전체를 통일하고 한나라의 3로 침공군을 궤멸시켜 흉노를 능가하는 ’선비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 단석괴 사후 3부로 분열되었으나, 3세기 초 평민 출신의 영걸 가비능이 다시 제국을 재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위나라 유주자사 왕웅이 보낸 자객 한룡에게 가비능이 암살당하면서 초원의 단일 통합은 저지되었습니다.
- 5호 16국 시대와 수·당 제국의 모태가 된 선비족:
- 가비능 사후 선비는 모용부(慕容部), 탁발부(拓跋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나뉘었습니다.
- 서진(西晉)이 팔왕의 난으로 붕괴하자, 선비족의 여러 지파는 중원으로 남하하여 전연·후연·서진·남량(모용선비) 등을 건국하며 5호 16국 시대를 주도했습니다.
- 마침내 탁발선비가 중원을 통일하여 북위(北魏)를 세웠고, 이 북위의 효문제 한화 정책과 선비-한족 융합 군사집단(관롱집단)의 토대 위에서 훗날 중국 천하를 재통일한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황실이 탄생하게 됩니다. 즉, 선비족은 중세 동아시아 질서를 완전히 새로 쓴 주역이었습니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