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본문 + 배송지(裵松之) 주석 완역. 한문 원문과 번역 1:1 대역, 역주 포함. 연구용 참고본으로 출간서적과 대조 바랍니다.



왜인전(倭人傳)

1. 왜인의 지리와 야마타이국으로 이르는 노정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為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始度一海,千餘里至對馬國。其大官曰卑狗,副曰卑奴母離。所居絕島,方可四百餘里,土地山險,多深林,道路如禽鹿徑。有千餘戶,無良田,食海物自活,乖船南北巿糴。又南渡一海千餘里,名曰瀚海,至一大國,官亦曰卑狗,副曰卑奴母離。方可三百里,多竹木叢林,有三千許家,差有田地,耕田猶不足食,亦南北巿糴。又渡一海,千餘里至末盧國,有四千餘戶,濱山海居,草木茂盛,行不見前人。好捕魚鰒,水無深淺,皆沈沒取之。東南陸行五百里,到伊都國,官曰爾支,副曰泄謨觚、柄渠觚。有千餘戶,世有王,皆統屬女王國,郡使往來常所駐。東南至奴國百里,官曰兕馬觚,副曰卑奴母離,有二萬餘戶。東行至不彌國百里,官曰多模,副曰卑奴母離,有千餘家。南至投馬國,水行二十日,官曰彌彌,副曰彌彌那利,可五萬餘戶。南至邪馬壹國,女王之所都,水行十日,陸行一月。官有伊支馬,次曰彌馬升,次曰彌馬獲支,次曰奴佳鞮,可七萬餘戶。自女王國以北,其戶數道里可得略載,其餘旁國遠絕,不可得詳。次有斯馬國,次有已百支國,次有伊邪國,次有都支國,次有彌奴國,次有好古都國,次有不呼國,次有姐奴國,次有對蘇國,次有蘇奴國,次有呼邑國,次有華奴蘇奴國,次有鬼國,次有為吾國,次有鬼奴國,次有邪馬國,次有躬臣國,次有巴利國,次有支惟國,次有烏奴國,次有奴國,此女王境界所盡。其南有狗奴國,男子為王,其官有狗古智卑狗,不屬女王。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

【번역】 왜인(倭人)은 대방군의 동남쪽 큰 바다(동중국해·동해) 가운데에 있으며 산과 섬을 의지해 국읍(國邑)을 이루고 산다. 옛적에는 1백여 국이 있었는데 한나라 때 조견(朝見)한 자가 있었고, 지금 사신과 통역이 통하는 나라는 30국이다.

대방군에서 왜에 이르려면 해안을 따라 뱃길로 운항하여 한국(韓國)을 지나며 어떤 때는 남쪽으로, 어떤 때는 동쪽으로 항해하여 그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狗邪韓國: 가야 김해)에 이르니 7천여 리이다.

여기서 비로소 바다 하나를 건너는데 1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 쓰시마)에 이른다. 그곳의 큰 관리는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은 비노모리(卑奴母離)라 한다. 외딴 절도에 사는데 사방이 대략 4백여 리이며, 토지는 험준한 산악이고 깊은 숲이 많아 길은 짐승이나 사슴이 다니는 오솔길과 같다. 1천여 호가 살고 있으나 좋은 농토가 없어 해산물을 잡아 스스로 먹고살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오가며 곡식을 사들인다.

또 남쪽으로 바다 하나를 건너 1천여 리를 가니 이름을 한해(瀚海)라 하며 일대국(一大國: 이키섬)에 이른다. 관리는 역시 비구라 하고 부관은 비노모리라 한다. 사방 3백 리쯤 되며 대나무와 수풀이 많고 3천여 가구가 산다. 제법 밭이 있으나 농사를 지어도 먹을 것이 부족하여 역시 남북으로 배를 띄워 곡식을 사들인다.

또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를 가면 말로국(末盧國: 마쓰라)에 이르니 4천여 호가 있고 산과 바다에 면하여 산다.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앞서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물고기와 전복을 잡기를 좋아하여 물의 깊고 얕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물속으로 잠수하여 잡아 올린다.

동남쪽으로 육로로 5백 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 이토)에 이른다. 관리는 이지(爾支)라 하고 부관은 설모고(泄謨觚), 병거고(柄渠觚)라 한다. 1천여 호가 살며 대대로 왕이 있으나 모두 여왕국(女王國)에 통솔되어 속하며, 대방군의 사신이 오갈 때 늘 머무는 곳이다.

동남쪽으로 노국(奴國: 나노쿠니)에 이르니 1백 리 거리이다. 관리는 시마고(兕馬觚)라 하고 부관은 비노모리라 하며 2만여 호가 있다.

동쪽으로 불미국(不彌國: 후미)에 이르니 1백 리 거리이다. 관리는 다모(多模)라 하고 부관은 비노모리라 하며 1천여 가구가 있다.

남쪽으로 투마국(投馬國: 도마)에 이르니 뱃길로 20일이 걸린다. 관리는 미미(彌彌)라 하고 부관은 미미나리(彌彌那利)라 하며 대략 5만여 호이다.

남쪽으로 야마타이국(邪馬壹國: 사마일국)에 이르니 여왕이 도읍한 곳이다. 뱃길로 10일, 육로로 한 달이 걸린다. 관리는 이지마(伊支馬)가 있고 다음은 미마승(彌馬升), 다음은 미마획지(彌馬獲支), 다음은 노가제(奴佳鞮)라 부르며 대략 7만여 호이다.

여왕국 북쪽에 있는 여러 나라들은 그 호수와 거리를 대략 기록할 수 있으나, 그 밖의 주변 나라들은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 상세히 기록할 수 없다.

차례로 사마국, 이번지국, 이사국, 도지국, 미노국, 호고도국, 불호국, 저노국, 대소국, 소노국, 호읍국, 화노소노국, 귀국, 위오국, 귀노국, 야마국, 궁신국, 파리국, 지유국, 오노국, 노국이 있으니 이것이 여왕국의 경계가 다하는 곳이다.

그 남쪽에 구노국(狗奴國)이 있으니 남자가 왕이 되어 있고 관리는 구고치비구(狗古智卑狗)라 부르며 여왕에게 복속하지 않는다.

대방군에서 여왕국까지는 1만 2천여 리에 달한다.

【역주: 야마타이국(邪馬壹國)으로 가는 노정과 위치 논쟁】

  1. 구간별 비정(比定, 현재 지명 추정):

    • 구야한국(狗邪韓國)은 한반도 남해안의 김해(금관가야) 일대로, 대방군에서 왜로 가는 관문항이었습니다. 이후 뱃길 구간은 대마국(對馬國)=쓰시마(對馬島) → 일대국(一大國)=이키섬(壹岐島, ’한해(瀚海)’를 건넘) → 말로국(末盧國)=마쓰라(松浦, 가라쓰만 일대) → 이도국(伊都國)=이토시마(糸島) 평야까지는 학계의 이견이 거의 없습니다.

    • 노국(奴國)=하카타(博多) 나노쿠니, 불미국(不彌國)=우미(宇美) 방면까지도 규슈 북부 내에서 비정이 유력합니다. 문제는 투마국(投馬國, 수행 20일·5만 호)과 야마타이국(수행 10일·육행 1월·7만 호)의 위치입니다.

  2. 규슈설 vs 기나이설(야마토설):

    • 본문의 방향(“남쪽으로”)과 일수(수행 10일+육행 1월)를 액면 그대로 남하하면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가 됩니다. 이를 남(南)이 동(東)의 오기(誤記)라 보고 동쪽(세토내해 방면)으로 풀면 나라·교토 분지의 기나이(畿內)설이 되고, 일수 기록을 과장·누산된 것으로 보고 규슈 내에서 풀면 후쿠오카 평야 중심의 규슈설이 됩니다. 일본 고고학의 최대 현안으로, 기나이설은 나라현 하시하카(箸墓) 고분 등 대형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등장을, 규슈설은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 등 야요이(彌生) 말기 거점 취락을 각각 근거로 듭니다.
    • ’邪馬壹(야마일)’과 후대 ’야마토(大和)’의 음운 유사성, 삼각연신수경(三角緣神獸鏡)의 분포가 기나이설의 지지가 되며, 노정의 합리성과 한인(韓人) 사회와의 밀접한 교섭은 규슈설의 지지가 됩니다.
  3. 리(里) 수와 방위의 한계:

    • 대방군→구야한국 7,000리, 구간별 1,000리, 여왕국까지 12,000여 리라는 수치는 실측이 아니라 사신 보고와 항해 일수를 리 수로 환산한 관념적 거리입니다. 위서 동이전 전체가 그렇듯 방위도 오차가 크므로(예: 한전의 “대방 남쪽” 등), 리 수만으로 비정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4. ’옛 100여 국→지금 통교 30국’의 의미:

    • 후한대 100여 소국 분립에서 3세기 30국 연맹체로 재편되었다는 것은, 2세기 후반 ’왜국대란(倭國大亂)’을 거쳐 히미코를 맹주로 하는 연방적 통합이 진행되었음을 뜻합니다. 여왕국 경계로 열거된 20여 소국과 별도의 적대국 구노국(狗奴國)의 존재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2. 왜인의 신체 특징, 풍속 및 사회 제도

男子無大小皆黥面文身。自古以來,其使詣中國,皆自稱大夫。夏后少康之子封於會稽,斷髮文身以避蛟龍之害。今倭水人好沈沒捕魚蛤,文身亦以厭大魚水禽,後稍以為飾。諸國文身各異,或左或右,或大或小,尊卑有差。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其風俗不淫,男子皆露紒,以木綿招頭。其衣橫幅,但結束相連,略無縫。婦人被髮屈紒,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種禾稻、紵麻,蠶桑、緝績,出細紵、縑綿。其地無牛馬虎豹羊鵲。兵用矛、楯、木弓。木弓短下長上,竹箭或鐵鏃或骨鏃,所有無與儋耳、朱崖同。倭地溫暖,冬夏食生菜,皆徒跣。有屋室,父母兄弟臥息異處,以朱丹塗其身體,如中國用粉也。食飲用籩豆,手食。其死,有棺無槨,封土作冢。始死停喪十餘日,當時不食肉,喪主哭泣,他人就歌舞飲酒。已葬,舉家詣水中澡浴,以如練沐。其行來渡海詣中國,恆使一人,不梳頭,不去蟣蝨,衣服垢污,不食肉,不近婦人,如喪人,名之為持衰。若行者吉善,共顧其生口財物;若有疾病,遭暴害,便欲殺之,謂其持衰不謹。出真珠、青玉。其山有丹,其木有柟、杼、豫樟、楺櫪、投橿、烏號、楓香,其竹篠簳、桃支。有薑、橘、椒、蘘荷,不知以為滋味。有獮猴、黑雉。其俗舉事行來,有所云為,輒灼骨而卜,以占吉凶,先告所卜,其辭如令龜法,視火坼占兆。其會同坐起,父子男女無別,人性嗜酒。〔一〕見大人所敬,但搏手以當跪拜。其人壽考,或百年,或八九十年。其俗,國大人皆四五婦,下戶或二三婦。婦人不淫,不妒忌。不盜竊,少諍訟。其犯法,輕者沒其妻子,重者滅其門戶。及宗族尊卑,各有差序,足相臣服。收租賦。有邸閣國,國有市,交易有無,使大倭監之。自女王國以北,特置一大率,檢察諸國,諸國畏憚之。常治伊都國,於國中有如刺史。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及郡使倭國,皆臨津搜露,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不得差錯。下戶與大人相逢道路,逡巡入草。傳辭說事,或蹲或跪,兩手據地,為之恭敬。對應聲曰噫,比如然諾。

【번역】 남자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얼굴에 먹물을 들이고 몸에 문신을 새긴다(경면문신). 옛날부터 그 사신이 중국에 올 때마다 모두 스스로 대부(大夫)라 일컬었다.

하(夏)나라 소강(少康)의 아들이 회계(會稽)에 봉해졌을 때 머리를 깎고 몸에 문신을 새겨 교룡의 해를 피했다고 한다. 지금 왜의 해녀와 잠수부들이 물속 깊이 들어가 물고기와 조개를 잡기를 좋아하는데, 몸에 문신을 새긴 것 역시 큰 물고기와 바다새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으나 뒤에는 점차 장식으로 삼게 되었다.

여러 나라마다 문신이 각기 달라 혹 왼쪽, 혹 오른쪽에 새기며 크거나 작으니 존비에 따라 차등이 있다. 그 거리를 헤아려보면 마땅히 중국 회계(會稽)와 동야(東冶)의 동쪽에 해당한다.

그 풍속은 음란하지 않으며 남자는 모두 상투를 드러내고 면포(木綿)로 머리를 감싸 묶는다. 옷은 가로로 넓은 베를 쓰는데 그저 묶어서 서로 연결할 뿐 꿰매지 않는다. 여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쪽을 찌며, 홑이불 같은 옷을 만들어 그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머리를 꿰어 입는다(관두의).

벼농사를 짓고 모시를 심으며 누에를 쳐서 실을 잣고 고운 모시와 명주, 솜을 생산한다. 그 땅에는 소와 말, 호랑이, 표범, 양, 까치가 없다.

무기로는 창과 방패, 나무 활을 쓴다. 나무 활은 아랫부분이 짧고 윗부분이 길며, 대나무 화살에는 쇠촉이나 뼈촉을 단다. 그곳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남쪽 바다의 담이(儋耳) 및 주애(朱崖: 해남도)와 같다.

왜의 땅은 온난하여 겨울이나 여름이나 날채소를 먹으며 모두 맨발로 다닌다. 가옥이 있어 부모와 형제가 잠자는 방을 달리한다. 주홍색 붉은 흙(주단)을 온몸에 바르니 중국에서 분을 바르는 것과 같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籩豆)라는 대나무 그릇을 쓰고 손으로 집어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널(棺)은 쓰되 덧널(槨)은 쓰지 않고 흙을 덮어 무덤(봉토분)을 만든다. 사람이 처음 죽으면 열흘 남짓 빈소를 차려두는데 이때 고기를 먹지 않으며 상주는 슬피 울고 다른 조문객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장례가 끝나면 온 집안 식구가 물가로 가 목욕재계하니 중국의 연목(練沐)과 같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 중국에 사신으로 올 때에는 늘 한 사람을 정해 머리도 빗지 않고 이와 서케도 잡지 않으며 옷은 때 묻고 더러운 채로 고기도 먹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게 하여 마치 상을 당한 사람처럼 행동하게 하니 이를 ’지쇠(持衰)’라 부른다. 만약 사행길이 무사하고 길하면 함께 그에게 노비와 재물을 상으로 주지만, 만약 질병에 걸리거나 풍파의 재앙을 만나면 곧바로 그를 죽이려 하니 지쇠의 근신함이 정성스럽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진주와 푸른 옥이 산출된다. 산에는 단사가 있고 나무로는 녹나무, 상수리나무, 녹나무, 가래나무, 단풍나무 등이 있으며 생강, 귤, 산초, 양하가 있으나 양념으로 맛을 낼 줄은 모른다. 원숭이와 검은 꿩이 산다.

그 풍속에 큰일을 일으키거나 여행을 떠날 때 뼈를 불에 태워 점을 쳐서 길흉을 판단하니, 먼저 점치는 까닭을 고하는 축문은 거북점을 치는 법과 같고 불에 갈라진 금을 보고 조짐을 해석한다.

모여 앉을 때 부자간과 남녀 간의 구별이 없다.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술을 몹시 좋아한다. 신분이 높은 어른을 뵐 때는 그저 손뼉을 쳐서 꿇어앉아 절하는 예법을 대신한다.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 혹 1백 세를 살거나 80~90세를 산다. 그 풍속에 귀인은 아내를 4~5명 두고 보통 백성은 2~3명을 둔다. 부인들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다. 도둑질이 없고 소송이 적다.

법을 어긴 자는 죄가 가벼우면 처자를 몰수하고, 죄가 무거우면 그 가문과 종족을 멸한다. 종족의 존비에 각기 위계가 있어 서로 복종하기에 충분하다.

조세와 부역을 거둔다. 저택과 창고가 있고 나라마다 시장이 있어 유무를 교역하며 대왜(大倭)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한다.

여왕국 이북에는 특별히 ’일대솔(一大率)’을 두어 여러 나라를 검찰(사찰)하게 하니 여러 나라들이 그를 두려워한다. 항상 이도국에 주재하니 나라 안에서 마치 중국의 자사(刺史)와 같다.

왕이 사신을 낙양의 서울이나 대방군, 한국의 여러 나라에 보내거나 군의 사신이 왜국에 올 때에는 늘 나루터에서 소지품을 수색하고 문서와 하사품을 점검하여 여왕에게 전달하니 조금의 착오도 용납되지 않는다.

일반 백성이 존귀한 대인과 길에서 마주치면 주춤거리며 길가의 풀숲으로 들어가 피한다. 말을 전하거나 일을 아뢸 때에는 쭈그리고 앉거나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짚어 공경을 표한다. 대답하는 소리는 “희(噫)”라고 하니 중국의 “예(然諾)”와 같다.

【역주: 문신·관두의·지쇠·일대솔로 보는 왜 사회】

  1. 경면문신(黥面文身)과 하(夏) 소강(少康) 설화:
    • “회계(會稽)에 봉해진 소강의 아들이 단발문신으로 교룡을 피했다”는 대목은, 중원 역사가가 왜의 문신을 월(越) 계통 해인(海人) 풍습과 연결 지어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스스로 “처음에는 잠수 어로 때 상어·물새를 쫓는 실용 목적, 후에는 장식이자 신분 표시(좌우·대소로 존비 구별)”라 설명합니다. 회계·동야(東冶) 동쪽이라는 거리 측량도 같은 맥락입니다.
  2. 복식과 장신(관두의·주단·노신):
    • 남자의 노계(露紒, 상투 노출)와 목면(木綿) 두건, 여자의 피발굴계(被髮屈紒), 홑이불형 관두의(貫頭衣)는 야요이~고분 시대 직물(굵은 삼베·모시) 수준을 반영합니다. 주단(朱丹)을 몸에 바르고 맨발로 생채를 먹는 풍속, 변두(籩豆)에 손으로 먹는 식법은 남방 해인 문화와 통합니다.
  3. 지쇠(持衰) - 항해 사신의 금기:
    • 사행길에 한 사람을 ’상중인(喪人)’처럼 복상시켜 머리도 빗지 않고 고기·여자를 멀리하게 한 뒤, 항해가 무사하면 상을 주고 재앙이 있으면 죽이려 했다는 기록은, 위험한 대양 항해를 주술적 속죄로 관리한 풍습입니다. 부여·고구려의 제천(영고·동맹)과 짝을 이루는 왜 고유의 주술 신앙입니다.
  4. 복골점(灼骨而卜)·집회 예법:
    • 뼈를 태워 금(龜坼)을 보는 점법이 “영구법(令龜法)과 같다”는 것은 위나라 사신이 왜의 샤머니즘을 중원 점복(占卜) 관념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집회 때 부자·남녀 구별 없이 앉고 술을 즐기며, 박수(搏手)로 경배를 대신하고 수명이 길다는 서술은 정주민 농경사회의 촌락 공동체상을 전합니다.
  5. 조세·시장·감찰 체제(국가 형성 단계):
    • “조세(租賦)를 거두고, 저택(邸閣)과 시장(市)을 두어 유무를 교역하고 대왜(大倭)가 감독한다”는 대목과, 여왕국 이북에 일대솔(一大率)을 두어 이도국에 주재시키며 제국을 검찰하게 했다는 대목은 핵심입니다. 일대솔을 “마치 자사(刺史)와 같다”고 한 것은, 히미코 연맹체가 대방군을 경유한 중원 교역(철·비단·거울 유입)을 독점 관리하는 관문 체제를 갖추었음을 뜻합니다. 길에서 하호가 대인을 피하고, 나루에서 문서·하사품을 검열(임진수록·전송문서)하는 장면도 같은 위계·통제망의 표현입니다.

3. 왜인의 역법 (위략 주석)

〔一〕 魏略曰:其俗不知正歲四節,但計春耕秋收為年紀。

【번역】 『위략』에 이르기를, “그 풍속은 정월이나 4계절을 알지 못하고 오직 봄에 밭 갈고 가을에 곡식을 거두는 것만 헤아려 1년의 나이로 삼는다” 하였다.

【역주: ’춘경추수(春耕秋收)를 기년(紀年)으로’의 의미】 위략이 “정세(正歲)와 사절(四節)을 모른다”고 한 것은 달력(역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중원식 태음태양력과 24절기 같은 관료적 시간 체계를 쓰지 않고 농경 주기(파종→수확 1사이클=1년)로 나이를 헤아렸다는 관찰입니다. 벼·모시 농사와 양잠·방직(세저·겸면 생산)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철제 농구가 부족한 야요이 말기 수준에서도 수전(水田) 중심의 안정적 생산력이 뒷받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여왕 히미코(卑彌呼)의 옹립과 통치

其國本亦以男子為王,住七八十年,倭國亂,相攻伐歷年,乃共立一女子為王,名曰卑彌呼,事鬼道,能惑眾,年已長大,無夫婿,有男弟佐治國。自為王以來,少有見者。以婢千人自侍,唯有男子一人給飲食,傳辭出入。居處宮室樓觀,城柵嚴設,常有人持兵守衛。

【번역】 그 나라는 본래 남자가 왕이 되어 70~80년을 다스렸으나 왜국에 큰 전란이 일어나 여러 해 동안 서로 공격하고 살육했다. 이에 여러 나라가 함께 한 여자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으니 이름을 ’비미호(卑彌呼, 히미코)’라 했다.

귀도(鬼道: 무속과 주술)를 섬겨 능히 무리를 미혹시켰고,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으나 남편이 없었다. 남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정사를 보좌했다.

왕이 된 이래로 그녀를 직접 본 자가 드물었다. 노비 1천 명으로 하여금 시중들게 하였고 오직 남자 한 명이 음식과 시중을 들고 말을 전하러 거처를 드나들었을 뿐이다. 궁궐과 누각, 성책을 엄중히 설치하고 늘 군사를 거느리고 경비하게 했다.

【역주: 히미코(卑彌呼)의 옹립 배경과 귀도(鬼道) 통치】

  1. ’남자왕 70~80년→왜국대란→여자 옹립’의 도식:

    • “본래 남자 왕이 70~80년을 다스리다 전란이 일어나 여러 해 서로攻伐, 이에 함께 여자 1인을 왕으로 세웠다”는 서사는, 2세기 후반 소국 난립과 통합 전쟁(후한서 왜전의 ’환·영 연간 왜국대란’과 호응) 끝에 중립적 무녀(샤먼)를 맹주로 추대하여 휴전한 과정을 압축한 것입니다.
  2. 귀도(鬼道)로 혹중(惑衆)과 남동생 보좌:

    • 히미코가 “귀신을 섬기는 길(무속·주술)”로 무리를 모으고, 성인(長大)했으나 남편 없이 남동생이 정사를 보좌했다는 것은, 여성祭司(무녀왕)의 신권(神權)과 남성 실무자의 정권(政權)이 결합된 이중 지배입니다. 삼한의 천군(天君)·소도(蘇塗) 제정분리(한전 §7 역주 참조)와 비교하면, 왜는 제정분리가 제도화되기 전 단계로 제사장 자신이 왕좌에 오른 형태입니다.
  3. 시녀 1천·남자 1인·병위(持兵守衛)의 밀실 통치:

    • 왕이 된 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시녀 1천 명으로 시중들게 하며 남자 1인만 음식·전언 출입을 맡기고, 궁실·누관·성책을 엄중히 하고 병사를 두어 지켰다는 것은, 신성성과 비밀성으로 권위를 유지한 궁중(宮中) 정치입니다. ’적게 뵘(少有見者)’은 신격화 통치의 전형입니다.
  4. ‘친위왜왕(親魏倭王)’ 책봉의 국제 전략:

    • 조위(曹魏)가 히미코에게 금인자수(金印紫綬)와 동경 100매를 하사한 것은, 위·오(吳)가 대립하던 삼국 쟁패 구도에서 동남방 해상 세력(왜)을 우군으로 포섭하려는 외교 포석이었습니다. 왜 역시 중원 황제의 권위를 빌려 연맹 내 맹주 지위를 굳히고(대외 책봉의 국내 정치적 효용), 철·비단·거울 등 위신재(威信財)를 독점 확보하려 했습니다. 57년 후한 광무제가 노국(奴國) 왕에게 내린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 금인(1784년 시카노시마 출토, 후쿠오카시박물관 소장 국보)과 짝을 이루는 왜-중원 교섭사의 두 봉우리입니다.
  5. 히미코(卑彌呼)와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조작,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의 모태:

    •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점: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 설화: 일제 식민사학이 조선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모태는 바로 8세기 초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삼한(신라·가야·백제) 정벌 전설입니다.

    • 『일본서기』 편찬자들의 히미코 도용과 2주갑(120년) 연대 조작: 신공황후의 실제 모델이나 활동 시기는 사료상 4세기 후반(근초고왕 시기)으로 추정되지만, 8세기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야마토 왕실의 기원을 앞당기고 신공황후의 신격화된 권위를 높이기 위해 연대를 120년(2주갑)이나 앞으로 끌어올려 3세기 중엽으로 조작했습니다. 그 명백한 증거가 바로 『일본서기』 신공황후 섭정 66년조(및 39·40·43년조)의 편찬자 주석(이주 異注)입니다. 편찬자들은 진수의 『삼국지』 위서 왜인전을 인용하여 “『위지(魏志)』에 왜 여왕(히미코)이 위나라에 조공하고 친위왜왕에 책봉되었다고 한 기록이 바로 신공황후의 일이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즉 실존 인물인 3세기의 무녀왕 히미코의 역사적 실체(조공 사료)를 가공의 신화 인물인 신공황후의 몸체로 덧씌운 것입니다.

    • 『삼국지』 사료가 증명하는 왜의 실상과 임나일본부설의 완전한 허구성:

      1. 원시적 읍락 사회: 『삼국지』 왜인전 본문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듯, 3세기 당시 왜인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맨발(皆徒跣)로 다녔고, 바느질도 하지 않은 홑이불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꿰어 입는 관두의(貫頭衣) 차림이었으며, 대나무 그릇에 담긴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는(手食) 초기 정주 읍락 사회에 불과했습니다.

      2. 구노국과의 내전도 감당 못해 대방군에 매달림: 제8절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듯, 히미코는 이웃한 남쪽의 구노국(狗奴國) 왕 비미궁호와의 전쟁조차 스스로 수습하지 못해 대방군에 사신을 보내 “구노국이 쳐들어오니 제발 도와달라”며 구원과 중재를 울며 호소했고, 대방태수가 보낸 군기와 격문(檄文)의 중재에 의존했습니다. 자국 내 소국 간의 분쟁조차 감당하지 못하던 규슈/기나이의 소국 연맹체가 바다 건너 철기 문명과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가야나 신라를 정벌하고 지배기관(임나일본부)을 설치했다는 것은 역사적 상식과 사료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3. 학계의 정설: 현재 한·일 양국의 실증 역사학계에서 ’3~4세기 고대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 군사 지배설(전통적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히 허구로 판명되어 폐기되었습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는 6세기 왜가 백제·가야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파견된 외교 사절단이나 통상 교역 기관, 혹은 백제에 복무한 왜계 관료 집단에 불과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5. 여왕국 주변의 여러 이국(異國)

女王國東渡海千餘里,復有國,皆倭種。又有侏儒國在其南,人長三四尺,去女王四千餘里。又有裸國、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參問倭地,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번역】 여왕국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를 가면 다시 나라들이 있는데 모두 왜의 종족이다.

또 난쟁이 나라(주유국/侏儒國)가 그 남쪽에 있는데 사람들의 키가 3~4척에 불과하며 여왕국에서 4천여 리 떨어져 있다.

또 발가벗고 사는 나체국(裸國)과 치아를 검게 칠하는 흑치국(黑齒國)이 그 동남쪽에 있는데 뱃길로 1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다. 왜의 땅을 두루 살펴보니 바다 가운데 외딴 섬들로 이루어져 혹은 끊어지고 혹은 이어져 둘레가 5천여 리에 달한다.

【역주: 주유국·나체국·흑치국과 ‘5천 리 열도’ 인식】 여왕국 동쪽 바다 1천 리의 ’모두 왜종(倭種)’인 나라들, 남쪽 4천 리의 주유국(侏儒國, 키 3~4척의 난쟁이 나라), 동남쪽 뱃길 1년의 나체국(裸國)·흑치국(黑齒國)은, 위나라 사신이 전해들은 남방 해로(오키나와·남서제도 이남, 나아가 동남아 방면)의 풍문을 담은 것입니다. ’1년 항해’는 실측이 아니라 미지(未知) 원방(遠方)의 관용 표현이며, 오랑캐 치아 염흑(染黑)·나체 풍속은 남방 도서 문화의 특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절해도서(絶在海中洲島), 혹 끊어지고 혹 이어져 5천여 리”라는 총괄은, 중원 왕조가 일본 열도를 단일 대륙이 아닌 다도해 연맹 세계로 정확히 파악했음을 보여줍니다.

6. 조위(曹魏)와의 외교 교섭과 히미코 책봉

景初二年六月,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其年十二月,詔書報倭女王曰:「制詔親魏倭王卑彌呼: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次使都巿牛利奉汝所獻男生口四人,女生口六人、班布二匹二丈,以到。汝所在踰遠,乃遣使貢獻,是汝之忠孝,我甚哀汝。今以汝為親魏倭王,假金印紫綬,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其綏撫種人,勉為孝順。汝來使難升米、牛利涉遠,道路勤勞,今以難升米為率善中郎將,牛利為率善校尉,假銀印青綬,引見勞賜遣還。今以絳地交龍錦五匹、〔一〕絳地縐粟罽十張、蒨絳五十匹、紺青五十匹,答汝所獻貢直。又特賜汝紺地句文錦三匹、細班華罽五張、白絹五十匹、金八兩、五尺刀二口、銅鏡百枚、真珠、鉛丹各五十斤,皆裝封付難升米、牛利還到錄受。悉可以示汝國中人,使知國家哀汝,故鄭重賜汝好物也。」

【번역】 경초 2년(서기 238년) 6월,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難升米) 등을 대방군에 파견하여 천자에게 나아가 조공을 바치기를 청했다. 대방태수 유하(劉夏)가 관리를 딸려 그들을 호송하여 서울(낙양)로 보냈다.

그해 12월,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왜 여왕에게 답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친위왜왕(親魏倭王) 비미호(卑彌呼)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대방태수 유하가 사신을 보내 그대의 대부 난승미와 차사(次使)인 도시우점(都市牛利)을 호송해 왔으며, 그대가 바친 남종(생구) 4명과 여종 6명, 아롱진 베(반포 班布) 2필 2장이 도착하였다. 그대가 머무는 곳이 매우 먼데도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으니, 이는 그대의 충성과 효심이라 짐이 그대를 심히 어여삐 여기노라.

이제 그대를 ’친위왜왕’으로 삼고 금인자수(金印紫綬)를 내리니, 함에 넣어 봉하여 대방태수에게 맡겨 그대에게 전하게 하노라. 그대의 부족 백성들을 편안히 어루만지고 힘써 효순(孝順)하도록 하라.

그대가 보낸 사신 난승미와 우리는 먼 길을 건너오느라 노고가 많았기에, 이제 난승미를 솔선중랑장(率善中郎將)으로 삼고 우리를 솔선교위(率善校尉)로 삼아 은인청수(銀印青綬)를 하사하며, 친히 접견하여 노고를 치하하고 상을 내려 돌려보내노라.

이제 붉은 바탕에 교룡을 수놓은 비단(絳地交龍錦) 5필, 붉은 바탕의 주름진 털자리(絳地縐粟罽) 10장, 꼭두서니로 물들인 붉은 깁(蒨絳) 50필, 짙은 남빛 깁(紺青) 50필을 내려 그대가 바친 공물의 값에 답하노라.

또 특별히 그대에게 남색 바탕에 구름무늬를 놓은 비단(紺地句文錦) 3필, 올이 고운 아롱진 꽃무늬 털자리(細班華罽) 5장, 흰 명주(白絹) 50필, 금 8냥(兩), 5척 칼(五尺刀) 2자루, 구리 거울(銅鏡) 100매, 진주(真珠)와 연단(鉛丹) 각 50근을 하사하노니, 모두 함에 넣어 봉하여 난승미와 우리에게 맡겨 돌아가거든 장부에 기록해 받게 하노라. 이 모든 것을 그대의 나라 사람들에게 두루 보여 국가(조위)가 그대를 어여삐 여겨 정중하게 좋은 물품을 하사했음을 알게 하라.”

【역주: 경초 2년(238) 조공과 책봉·하사품의 실체】

  1. 외교 연표의 기점(238년 6월→12월):
    • 대부 난승미(難升米)·차사牛利(도시우리)가 대방태수 유하(劉夏)의 호송으로 낙양에 올라 남녀 생구(生口, 노예) 10명과 반포(班布) 2필 2장을 바치고, 그해 12월 명제(조예)가 ‘제조친위왜왕(制詔親魏倭王)’ 조서로 답한 것이 왜-위 공식 교섭의 시작입니다. 대방군 경유(郡→낙양 호송, 하사품의 군 경유 전달)는 대방군이 왜·한 교섭의 독점 창구였음을 보여줍니다(한전 대방군 역주 참조).
  2. 조서 문면의 위계(친위왜왕·솔선중랑장):
    • 여왕에게 금인자수(金印紫綬)를 가수(假授)하고, 사신 난승미를 솔선중랑장(率善中郎將), 牛利를 솔선교위(率善校尉)에 은인청수(銀印青綬)로 삼은 것은, 오환·선비의 솔중왕(率眾王) 책봉과 같은 번이(蕃夷) 우대 등급입니다. “그 종인(種人)을 어루만져 효순에 힘쓰라”는 훈유도 정형구입니다.
  3. 하사품 목록의 해독(교역사적 의미):
    • 답사품(貢直에 대한 답례)으로 준 강지교룡금(絳地交龍錦) 5필, 추리모(縐粟罽) 10장, 천강(蒨絳)·감청(紺青) 각 50필과 특사로 준 감지문금(紺地句文錦) 3필, 세반화게(細班華罽) 5장, 백견(白絹) 50필, 금 8냥, 오척도(五尺刀) 2구, 동경(銅鏡) 100매, 진주·연단(鉛丹) 각 50근은, 왜 사회 최상층의 위신재(威信財: 권위를 표시하는 희귀 재화)가 되었습니다. 특히 동경 100매는 일본 각지 출토 삼각연신수경(三角緣神獸鏡)의 유입 경위로 비정되며, 분배를 통해 맹주(히미코)가 연맹 소국을 결속하는 정치 재화로 쓰였습니다.

7. 조서의 글자에 관한 고증 (배송지 주석)

〔一〕 臣松之以為地應為綈,漢文帝著皂衣謂之弋綈是也。此字不體,非魏朝之失,則傳寫者誤也。

【번역】 신 배송지가 살펴보건대, 조서 본문의 ‘지(地)’ 자는 응당 굵은 비단을 뜻하는 ‘제(綈)’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한 문제(漢文帝)가 검은 옷을 입었을 때 이를 ’익제(弋綈)’라 부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글자의 쓰임이 문체에 맞지 않는 것은 위나라 조정의 실수가 아니라면 후대에 필사하는 자의 명백한 오기입니다.

8. 히미코의 사망과 토요(壹與)의 계승

正治元年,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雋等奉詔書印綬詣倭國,拜假倭王,并齎詔賜金、帛、錦罽、刀、鏡、采物,倭王因使上表答謝恩詔。其四年,倭王復遣使大夫伊聲耆、掖邪狗等八人,上獻生口、倭錦、絳青縑、綿衣、帛布、丹木、〈犭付〉、短弓矢。掖邪狗等壹拜率善中郎將印綬。其六年,詔賜倭難升米黃幢,付郡假授。其八年,太守王頎到官。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狀。遣塞曹掾史張政等因齎詔書、黃幢,拜假難升米為檄告喻之。卑彌呼以死,大作冢,徑百餘步,狥葬者奴婢百餘人。更立男王,國中不服,更相誅殺,當時殺千餘人。復立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為王,國中遂定。政等以檄告喻壹與,壹與遣倭大夫率善中郎將掖邪狗等二十人送政等還,因詣臺,獻上男女生口三十人,貢白珠五千,孔青大句珠二枚,異文雜錦二十匹。

【번역】 정시 원년(서기 240년),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건중교위 제준(梯雋) 등을 파견하여 조서와 황금 인수를 받들고 왜국으로 건너가 왜왕을 배명하게 하고 아울러 조서와 함께 금, 비단, 털모직물, 칼, 거울 등을 하사했다. 왜왕이 사신을 통해 상표문을 올려 은혜에 감사했다.

정시 4년(서기 243년), 왜왕이 다시 사신 대부 이성진, 액전독 등 8명을 보내 생구(노예)와 일본 토산물을 바쳤다. 정시 6년, 조서를 내려 왜의 난승미에게 황당(黃幢: 황색 군기)을 하사하여 대방군을 거쳐 전달하게 했다.

정시 8년, 대방태수 왕기(王頎)가 부임했다. 왜 여왕 비미호가 남자가 왕인 구노국(狗奴國)의 왕 비미궁구(卑彌弓呼)와 화친하지 못하고 서로 전쟁을 벌이자, 왜의 사신이 대방군으로 와서 전쟁 상황을 설명했다. 이에 세액사마(塞曹司馬) 장정(張政) 등을 파견하여 황당과 조서를 전달하고 격려하게 했다.

이 무렵 비미호가 죽자 큰 무덤을 만들었는데 지름이 1백여 보(步)에 달했고 노비 1백여 명을 순장했다.

그 후 다시 남자를 세워 왕으로 삼았으나 국중이 복종하지 않고 서로 살육하여 죽은 자가 1천여 명에 달했다. 이에 다시 비미호의 종녀(친족 소녀)인 열세 살 된 ’일여(壹與, 토요)’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으니 비로소 나라가 안정되었다.

장정 등이 격문을 띄워 일여를 깨우치고 효유하자, 일여가 대부 솔의중랑장 액전독 등 20명을 보내 장정 일행의 귀환을 호송하게 하고, 낙양의 대궐에 이르러 남녀 생구 30명을 바치고 백주(흰 진주) 5천 송, 청유석(푸른 옥) 2매, 무늬 비단 20필을 조공으로 바쳤다.

【역주: 정시 연간(240~247) 사신 왕래와 히미코 사후 정국】

  1. 정시 원년~8년의 교섭 연표:

    • 정시 원년(240) 궁준(弓遵)이 건중교위 제준(梯雋)을 보내 조서·인수를 가수하고 금·비단·도·경을 하사 → 정시 4년(243) 이성기(伊聲耆)·액전구(掖邪狗) 8인 조공(생구·왜금·단목·단궁시) → 정시 6년 난승미에게 황당(黃幢, 황색 군기) 하사 → 정시 8년 왕기(王頎) 부임. 황당·격문(檄告喩)은 군사적 권위를 상징하는 하사품으로, 왜 연맹 내 분쟁 중재에 쓰였습니다.
  2. 구노국(狗奴國)과의 전쟁과 장정(張政) 파견:

    • 여왕국 남쪽의 남자왕 비미궁호(卑彌弓呼)의 구노국이 여왕국과 “예부터 화목하지 못해(素不和)” 서로 공격하자, 왜의 재사(載斯)·오월(烏越) 등이 대방군에 사정을 보고했고, 군은 색조정사 장정 등을 보내 황당과 조서로 양측을 효유했습니다. 대방군이 한·왜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했음(한전 기리영 전투와 같은 구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이웃 구노국과의 내전조차 자력으로 감당하지 못해 대방군에 구원을 호소하던 왜의 실상은, 3세기에 왜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 가야를 정벌하고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명백히 증명합니다(§4 역주 5 참조).
  3. 대형분구묘와 순장 100여 명:

    • “지름 100여 보(步)의 큰 무덤에 노비 100여 명 순장”은 야요이 말~고분 시대 전기의 대형 분구묘(墳丘墓)와殉葬 풍습과 일치합니다. 나라현 하시하카(箸墓) 고분을 히미코릉으로 비정하는 설이 대표적이나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4. 남왕 실패→종녀壹與(13세) 옹립과 ‘국중호정(國中遂定)’:

    • 히미코 사후 남자 왕을 세웠으나 복종하지 않아 1천여 명이 살육되자, 히미코의 종녀(宗女) 일여(一作 臺與, 토요·도요) 13세를 왕으로 세워 안정시켰다는 것은, 무녀-여성 왕통(王統)에 대한 연맹의 합의(정통성)가 강했음을 뜻합니다. 일여가 장정을 호송·조공(남녀 생구 30, 백주 5천, 공청대勾珠, 잡금 20필)한 것은 히미코 체제의 외교 노선을 계승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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