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본문 + 배송지(裵松之) 주석 완역. 한문 원문과 번역 1:1 대역, 역주 포함. 연구용 참고본으로 출간서적과 대조 바랍니다.



부여전(夫餘傳)

1. 부여의 강역, 관제, 풍속 및 제천행사

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戶八萬,其民土著,有宮室、倉庫、牢獄。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平敞。土地宜五穀,不生五果。其人麤大,性彊勇謹厚,不寇鈔。國有君王,皆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邑落有豪民,名下戶皆為奴僕。諸加別主四出,道大者主數千家,小者數百家。食飲皆用俎豆,會同、拜爵、洗爵,揖讓升降。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在國衣尚白,白布大袂,袍、蔥,履革鞜。出國則尚繒繡錦罽,大人加狐狸、狖白、黑貂之裘,以金銀飾帽。譯人傳辭,皆跪,手據地竊語。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為奴婢。竊盜一責十二。男女淫,婦人妒,皆殺之。尤憎妒,已殺,尸之國南山上,至腐爛。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兄死妻嫂,與匈奴同俗。其國善養牲,出名馬、赤玉、貂狖、美珠。珠大者如酸棗。以弓矢刀矛為兵,家家自有鎧仗。國之耆老自說古之亡人。作城柵皆員,有似牢獄。行道晝夜無老幼皆歌,通日聲不絕。有軍事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為凶,合者為吉。有敵,諸加自戰,下戶俱擔糧飲食之。其死,夏月皆用冰。殺人徇葬,多者百數。厚葬,有槨無棺。〔一〕

【번역】 부여(夫餘)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으며 현도(玄菟)에서 1천 리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읍루(挹婁),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흐르며 영토는 사방 2천 리에 달한다. 호수는 8만 호이다.

그 백성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살며(土著), 궁궐과 전각, 창고와 감옥을 두고 있다. 산과 언덕, 넓은 못이 많으나 동이(東夷)의 영역 중에서는 가장 평탄하고 넓게 트여 있다. 토질은 오곡(五穀)을 기르기에 알맞으나 다섯 가지 과일(오과)은 자라지 않는다.

사람들의 체격은 매우 크고 건장하며 성품은 강하고 용맹하며 신중하고 후덕하여 남을 노략질하지 않는다. 나라에 군왕(君王)이 있으며, 관직의 이름은 모두 여섯 가지 가축(육축)의 이름을 따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라 부르고 대사(大使), 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를 둔다.

부락에는 호민(豪民)이 있고, 하호(下戶)라 불리는 일반 백성들은 모두 노복(奴僕)처럼 복종한다. 여러 가(諸加)들은 저마다 사방으로 뻗은 사출도(四出道)를 나누어 주관하는데, 큰 가(大加)는 수천 가구를 다스리고 작은 가(小加)는 수백 가구를 거느린다.

음식을 먹을 때는 모두 조두(俎豆)라는 예기(禮器)를 사용하고, 회합하여 술잔을 주고받을 때에는 절하고 술잔을 씻으며 사양하고 오르내리는 중국식 예법을 갖춘다.

은(殷)나라 정월(음력 12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온 나라가 큰 모임을 열어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니 이를 ’영고(迎鼓)’라 부른다. 이때가 되면 형벌을 중단하고 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준다.

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삼베로 지은 소매가 넓은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으로 나갈 때는 비단과 수놓은 명주, 털모직 옷을 귀하게 여기며, 귀인과 대인(大人)은 여우, 삵, 흰 담비, 검은 담비의 모피 옷을 덧입고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통역관이 말을 전할 때는 모두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짚은 채 조용히 귓속말하듯 한다.

형벌을 집행할 때는 매우 엄격하고 가혹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로 변상하게 한다(일책십이법).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인다. 특히 질투하는 것을 몹시 증오하여, 이미 처형한 뒤에는 시신을 나라 남쪽 산 위에 버려두어 썩어 문드러지게 한다. 친정에서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자 하면 소와 말을 바쳐야 비로소 내어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으니 흉노와 풍속이 같다(형사취수제).

그 나라는 가축을 잘 기르며, 명마(名馬)와 붉은 옥(赤玉), 담비와 삵 모피, 아름다운 진주가 산출된다. 진주 중 큰 것은 산대추(酸棗)만 하다. 활과 화살, 칼과 창을 무기로 삼으며 집집마다 자체적으로 갑옷과 병기를 갖추고 있다.

나라의 노인들은 스스로 옛날에 망명해 온 사람이라고 전한다. 성책(城柵)을 쌓을 때는 모두 둥글게 만들어 흡사 감옥과 비슷하다. 길을 갈 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 노래를 불러 하루 종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군사 행동(전쟁)이 있을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굽(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 굽이 갈라져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쳐져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여긴다(우제점). 적이 쳐들어오면 여러 가(諸加)들이 직접 나가 싸우고, 하호(下戶)들은 모두 군량을 짊어지고 따라가 먹을 것을 대어준다.

사람이 죽으면 여름철에는 모두 얼음을 넣어 시신을 보존한다. 사람을 죽여 순장(殉葬)하는데 많을 때는 수백 명에 이른다. 장례를 후하게 치르며 덧널(槨)은 쓰되 널(棺)은 쓰지 않는다.

【역주: 부여(夫餘)의 국가적 성격과 한국 고대사에서의 위상】

  1. 사출도(四出道)와 가축 관명(六畜名官)의 연맹왕국 체제:

    • 부여의 관직명인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는 고대 토템 및 목축 경제의 성격을 생생하게 반영합니다.
    • 중앙은 국왕이 직접 다스리고, 사방의 영토(사출도)는 여러 가(諸加)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수천~수백 호를 거느리며 다스리는 전형적인 초기 연맹왕국(연맹체 국가)이었습니다.
    • 왕권은 절대적이지 못하여 흉년이나 가뭄이 들면 “곡식이 익지 않는 것은 왕의 허물이니 왕을 마땅히 바꾸거나 죽여야 한다”고 책임을 물을 만큼 제가 세력의 합의와 견제권이 강력했습니다.
  2. 고구려와 백제의 모태(뿌리) 국가:

    • 부여는 단순한 변방의 소국이 아니라, 송화강(약수) 유역의 광활한 평야를 무대로 8만 호(약 40~50만 인구)를 자랑하던 동방의 대제국이었습니다.

    •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동명성왕)이 북부여(또는 졸본부여)에서 남하하여 건국하였으며, 백제의 건국 세력(온조·비류) 또한 부여 계통이었습니다. 백제가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南夫餘)’라 고치고 왕실의 성씨를 ‘부여씨(扶餘氏)’로 삼은 것은 자신들이 부여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3. 『삼국지』 시대의 친중(親中) 외교와 흥망:

    • 고구려가 한·위 왕조와 격렬하게 군사적으로 충돌했던 반면, 부여는 현도군 및 공손씨 정권, 위나라와 밀접한 우호·조공 관계를 맺으며 고구려를 배후에서 견제했습니다. 본문에 한나라가 부여왕을 우대하여 장례 때 옥갑(玉匣)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 그러나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씨(전연)의 침략으로 치명타를 입고, 결국 494년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완전히 복속되면서 천년의 역사를 마감했습니다.
  4. 현도군(玄菟郡)의 설치와 ’현도에서 1천 리(去玄菟千里)’의 지리적 실체:

    • 현도군(玄菟郡)이란 무엇인가: 기원전 108년 한 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고조선 및 그 주변 옛 땅에 설치한 한사군(낙랑·현도·임둔·진번) 중 하나입니다. 『삼국지』 동옥저전에 따르면 처음에는 옥저성(沃沮城)에 현도군을 두었다가 토착 예맥의 거센 저항으로 기원전 75년 고구려 서북쪽(신빈 영릉진의 흥경 노성 또는 요동 축선)으로 치소를 옮겼습니다(현도고부 玄菟故府). 이후 서기 2세기 초 고구려 태조대왕의 맹렬한 공세로 무순(撫順) 고이산성(高爾山城) 일대로 다시 치소를 옮겼습니다.

    • 동이전의 지리 기준점 ‘현도’: 중국 왕조는 동북방 이민족 제국의 위치와 거리를 기록할 때 인접한 최전방 군현을 절대적 기준점으로 삼았습니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동쪽으로 1천 리(在遼東之東千里)”, 왜는 “대방의 동남쪽 바다 한가운데(在帶方東南大海之中)”,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이라 한 것처럼, 만주 대평원 북방 깊숙이 자리 잡은 부여의 위치를 규정한 기준점이 바로 현도군(玄菟郡)이었습니다.

    • ’현도에서 1천 리’의 거리 해석과 쟁점: 주류 학계(통설)에서는 3세기 당시 현도군의 치소를 무순 고이산성 일대로 보고, 위진(魏晉) 시대의 1리(약 400여 m)를 적용하면 무순에서 유하(柳河)·휘발하(輝發河) 축선을 거쳐 길림시 송화강 유역(용담산산성·모아산 고분군 일대)까지의 실제 교통로 거리(약 400km)와 정확히 부합한다고 해석합니다. 반면 사료 비판적 연구자들은 현도군의 치소 변천 과정과 요하 축선설을 제기하며, 사서에 기록된 방위와 거리가 시대별 치소 이동 및 중원 왕조의 안보적 관점에 따라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합니다(상세 논증은 부록 3·4 참조).

2. 부여의 상장례 풍속 (위략 주석)

〔一〕 魏略曰:其俗停喪五月,以久為榮。其祭亡者,有生有熟。喪主不欲速而他人彊之,常諍引以此為節。其居喪,男女皆純白,婦人著布面衣,去環珮,大體與中國相彷彿也。

【번역】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그 풍속에 상을 치를 때 5개월 동안 시신을 모셔두며 오래 둘수록 영예로 여긴다. 죽은 자에게 제사 지낼 때는 날것과 익힌 것을 함께 올린다. 상주(喪主)는 서두르고 싶어 하지 않으나 남들이 억지로 재촉하여, 늘 옥신각신 다투며 끌어당기는 것으로 상례의 절도를 삼는다.

상을 당해 복을 입을 때는 남녀가 모두 순백색 옷을 입고, 부인은 베로 만든 면사포를 쓰며 패옥과 장신구를 벗으니 대체로 중국의 상례와 서로 비슷하다.

【역주: 5개월 빈소(停喪)와 생숙(生熟) 제물】

  1. ’5개월 모셔둘수록 영예’의 배경:
    • §1의 “여름에도 얼음으로 시신 보존, 순장 수백 명, 곽(槨) 사용”과 짝을 이루는 위략의 보충입니다. 장기 빈소는 고구려의 “미리 수의(送終之衣)를 지어둔다”는 풍속(고구려전 §1), 예의 책화(責禍) 상례와 같은 예맥계 상장례의 지역 전통으로, 지배층의 권위를 과시하는 의례이기도 합니다.
  2. ’날것과 익힌 것(有生有熟)’과 상주-조문객의 실랑이:
    • 제물에 날것(혈식의 잔영)과 익힌 것을 함께 올린다는 것은 수렵·목축 사회에서 농경 의례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보여줍니다. “상주는 서두르지 않으려 하고 남들이 재촉해 옥신각신”한다는 것은, 빈소 기간이 길수록 조문·부조 경제가 커지므로 부락 공동체가 상례 일정을 조정했음을 뜻합니다.
  3. 순백 상복·포면의(布面衣)의 비교:
    • 남녀 순백, 부인 베 면사포와 패옥 제거가 “중국과 대체로 비슷(與中國相髣髴)”하다는 평가는, 위략 편자가 부여를 예법(禮法)을 갖춘 문명국으로格上한 것입니다. 왜인전 §2의 “상중 10여 일 육식 금지, 장례 뒤 물가 목욕”과 비교하면 부여 상례가 훨씬 장중·장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부여의 왕계와 대외 교섭사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無適子,有孽子麻余。位居死,諸加共立麻余。牛加兄子名位居,為大使,輕財善施,國人附之,歲歲遣使詣京都貢獻。正始中,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位居遣大加郊迎,供軍糧。季父牛加有二心,位居殺季父父子,籍沒財物,遣使簿斂送官。舊夫餘俗,水旱不調,五穀不熟,輒歸咎於王,或言當易,或言當殺。麻余死,其子依慮年六歲,立以為王。漢時,夫餘王葬用玉匣,常豫以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公孫淵伏誅,玄菟庫猶有玉匣一具。今夫餘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傳世以為寶,耆老言先代之所賜也。〔一〕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以〕也。〔二〕

【번역】 부여는 본래 현도군(玄菟郡)에 속해 있었다. 한나라 말기에 공손도(公孫度)가 요동에서 웅거하여 세력을 떨치고 외이들을 위압하여 굴복시키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에 복속했다.

당시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자 공손도는 부여가 이 두 강대한 오랑캐 사이에 끼어 있음을 감안하여 자기 가문의 종녀(宗女)를 위구태에게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簡位居)가 왕위에 올랐다. 적자(嫡子)는 없었고 첩이 낳은 아들(얼자) 마여(麻余)가 있었다. 간위거가 죽자 여러 가(諸加)들이 함께 마여를 왕으로 옹립했다.

우가(牛加)의 형의 아들로 이름이 ’위거(位居)’라는 자가 있어 대사(大使)가 되었는데,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국인들이 그를 따랐으며 해마다 사신을 낙양의 조정에 보내 공물을 바쳤다.

정시(正始) 연간에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면서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부여에 파견하자, 위거는 대가(大加)를 도성 교외로 보내 맞이하고 군량을 공급해 주었다.

그 후 계부(숙부)인 우가가 딴마음을 품자 위거가 숙부 부자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여 사신을 보내 장부를 작성해 관청에 바쳤다.

부여의 옛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때맞추지 않아 오곡이 익지 않으면 그 허물을 번번이 왕에게 돌려, 어떤 이는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왕을 죽여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마여가 죽자 그의 아들 의려(依慮)가 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한나라 때 부여왕의 장례에는 옥갑(玉匣: 옥으로 만든 수의)을 사용하였는데, 평소에 미리 현도군에 맡겨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가져다가 장사를 지냈다. 공손연이 주살되었을 때 현도군의 무기고에 여전히 옥갑 한 구가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벽(玉璧), 옥규(珪), 옥잔(瓚) 등 여러 대에 걸친 유물이 있어 대대로 전하며 보물로 삼고 있는데, 원로들의 말로는 선대 한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이라 한다.

그들의 국왕 도장에 새겨진 글자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되어 있고, 나라 안에 옛 성의 이름이 ’예성(濊城)’이라 하니, 아마도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중심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된 듯하다. 그들이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亡人)’이라 일컫는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역주: 부여와 현도군의 대외 교섭사 및 ‘예왕지인(濊王之印)’】

  1.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했다(夫餘本屬玄菟)’의 역사적 의미:

    • 이는 부여가 중국 군현의 직접적인 내지(內地) 통치를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국 왕조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주변 이민족 왕국들을 통제할 때, 최인접 군현을 대외 창구로 지정하여 조공·책봉·사신 왕래를 관장하게 하는 ‘외번(外藩) 기미(羈縻) 체제’를 운용했습니다.
    • 따라서 “본래 현도에 속했다”는 것은 부여의 대(對)중국 외교 및 교섭 창구가 현도군(玄菟郡)으로 지정되어 상시적인 조공·외교 관계를 맺었음을 뜻합니다. 특히 남쪽의 고구려가 현도군과 격렬한 군사적 충돌을 벌였던 것과 달리, 부여는 현도군과 우호 동맹을 맺음으로써 고구려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외교적 실리를 취했습니다. 이후 한 말 요동에서 공손씨(공손도)가 자립하자 부여는 요동군으로 소속을 바꾸어 혼인 동맹을 맺었다가, 위나라가 공손씨를 주살한 뒤 다시 현도군 관할 체제로 복귀했습니다.
  2. 부여왕의 옥갑(玉匣)과 현도군 무기고(玄菟庫)의 기미 외교:

    • 옥갑(玉匣, 옥의 玉衣): 옥 조각들을 금실이나 은실로 엮어 시신의 온몸을 감싸던 한나라 황실과 최고위 제후왕만의 특권적 장례 복식(수의)입니다. 한나라 황제가 외국 군주인 부여왕에게 옥갑을 하사했다는 것은 부여를 동방의 독립 군주국 중에서도 황제권에 비견되는 최상급 제후국으로 파격 우대했음을 보여줍니다.

    • 현도군 창고에 미리 보관한 이유(常豫以付玄菟郡): 주목할 점은 옥갑을 부여 왕실에 미리 주지 않고 변경 거점인 현도군의 무기고(玄菟庫)에 보관해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사신을 보내 영취(迎取)하여 장사를 치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부여왕의 합법적 권위와 장례를 한나라 조정이 공인한다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부여가 한나라의 외교 질서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고도의 외교적 담보(기미책)였습니다.

    • 서기 238년 위나라 사마의가 요동 공손연을 멸망시켰을 때 “현도군 창고에 여전히 옥갑 한 구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은,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쳐 부여와 현도군 사이에 옥갑을 매개로 한 외교 관례가 오랫동안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생생한 사료입니다.

  3. 관구검의 고구려 정벌과 현도태수 왕기(王頎) 파견:

    • 서기 244~245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킬 때,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부여로 파견하자 부여 대사(위거)가 교외까지 마중 나와 군량을 공급했습니다.
    • 이는 부여가 현도군과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위나라의 대(對)고구려 정벌전에 적극적인 병참 지원국으로 참여했음을 보여주며, 당시 동북아 국제 정세에서 부여-현도군-위나라가 맺고 있던 반(反)고구려 동맹 구도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4. ’예왕지인(濊王之印)’과 부여·예맥의 관계:

    • 부여 국왕이 사용하던 옥새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 새겨져 있고, 수도에 ’예성(濊城)’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여가 본래 예맥(濊貊)계 종족을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증명합니다.
    • 부여 지배층이 스스로 ’망명자(亡人)’라 부른 것은 고리국(高離國) 계통의 부여 시조 집단이 기존 예맥 토착 사회로 남하하여 건국 주도 세력이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5. 고조선과 부여의 역사적 관계 — 『사기』·『삼국지』가 전하는 2대 문명 축과 예맥의 계승:

    • 『삼국지』에서 고조선-부여 관계가 직접 서술되지 않는 이유: ① 350년의 시대적 단절: 3세기 후반 조위~서진 시대의 현지 외교·군사 보고서인 동이전 편찬 시점에서, 기원전 108년에 멸망한 고조선(위만조선)은 이미 350~400년 전의 과거사였기 때문입니다. ② 사서의 목적: 진수(陳壽)의 관심사는 동시대 주변 이민족들의 영토 크기, 병력, 관제, 군사 협력 등 ’당대 외교 안보 실태’였으며, 먼 과거의 고대사 계통 추적이 아니었습니다. ③ 독자적 병존(2대 문명 축): 부여는 고조선의 속국이 아니라, 선진(先秦) 전국시대(『사기』 화식열전: “北鄰烏桓夫餘, 東綰朝鮮眞番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부여와 이웃하고, 동으로 조선·진번을 얽어맸다”)부터 요동~대동강의 고조선 문화권(농경·철기·중계교역)과 북방 만주 송화강의 부여 문화권(반농반목·기마수렵)이라는 독자적인 두 문명 축으로 병존했습니다.

    • 문헌 사료에 새겨진 내적 융합의 흔적:

      • 그럼에도 부여왕이 대대로 차고 다니던 ‘예왕지인(濊王之印)’과 나라 안의 ‘예성(濊城)’, 그리고 스스로 ‘망명자(亡人)’라 부른 증언은, 기원전 3세기 연나라 진개의 침공이나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 전후로 요동·예맥계 유민들이 북상하여 송화강 토착 사회와 결합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료입니다.
  6. 의려왕(依慮王)의 비극과 연나부부여(椽那部扶餘) — 『진서』·『삼국사기』 속 부여의 분산과 귀결:

    • 의려왕과 모용외 침공 (『진서』): 본문에서 “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고 기록된 의려왕은, 서기 285년(서진 태강 6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기습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자결하였습니다(『진서』 권97 사이열전). 왕족과 백성들은 동쪽 바닷가 옥저(沃沮)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서진(西晉)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아들 의라(依羅)가 모용외를 격퇴하고 복국하였습니다.

    • 연나부부여(낙씨부여)와 고구려 왕비족 (『삼국사기』·『삼국지』): 서기 22년(고구려 대무신왕 5년) 동부여 대소왕이 전사하자, 대소왕의 사촌 동생(從弟)이 1만여 명의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습니다. 대무신왕은 그를 ‘왕(王)’으로 봉하고 고구려 5부 중 서북방에 위치한 연나부(椽那部, 절노부)에 안치하며 ’낙씨(絡氏)’ 성을 하사했습니다(『삼국사기』 권14). 이 연나부부여 집단은 『삼국지』 고구려전에 기록된 대로 “대대로 고구려 국왕과 혼인하는 왕비족(絶奴部世與王婚)”이자 최고위 귀족 세력으로 성장하여 고구려 권력의 중추가 되었습니다(학계에서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이를 ’서부여’로 부르기도 함).

    • 『위서(魏書)』의 두막루국(豆莫婁國): 494년 고구려에 의해 만주 중심지의 부여가 소멸한 뒤에도, 북부여의 유민들은 더 북쪽 나하(那河)를 건너가 6~8세기까지 ‘두막루(달말루)’라는 독자 국가를 유지하며 ’예왕지인’을 국보로 계속 사용했습니다.

    • 고고학적 실증 (가야와의 친연성): 3세기 말 선비족 침공 등으로 요동의 부여계 세력이 동요할 때, 유민의 일부가 한반도 남부로 남하하여 김해 대성동 고분군(금관가야)의 지배층으로 융합되었다는 견해는, 요동 라마동 고분(부여-선비 계통)과 김해 대성동 고분의 청동 솥(동복)·마구·청동 허리띠 고리 등 핵심 유물의 일치성을 통해 고고학계에서 실증적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7. 【참고: 고대사 연구 및 학술적 시각】:

    • 단재 신채호의 ‘삼조선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을 신조선(진조선)·말조선(막조선)·불조선(번조선)의 3한 분립 체제로 보고, 한무제에게 망한 것은 서쪽의 번조선(위만)뿐이며 종가인 진조선은 이미 북부여로 전환되어 만주에 건재했기에 한사군 밖에서 ’예왕지인’을 차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설과 부여계 남하론: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씨의 침략으로 의려왕이 자결하고 부여가 동요할 때, 유민 세력이 한반도 남부(가야)를 거쳐 일본 열도로 이동했다는 가설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및 요동 라마동 고분과 김해 대성동 고분의 마구·동복(청동 솥) 일치성 등 고고학적 유물 비교를 통해 학술적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상세 분석은 부록 6 참조)

4. 부여의 부유함과 건국 신화 (위략 주석)

〔一〕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번역】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매우 은성하고 부유하여 선대 이래로 일찍이 외적에게 침략당해 파괴된 적이 없었다” 하였다.

〔二〕 魏略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王捐之於溷中,豬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為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擊水,魚鱉浮為橋,東明得度,魚鱉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번역】 『위략』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옛 기록(舊志)에 또 이르기를, 옛적에 북방에 ’고리국(高離之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왕의 시비(侍婢)가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니 시비가 말하기를,

“달걀만 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이를 낳자 왕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넣어 살려주었고, 마구간으로 옮겨놓았더니 말들이 김을 뿜어주어 끝내 죽지 않았다. 왕이 마음속으로 의심하여 ’하늘의 아들(天子)’이 아닌가 여겨, 그의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짓고 늘 말을 기르게 했다.

동명이 자라면서 활을 매우 잘 쏘자 왕은 장차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동명을 죽이려 했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엄체수(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내리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동명이 건너자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져 뒤쫓던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동명은 이로 말미암아 부여의 땅에 도읍을 정하고 왕이 되었다.

【역주: ’은부불파(殷富未嘗破壞)’와 동명(東明) 건국 신화】

  1. ’선대 이래 깨뜨려진 적 없음’의 실체:
    • 송화강 평야의 오곡 지대와 명마·적옥·담비·미주(眞珠) 교역(§1), 옥벽·옥규·옥잔의 대대 전승 보물(§3)은 부여의 물질 기반을 보여줍니다. “파괴된 적 없다”는 것은 3세기 중엽 관구검 원정 이전까지 부여가 현도·요동·위와 우호(조공·군량 지원) 관계를 유지하며 국토를 보전했음을 뜻합니다(§3 위거의 군량 공급 참조).
  2. 고리국(高離國)-시비 감생(感生)-돈(豚)·마(馬) 구명-어별성교(魚鼈成橋)의 도식:
    • 난생(卵生) 감생 설화(계란만 한 기운), 돼지우리·마구간 유기에도 짐승이 입김으로 살리는 동물 양육담, 활로 물을 쳐 물고기·자라 다리로 건너는 도하(渡河) 기적은, 고구려 주몽(동명성왕) 신화·신라 박혁거세 난생 설화와 같은 북방 건국신화의 정형입니다. 부여를 ’망인(亡人)의 나라’라 자칭한 것(§3 예왕지인 역주 참조)과 함께, 부여 지배층이 외부에서 남하한 정복 집단임을 신화로 정당화한 것입니다.
  3. 부여 동명과 고구려 동명의 관계:
    • 논자(論者)에 따라 부여 동명과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주몽)을 동일인·동계로 보기도 하고 별개 전승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부여-고구려-백제가 같은 신화 모티프를 공유하는 부여계(扶餘系) 문화권이었음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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