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본문 + 배송지(裵松之) 주석 완역. 한문 원문과 번역 1:1 대역, 역주 포함. 연구용 참고본으로 출간서적과 대조 바랍니다.



[특별부록 1] 1970년대에 멈춰 선 낙랑 주석 —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지』 동이전 주석의 실태와 과제

현재 한국에서 한문 원전을 접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찾는 창구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중국정사조선전)’이다. 국가 기관이 공인한 표준 번역과 각주라는 권위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전의 낙랑 관련 주석과 참고문헌 목록을 실증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실상은 놀라울 정도로 빈곤하며 심각하게 지체되어 있다.


1. “향후 연구를 기대한다” — 핵심 쟁점을 외면한 주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지 한전 주석 화면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 본문 및 註 164~166 웹페이지 화면

『삼국지』 한전에서 진한 우거수 염사착이 호래를 데리고 낙랑군에 투항한 대목에 달린 국사편찬위원회 註 166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樂浪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어 기원후 313년에 멸망할 때 까지 계속 存在한 것으로 學界에서는 이해한 바 있었다. 그러나 漢四郡의 위치비정과 아울러 과연 樂浪을 지난날 이해한 바 대로 따라야 하는가 하는 反論도 이미 나온 바 있어 이 問題도 向後의 연구를 기대하여야 할 것 같다. - 첫째, 樂浪을 포함하여 漢四郡을 韓半島內에서 求하는 說이 있어 오늘의 平壤 일대를 그 中心地로 파악한 바 있었다. 이것은 文獻的인 연구 뿐만 아니라 漢代의 遺物들이 이 地域에서 상당수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둘째, 鄭寅普등 民族主義史家들이 樂浪을 포함하여 四郡을 遼東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그는 一部 漢代의 遺物들이 뒤에 만든 모조품임을 주장하면서 不信하고 있다. - 셋째, 考古學上으로 漢代의 遺物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前漢時代의 遺物·遺蹟보다는 後漢代의 遺物들이 대부분임을 다시 注目할 필요가 있다. - 넷째, 『三國史記』 「高句麗本紀」등에 漢四郡의 樂浪과는 別個의 樂浪기사가 나오는 바 이것도 다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사료상 가장 첨예한 충돌인 ’서기 20년대 낙랑태수의 군현(위략)’과 ’서기 32년 낙랑왕 최리의 낙랑국(삼국사기)’의 모순, 군현과 토착 세력의 관계, 전한·후한 유물의 공백 등 한국 고대사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불과 몇 줄 나열해 놓았을 뿐이다. 그러고는 “과연 낙랑을 지난날 이해한 바대로 따라야 하는가… 향후의 연구를 기대하여야 할 것 같다”라며 아무런 분석이나 사료 비판도 내놓지 않은 채 슬그머니 물러서 있다.


2. 참고문헌의 70%가 일제 식민사학 — 1970년대 멈춰 선 시계

이 주석의 밑천은 덧붙여진 41편의 참고문헌 목록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 조선총독부 관학자들의 논문과 발굴보고서가 70%

목록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한일합방 직후 “한국사는 고대부터 중국의 식민 지배로 출발했다”는 한반도 타율성론(他律性論)을 구축하기 위해 평양 일대 고분을 발굴하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들과 만선사학(滿鮮史觀)의 설계자들이다.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기획 아래 쓰인 일제강점기 관학 보고서들이 아무런 비판적 해제도 없이 21세기 대한민국 국가 데이터베이스의 ’표준 참고문헌’으로 등재되어 있다.

(2) 한국 학계의 연구는 1970년대에서 단절

한국인 학자의 문헌은 정인보·신채호·안재홍 등 해방 직후 저작을 제외하면 이병도(1929, 1930, 1976), 천관우(1977)가 사실상 전부다(1984년 윤내현 논문 1편 제외).

국내 연구진의 시계가 1970년대(이병도의 『한국고대사연구』 간행 시점, 1976년)에서 멈춰 서 있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사업 발주 당시 납품받은 낡은 원고를 이후 40년 가까이 단 한 차례도 손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둔 관료적 타성이 만든 결과다.


3. 고고학 발굴 유물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와 누락된 쟁점들

1980년대 이후 고고학과 금석문 양면에서 일어난 수많은 쟁점과 비판적 연구 성과 역시 국사편찬위원회 주석에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통설이 ’한반도 낙랑군·대방군’의 결정적 물증으로 제시해 온 대표적 유물들에 대해 학계 일각에서 제기해 온 중대한 사료적·고고학적 문제제기들은 다음과 같다.

  1. 낙랑 목간의 완전 누락과 위조 의혹 논쟁:
  2. 점제현신사비(黏蟬縣神祠碑)의 석재 논쟁과 반입 조작 의혹:
  3. 대방태수 장무이묘(張撫夷墓) 벽돌과 무덤 양식의 재검토:
  4. 요서 호도시(금서시) 태집둔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 출토의 충격:
  5. 전한(기원전 108년 직후) 유적의 실종과 후대 유물 편중의 역설:

4. 『신편한국사』 스스로 자인한 “한사군의 요동 체류와 실질적 통제 부재”

놀랍게도 국사편찬위원회가 직접 발간한 공식 역사서인 『신편한국사』(권4, 한사군의 설치와 변천 ) 스스로가 한사군의 한반도 직접 지배설이 안고 있는 사료적 모순을 다음과 같이 자인(自認)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한사군을 중국의 직접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이와는 달리 고조선세력과의 계속적인 군사분쟁상태에서 설치하려고 계획만 했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데 후자가 오히려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들 한사군으로 통칭되는 고조선지역의 중국군현 가운데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위만조선 중심지의 군현 이외에는 실질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며, 현도군의 경우 고조선과의 관계보다는 중국내의 군현으로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사료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이들 지방관은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임명된 이후에도 현지에 부임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군현민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구려가 요동군을 침공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고 하는 사실은 낙랑과 대방의 최고 책임자들이 자신들의 부임지가 아닌 요동지역에 머물고 있었으며, 따라서 군현통제의 내용 또한 실질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서술의 근거가 되는 『삼국사기』 태조대왕 94년(서기 146년) 기사(“고구려가 요동군 서안평을 침공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대단히 중요한 사료적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 더해 후한 광무제 시기 “토인(土人) 왕조(王調)가 난을 일으켜 스스로 낙랑태수를 칭한 사건(서기 24~30년)”과 곧이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낙랑왕 최리(서기 32년)”의 출현은, 왕망 혼란기에 대동강 유역이 중국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토착 호족 중심의 독자적 자립 정권(낙랑국)으로 분립했음을 증명한다.

한쪽(신편한국사)에서는 사료의 모순에 밀려 “실질적 통제가 없었고 관료들이 요동에 머물렀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작 국민들이 사료를 읽는 공인 데이터베이스(중국정사조선전) 주석에서는 일제 만선사학자들의 논문만 링크해 둔 채 입을 닫아버리는 것—이것이 바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자기모순이다.


5. 대방군 황해도설의 사료적 모순과 요하 축선설: 지리 비정과 침공로의 불일치

한국 고대사 통설은 대방군(帶方郡)이 황해도 사리원(봉산) 일대에 있었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비판적 연구자들은 원전 사료와 군사 지리적 모순을 추적하여 대방군 황해도설의 사료적 취약성과 요하 서쪽 존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주요 논거들은 다음과 같다.

  1. 이병도의 ‘둔유(屯有)=황주(黃州)’ 음운 유추의 맹점:
  2. 수양제의 24로군 진격로와 한사군 속현명의 일치:
  3. 미천왕의 정복 축선: 서안평(311) → 낙랑(313) → 대방(314)의 지리적 연속성:
  4. 평양 보성리 서기 200년대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의 역설:

6. 낙랑군 수성현(遂成縣)과 진장성 동단의 비정 논쟁: 황해도 수안설의 사료적 모순과 갈석산

한사군 지리 비정에서 가장 왜곡이 심각한 지점 중 하나는 바로 낙랑군 수성현(遂成縣)과 진시황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관한 문제이다.

  1. 식민사학의 ‘수성(遂成)=수안(遂安)’ 음운 비정과 동북공정의 빌미:
  2. 사료가 증언하는 진장성의 동단: 갈석산(碣石山):

7. 낙랑과 ’평양(平壤)’의 지리 비정 논쟁: 동천왕의 평양 천도와 양대 학술 시각

고구려사 연구에서 또 하나의 첨예한 쟁점은 서기 244~245년 조위(曹魏) 관구검(毌丘儉)의 침공 직후 벌어진 동천왕의 ‘평양 천도’(247년)와 관구검 군대의 ‘낙랑 퇴각’ 기록을 둘러싼 지리 비정 논쟁이다.

(1) 사료상의 본질적 의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관구검 침공으로 수도 환도성이 파괴되자 동천왕은 247년 평양(平壤)으로 사직을 옮겼다. 그런데 앞서 고구려 결사대(밀우·유유)의 반격으로 패퇴한 위나라 관구검 군사가 물러난 곳 역시 ’낙랑(樂浪)’이었다.

(2) 주류 역사학계의 해석: “동천왕의 평양은 5세기 대동강 평양이 아니다”

이병도, 노태돈, 여호규, 임기환 등 주류 역사학계 연구자들은 정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 장수왕 이전 고구려 초기 사료에 등장하는 ’평양’과 5세기(427년) 장수왕이 천도한 ’대동강 평양’을 엄격히 구분한다.

(3) 민족사학 및 비판적 연구자들의 해석: “낙랑과 평양은 요동·요하 방면에 있었다”

반면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 등 민족사학계와 비판적 연구자들은 전혀 다른 지평에서 이 모순을 해석한다.

(4) 학술적 시사점

이처럼 동천왕의 평양 천도 기사는, 주류 학계조차 “당시의 평양이 대동강 평양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인정할 만큼 고대 지명의 이동과 복수성을 보여주는 핵심 사례이다. 나아가 이는 대동강 평양을 기원전 108년부터 400여 년간 고정불변의 단일한 중국 군현 치소로만 간주해 온 단순 도식이 고대 동북아의 실제 군사·외교 사료들과 얼마나 자주 파열음을 내는지를 웅변한다.


8. 사료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서를 읽는다는 것은 한문을 한글로 기계 번역하고 인명·지명 몇 개에 주를 다는 작업에 그칠 수 없으며, 단편적인 통계 파편 하나로 거대한 역사의 숲을 재단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물음들을 끈질기게 던지고, 사료 간의 모순을 비교하며, 식민사관의 관성을 걷어내는 작업이 사료 비판의 본령이다.

사람은 본래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게 마련이어서, 한 번 기존의 도그마나 프레임에 갇히면 오직 자신에게 유리한 단편 정보만 보이고 불편한 거대한 사료의 숲은 ‘애써 모른 척’ 외면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학의 출발점은 바로 그 자기 확증편향의 굴레를 깨고, 1차 사료 전체가 웅변하는 거대한 입체적 진실과 정직하게 마주하는 데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멈춰 선 주석은 우리가 왜 고대 사료를 더 비판적이고 입체적인 시선으로 다시 읽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9. 학술 참고문헌 및 사료 목록 (Bibliography)

본 특별부록 및 낙랑군·대방군 관련 사료 비판에서 직·간접적으로 검토되고 인용된 국내외 1차 사료와 주요 학술 논문, 단행본, 고고학 발굴 보고서 목록이다.

1. 1차 사료 (Primary Historical Texts)

2. 초원 4년 호구 목간 및 낙랑 군현 연구

3. 평양 일대 고분 자료 및 네트워크·통계 고고학 연구

4. 낙랑군·패수·군현 위치 논쟁 및 비판 연구

5. 국가 공인 편찬서 및 공공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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