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수(陳壽) 본문 + 배송지(裵松之) 주석 완역. 한문 원문과 번역 1:1 대역, 역주 포함. 연구용 참고본으로 출간서적과 대조 바랍니다.
[특별부록 1] 1970년대에 멈춰 선 낙랑 주석 —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지』 동이전 주석의 실태와 과제
현재 한국에서 한문 원전을 접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찾는 창구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중국정사조선전)’이다. 국가 기관이 공인한 표준 번역과 각주라는 권위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전의 낙랑 관련 주석과 참고문헌 목록을 실증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실상은 놀라울 정도로 빈곤하며 심각하게 지체되어 있다.
1. “향후 연구를 기대한다” — 핵심 쟁점을 외면한 주석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 본문 및 註 164~166 웹페이지 화면
『삼국지』 한전에서 진한 우거수 염사착이 호래를 데리고 낙랑군에 투항한 대목에 달린 국사편찬위원회 註 166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樂浪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어 기원후 313년에 멸망할 때 까지 계속 存在한 것으로 學界에서는 이해한 바 있었다. 그러나 漢四郡의 위치비정과 아울러 과연 樂浪을 지난날 이해한 바 대로 따라야 하는가 하는 反論도 이미 나온 바 있어 이 問題도 向後의 연구를 기대하여야 할 것 같다. - 첫째, 樂浪을 포함하여 漢四郡을 韓半島內에서 求하는 說이 있어 오늘의 平壤 일대를 그 中心地로 파악한 바 있었다. 이것은 文獻的인 연구 뿐만 아니라 漢代의 遺物들이 이 地域에서 상당수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둘째, 鄭寅普등 民族主義史家들이 樂浪을 포함하여 四郡을 遼東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그는 一部 漢代의 遺物들이 뒤에 만든 모조품임을 주장하면서 不信하고 있다. - 셋째, 考古學上으로 漢代의 遺物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前漢時代의 遺物·遺蹟보다는 後漢代의 遺物들이 대부분임을 다시 注目할 필요가 있다. - 넷째, 『三國史記』 「高句麗本紀」등에 漢四郡의 樂浪과는 別個의 樂浪기사가 나오는 바 이것도 다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사료상 가장 첨예한 충돌인 ’서기 20년대 낙랑태수의 군현(위략)’과 ’서기 32년 낙랑왕 최리의 낙랑국(삼국사기)’의 모순, 군현과 토착 세력의 관계, 전한·후한 유물의 공백 등 한국 고대사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불과 몇 줄 나열해 놓았을 뿐이다. 그러고는 “과연 낙랑을 지난날 이해한 바대로 따라야 하는가… 향후의 연구를 기대하여야 할 것 같다”라며 아무런 분석이나 사료 비판도 내놓지 않은 채 슬그머니 물러서 있다.
2. 참고문헌의 70%가 일제 식민사학 — 1970년대 멈춰 선 시계
이 주석의 밑천은 덧붙여진 41편의 참고문헌 목록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 조선총독부 관학자들의 논문과 발굴보고서가 70%
목록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 나카 미치요(那珂通世) (1894),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1909~1915), 이마니시 류(今西龍) (1910),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912),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912)
-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919~1936),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하라다 요시토(原田淑人),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이들은 한일합방 직후 “한국사는 고대부터 중국의 식민 지배로 출발했다”는 한반도 타율성론(他律性論)을 구축하기 위해 평양 일대 고분을 발굴하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들과 만선사학(滿鮮史觀)의 설계자들이다.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기획 아래 쓰인 일제강점기 관학 보고서들이 아무런 비판적 해제도 없이 21세기 대한민국 국가 데이터베이스의 ’표준 참고문헌’으로 등재되어 있다.
(2) 한국 학계의 연구는 1970년대에서 단절
한국인 학자의 문헌은 정인보·신채호·안재홍 등 해방 직후 저작을 제외하면 이병도(1929, 1930, 1976), 천관우(1977)가 사실상 전부다(1984년 윤내현 논문 1편 제외).
국내 연구진의 시계가 1970년대(이병도의 『한국고대사연구』 간행 시점, 1976년)에서 멈춰 서 있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사업 발주 당시 납품받은 낡은 원고를 이후 40년 가까이 단 한 차례도 손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둔 관료적 타성이 만든 결과다.
3. 고고학 발굴 유물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와 누락된 쟁점들
1980년대 이후 고고학과 금석문 양면에서 일어난 수많은 쟁점과 비판적 연구 성과 역시 국사편찬위원회 주석에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통설이 ’한반도 낙랑군·대방군’의 결정적 물증으로 제시해 온 대표적 유물들에 대해 학계 일각에서 제기해 온 중대한 사료적·고고학적 문제제기들은 다음과 같다.
- 낙랑 목간의 완전 누락과 위조 의혹 논쟁:
- 1990년대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기원전 45년의 「낙랑군 초원 4년 호구부(初元四年戶口簿)」 목간이 출토되었다. 낙랑군 25개 현의 구체적인 호구 수와 통치 편제를 보여주는 1차 행정 문서가 확인되었음에도 공인 주석에는 언급조차 없다.
- 더욱이 이 목간은 강단사학에서 평양 낙랑군설의 물증으로 내세우는 한편, 학계 일각에서는 문장의 한국어순 문제, 한나라 군현제 및 목독(木牘) 제작법과의 불일치, 관료 위계 질서 오류 등을 근거로 일제강점기 위작 또는 후대 조작이라는 비판적 의혹(김종서, 2016)이 제기될 만큼 첨예한 진위 논쟁의 대상이다. 공인 주석은 목간의 존재 자체도, 이러한 비판적 검토도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 점제현신사비(黏蟬縣神祠碑)의 석재 논쟁과 반입 조작 의혹:
- 1913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평남 온천군 성현리에서 발견했다고 보고한 점제현신사비는 ’낙랑군 점제현’이 평안남도에 실재했음을 입증하는 최대 근거로 선전되어 왔다.
- 그러나 연세대 손보기 교수의 증언과 북한 고고학계의 암석 성분 분석에 따르면, 비석의 화강암 석재는 평남 온천 현지 암석과 일치하지 않고 중국 하북성 갈석산·산해관 일대의 석재와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되었다. 일제 관학자들이 식민사관의 ’한사군 한반도설’을 조작·확증하기 위해 중국 현지의 비석을 배로 반입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다. (단, 주류 학계 및 일부 지질학 연구에서는 온천군 일대 현지 화강암 광맥과의 일치성을 주장하며 현지 제작설을 옹호하는 등 석재 감정을 둘러싼 학술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대방태수 장무이묘(張撫夷墓) 벽돌과 무덤 양식의 재검토:
- 1911년 황해도 사리원(봉산)에서 발견되어 대방군 황해도설의 유일한 고고학적 근거가 된 ‘사군대방태수장무이’ 명문 벽돌 역시 고고학적으로 다양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 벽돌 명문 중 “조주부가 명하여 벽돌을 만들었다(趙主簿 令塼…)”는 구절과 관련하여, 관직명 ’주부’는 한나라 군현의 속관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했으나, 무덤의 널돌 천장 구조(말각조정), 석회 사용, 명문의 서풍 등이 4세기 중엽 고구려계 전축분 양식과 긴밀히 통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장무이가 고구려에 피랍되어 사망한 관리였거나, 대방군 멸망 후 4세기 중엽 고구려 지배하에서 고구려계 인물에 의해 묘가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함께 논의된다.
- 요서 호도시(금서시) 태집둔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 출토의 충격:
- 통설은 한사군 중 임둔군을 한반도 동해안 함경남도 함흥·영흥 일대로 비정해 왔다.
- 그러나 중국 랴오닝성 후루다오(호도시, 구 금서시 錦西市) 태집둔(邰集屯) 소황지 토성 유적에서 실제 한나라 시기의 관인인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封泥)가 발굴되고, 주변에서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행정 관인의 날인 흔적인 봉니가 요서 발해만 연안에서 출토된 사실은, 임둔군이 함경도가 아니라 요서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정면으로 제기하는 강력한 고고학적 반증이다.
- 전한(기원전 108년 직후) 유적의 실종과 후대 유물 편중의 역설:
-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군현을 설치했다는 기원전 108년 직후, 초기 100여 년간(전한 전반기)의 치소 관아 건축 터와 공문서, 행정 지층은 평양 대동강변에서 실질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 평양 일대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중국계 유물(칠기, 청동거울, 전축분 벽돌 등)의 90% 이상은 후한 말~위진(서기 2~3세기)의 것이다. 북한 학계의 2,200여 기 고분 발굴에서도 초기 한나라 관아의 직접 지배 물증은 결손되어 있으며, 토착 묘제 위에 후대에 이르러 유물이 유입되었음을 보여준다.
- 초기 100년의 관아 지층이 텅 비어 있는 현상은, 낙랑군 치소가 애초 평양이 아니라 요동·요서에 설치되었거나 대동강 유역이 토착 독립 정권(낙랑국)의 영역이었음을 시사하는 뼈아픈 고고학적 모순이다.
4. 『신편한국사』 스스로 자인한 “한사군의 요동 체류와 실질적 통제 부재”
놀랍게도 국사편찬위원회가 직접 발간한 공식 역사서인 『신편한국사』(권4, 한사군의 설치와 변천 ) 스스로가 한사군의 한반도 직접 지배설이 안고 있는 사료적 모순을 다음과 같이 자인(自認)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한사군을 중국의 직접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이와는 달리 고조선세력과의 계속적인 군사분쟁상태에서 설치하려고 계획만 했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데 후자가 오히려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들 한사군으로 통칭되는 고조선지역의 중국군현 가운데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위만조선 중심지의 군현 이외에는 실질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며, 현도군의 경우 고조선과의 관계보다는 중국내의 군현으로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사료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이들 지방관은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임명된 이후에도 현지에 부임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군현민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구려가 요동군을 침공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고 하는 사실은 낙랑과 대방의 최고 책임자들이 자신들의 부임지가 아닌 요동지역에 머물고 있었으며, 따라서 군현통제의 내용 또한 실질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서술의 근거가 되는 『삼국사기』 태조대왕 94년(서기 146년) 기사(“고구려가 요동군 서안평을 침공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대단히 중요한 사료적 질문을 던진다.
- 고구려가 공격한 곳은 평양이 아니라 압록강 하구·요동 방면의 서안평(西安平)이었다. 그런데 왜 평양에 있어야 할 대방현령이 요동에서 맞아 죽고, 낙랑태수의 가족이 요동에서 사로잡히는가?
-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대로 “태수가 부임지에 가지 않고 요동에 머물러 실질적 통제가 없었다”고 보든, 비판적 연구자들의 주장대로 “애초에 낙랑·대방의 치소와 관료 거점이 요동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든, “한나라가 평양 대동강 유역을 400년간 온전히 직접 지배했다”는 단순 통설 도식은 성립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해 후한 광무제 시기 “토인(土人) 왕조(王調)가 난을 일으켜 스스로 낙랑태수를 칭한 사건(서기 24~30년)”과 곧이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낙랑왕 최리(서기 32년)”의 출현은, 왕망 혼란기에 대동강 유역이 중국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토착 호족 중심의 독자적 자립 정권(낙랑국)으로 분립했음을 증명한다.
한쪽(신편한국사)에서는 사료의 모순에 밀려 “실질적 통제가 없었고 관료들이 요동에 머물렀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작 국민들이 사료를 읽는 공인 데이터베이스(중국정사조선전) 주석에서는 일제 만선사학자들의 논문만 링크해 둔 채 입을 닫아버리는 것—이것이 바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자기모순이다.
5. 대방군 황해도설의 사료적 모순과 요하 축선설: 지리 비정과 침공로의 불일치
한국 고대사 통설은 대방군(帶方郡)이 황해도 사리원(봉산) 일대에 있었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비판적 연구자들은 원전 사료와 군사 지리적 모순을 추적하여 대방군 황해도설의 사료적 취약성과 요하 서쪽 존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주요 논거들은 다음과 같다.
- 이병도의 ‘둔유(屯有)=황주(黃州)’ 음운 유추의 맹점:
- ’대방군 황해도설’의 유일한 문헌적 뿌리는 이병도가 1929년 「진번군고」에서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의 분주(分註)에 적힌 옛 이름 “동홀(冬忽), 일운 우동어홀(于冬於忽)”을 끌어와 “우동어홀의 동어(冬於)와 중국 지명 둔유(屯有)의 음이 비슷하니 둔유현은 황주다”라고 자의적으로 단정한 데서 출발했다.
- 단지 발음이 비슷하다는 빈약한 추정 하나로 둔유현을 황주에 비정하고, 그 남쪽을 몽땅 대방군으로 못박아버린 것이 오늘날 통설의 실체이다.
- 수양제의 24로군 진격로와 한사군 속현명의 일치:
- 서기 612년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탁군(북경)에서 편성한 24개 군의 진격 도로(좌12군: 누방·장잠·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 우12군: 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해·답돈·숙신·갈석·동이·대방·양평)는 한나라 군현의 속현 지명들과 완벽히 일치한다.
- 당시 수나라 대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패퇴하였는데, 이 군사 진격로에 ‘대방도(帶方道)’와 요동의 ’양평도(襄平道)’, ‘임둔도(臨屯道)’가 나란히 편성되어 있다. 만약 대방이 황해도라면, 요동성도 넘지 못한 수나라 대군이 황해도 진격로부터 편성하여 군사를 출발시켰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 아울러 『진서(晉書)』 지리지에서도 낙랑·대방·현도가 요서·요동 지역을 포괄하는 ‘평주(平州)’에 나란히 배속되어 있어, 대방군이 발해만~요하 축선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 미천왕의 정복 축선: 서안평(311) → 낙랑(313) → 대방(314)의 지리적 연속성:
- 『삼국사기』 미천왕 본기에서 고구려는 서기 311년 요동의 관문인 서안평(西安平)을 함락한 뒤, 313년 낙랑을 치고, 314년 남쪽의 대방을 차례로 정복한다.
- 서안평을 뚫자마자 낙랑과 대방이 1년 간격으로 연쇄 붕괴했다는 것은, 세 지역이 요동과 요하를 잇는 단일 군사 진격로상에 인접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 평양 보성리 서기 200년대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의 역설:
- 평양 낙랑구역 보성리에서 서기 3세기 초(200년대) 고구려 양식의 벽화고분이 발굴되었다.
- 통설대로 당시 평양이 낙랑군의 번화한 치소이자 중국 관아의 중심지였다면, 적국인 고구려 귀족의 벽화무덤이 어떻게 평양 한복판에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고고학적 모순이 발생한다.
6. 낙랑군 수성현(遂成縣)과 진장성 동단의 비정 논쟁: 황해도 수안설의 사료적 모순과 갈석산
한사군 지리 비정에서 가장 왜곡이 심각한 지점 중 하나는 바로 낙랑군 수성현(遂成縣)과 진시황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관한 문제이다.
- 식민사학의 ‘수성(遂成)=수안(遂安)’ 음운 비정과 동북공정의 빌미:
-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간사였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는 「낙랑군 수성현 및 진 장성 동단에 관한 고찰」에서 『한서』 지리지 수성현조의 “진나라가 쌓은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다(秦築長城所起)”라는 주석을 근거로,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였다.
- 이병도 역시 스승의 설을 그대로 계승하여 “수성(遂成)과 수안(遂安)은 음이 서로 비슷하다”는 단순 추정에 기대어 만리장성의 동단이 황해도 수안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 이 무비판적인 비정은 현대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 지도에 그대로 흡수되어, 진나라 만리장성이 하북성과 만주를 지나 한반도 황해도까지 깊숙이 뻗어 들어간 기형적인 지도를 전 세계 교과서에 유포하는 치명적 빌미를 제공하였다.
- 사료가 증언하는 진장성의 동단: 갈석산(碣石山):
- 『사기』 진시황본기 시황 32년(기원전 215년)조에는 분명히 “진시황이 갈석(碣石)에 이르러 연나라 사람 노생에게 명하여 귀신을 찾게 하고… 몽염으로 하여금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의 오랑캐를 치고 만리장성을 쌓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사기』 몽염열전에서도 진장성은 서쪽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동쪽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고 명시되어 있을 뿐, 한반도 황해도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고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서기 612년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선언하며 내린 조서에서도 “고구려는 무리가 혼미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하고 있다(崇聚渤碣之間)”고 일갈하였다. 수나라 군사가 북경(탁군)에서 출발하며 고구려가 차지했다고 비난한 ’갈석과 발해 사이’는 결코 황해도가 될 수 없으며, 하북성 창려·노룡·당산 일대의 발해만 연안을 가리킨다.
- 낙랑군 수성현과 진장성의 동단 갈석산은 본래 요서~하북성 접경에 위치했던 지명임에도, 일제 관학자들의 자의적인 음운 유추 하나로 인해 만리장성이 졸지에 한반도 허리까지 끌려 내려온 역사의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거듭되는 이유다.
7. 낙랑과 ’평양(平壤)’의 지리 비정 논쟁: 동천왕의 평양 천도와 양대 학술 시각
고구려사 연구에서 또 하나의 첨예한 쟁점은 서기 244~245년 조위(曹魏) 관구검(毌丘儉)의 침공 직후 벌어진 동천왕의 ‘평양 천도’(247년)와 관구검 군대의 ‘낙랑 퇴각’ 기록을 둘러싼 지리 비정 논쟁이다.
(1) 사료상의 본질적 의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관구검 침공으로 수도 환도성이 파괴되자 동천왕은 247년 평양(平壤)으로 사직을 옮겼다. 그런데 앞서 고구려 결사대(밀우·유유)의 반격으로 패퇴한 위나라 관구검 군사가 물러난 곳 역시 ’낙랑(樂浪)’이었다.
- 만약 통설대로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실재했다면, “고구려 국왕이 적군(위나라 대군)이 패퇴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의 본거지 한복판(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심각한 사료적 모순이 발생한다.
- 이 상식 밖의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한국 학계에서는 크게 두 갈래의 연구 흐름이 형성되어 왔다.
(2) 주류 역사학계의 해석: “동천왕의 평양은 5세기 대동강 평양이 아니다”
이병도, 노태돈, 여호규, 임기환 등 주류 역사학계 연구자들은 정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 장수왕 이전 고구려 초기 사료에 등장하는 ’평양’과 5세기(427년) 장수왕이 천도한 ’대동강 평양’을 엄격히 구분한다.
- 보통명사로서의 ‘평양’: 고구려어의 ’펴라(벌판·평평한 땅)’를 한자로 음차한 지명으로, 고구려 영역 내에는 시기별로 여러 곳의 ’평양’이 존재했다는 해석이다.
- 지리적 비정: 동천왕 21년에 사직을 옮긴 평양성은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환도산성이 파괴된 후 방어와 수습에 적합한 압록강 중류(만포·강계 일대의 독로강 유역) 또는 국내성 인근의 평지 방어 거점으로 비정한다. 당시 대동강 유역에는 여전히 위나라 낙랑군이 엄존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가 대동강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3) 민족사학 및 비판적 연구자들의 해석: “낙랑과 평양은 요동·요하 방면에 있었다”
반면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 등 민족사학계와 비판적 연구자들은 전혀 다른 지평에서 이 모순을 해석한다.
- 신채호의 전후 삼한설과 지명 이동론: 신채호는 일찍이 『조선상고사』에서 고대의 낙랑·평양·대방 등의 무대가 본래 요동과 만주 일대에 있었으며, 후대에 한반도로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지명이 모방·중복되었다고 파악했다. 평양(平壤)이 고유어 ’펴라’에서 유래했다는 음운학적 통찰 역시 신채호가 선구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 요서·요동 낙랑설: 윤내현과 비판적 연구자들은 관구검 침공 당시 위나라 군대의 이동 경로와 동천왕의 피난 노정을 재추적하여, 관구검이 물러간 낙랑과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 모두가 한반도가 아닌 요서~요동 축선상에 존재했다고 파악한다.
(4) 학술적 시사점
이처럼 동천왕의 평양 천도 기사는, 주류 학계조차 “당시의 평양이 대동강 평양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인정할 만큼 고대 지명의 이동과 복수성을 보여주는 핵심 사례이다. 나아가 이는 대동강 평양을 기원전 108년부터 400여 년간 고정불변의 단일한 중국 군현 치소로만 간주해 온 단순 도식이 고대 동북아의 실제 군사·외교 사료들과 얼마나 자주 파열음을 내는지를 웅변한다.
8. 사료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서를 읽는다는 것은 한문을 한글로 기계 번역하고 인명·지명 몇 개에 주를 다는 작업에 그칠 수 없으며, 단편적인 통계 파편 하나로 거대한 역사의 숲을 재단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 왜 『위략』에서는 관군이 파견되는 군현인데, 불과 10년 뒤 『삼국사기』에서는 호동왕자를 맞이하는 독립된 ’낙랑왕 최리’가 등장하는가?
- 왜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쳤을 때 평양에 있어야 할 낙랑태수의 처자가 잡히고 대방령이 죽었는가?
- 왜 관구검이 물러난 곳이 낙랑인데, 환도성을 잃은 동천왕은 곧바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수 있었는가?
- 왜 수양제의 24로군 진격로에 대방도·양평도·임둔도가 나란히 요하 축선에 배치되었는가?
- 왜 진장성의 동단인 갈석산과 낙랑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으로 둔갑하여 만리장성이 한반도로 들어왔는가?
- 왜 요서 태집둔에서 한나라 임둔태수의 관인 봉니가 출토되고, 평남 점제현비의 석재는 갈석산 암석과 일치하는가?
- 왜 염사착은 평양에서 경상도 진한으로 가면서 육로를 두고 굳이 ’큰 배(大船)’를 타고 바다로 나갔는가?
- 1911년 한일합방 이듬해 조선총독부가 찾아냈다는 ‘대방태수 장무이 묘’ 벽돌에 왜 고구려의 관직인 ’주부(主簿)’가 새겨져 있는가?
-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었다는 낙랑군의 직접 지배 관아 유적은 왜 100여 년간(전한) 텅 비어 있다가 수백 년 뒤 후한 말~위진 시기에 가서야 유물이 쏟아지는가?
이러한 물음들을 끈질기게 던지고, 사료 간의 모순을 비교하며, 식민사관의 관성을 걷어내는 작업이 사료 비판의 본령이다.
사람은 본래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게 마련이어서, 한 번 기존의 도그마나 프레임에 갇히면 오직 자신에게 유리한 단편 정보만 보이고 불편한 거대한 사료의 숲은 ‘애써 모른 척’ 외면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학의 출발점은 바로 그 자기 확증편향의 굴레를 깨고, 1차 사료 전체가 웅변하는 거대한 입체적 진실과 정직하게 마주하는 데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멈춰 선 주석은 우리가 왜 고대 사료를 더 비판적이고 입체적인 시선으로 다시 읽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9. 학술 참고문헌 및 사료 목록 (Bibliography)
본 특별부록 및 낙랑군·대방군 관련 사료 비판에서 직·간접적으로 검토되고 인용된 국내외 1차 사료와 주요 학술 논문, 단행본, 고고학 발굴 보고서 목록이다.
1. 1차 사료 (Primary Historical Texts)
- 진수(陳壽),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
- 배송지(裵松之) 주, 어환(魚豢) 찬, 『위략(魏略)』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권88 「몽염열전(蒙恬列傳)」
- 반고(班固), 『한서(漢書)』 권28 「지리지(地理志)」
- 범엽(范曄),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 권1 「광무제기(光武帝紀)」
- 방현령(房玄齡) 외, 『진서(晉書)』 권14 「지리지(地理志)」
- 위징(魏徵) 외, 『수서(隋書)』 권4 「양제기(煬帝紀)」 (대업 8년 24군 조서)
- 상흠(桑欽) 찬, 역도원(酈道元) 주, 『수경주(水經注)』 권13 「습수(濕水)」·「패수(浿水)」
- 허신(許愼), 『설문해자(說文解字)』 권11 「수부(水部)」
- 김부식(金富軾),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동천왕, 태조대왕, 미천왕조), 「백제본기」, 「신라본기」
- 일연(一然),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2. 초원 4년 호구 목간 및 낙랑 군현 연구
- 박대재, 「A New Approach to the Household Register of Lelang Commandery」,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 22, No. 2, 2017, pp. 37-72. ResearchGate 서지정보
정백동 364호분 출토 낙랑군 호구 목간을 분석하여 호구 통계 모델과 군현 지배의 성격을 재검토한 논문.
- 김병준, 「樂浪郡 初期의 編戶過程과 ‘胡漢稍別’」, 『목간과 문자』 창간호, 2008, 139~186쪽. DBpia 논문정보
초원 4년 낙랑 목간을 통해 낙랑군 초기의 호적 편제 과정과 한족 관인·토착 주민의 신분 구분을 분석.
- 윤용구 편, 『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동북아역사재단 자료
- 윤용구, 「낙랑군 초기의 군현 지배와 호구 파악」
- 이성제, 「낙랑의 군현 재편과 예(濊)」
- 윤선태, 「한사군의 역사지리적 변천과 ‘낙랑군 초원 4년 현별 호구부’」
- 김종서, 「평양 정백동 출토 ’낙랑군 호구 목간’의 진위 문제」, 『백산학보』 제105호, 2016, 5~45쪽.
목간의 문장 어순, 목독 제작 방식, 한대 관제 모순을 근거로 제기된 위작·조작 가능성 비판 연구.
3. 평양 일대 고분 자료 및 네트워크·통계 고고학 연구
- 고일홍, 「네트워크 시각화와 고고학 자료의 활용: 낙랑고분 자료를 중심으로」, 『인문논총』 제79권 제1호,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2, 49~84쪽. 서울대 인문논총 원문 PDF
낙랑 고분 자료 축적 현황과 네트워크 분석 기법을 검토하고, 평양 일대에서 1990~1992년 발굴된 2,200여 기 고분 자료의 분포와 한계를 고찰.
-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낙랑유적발굴보고』 (전3권),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3.
평양 낙랑구역 정백동·정오동 등 대규모 고분 발굴에 대한 북한 학계의 종합 실측 보고서.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가유산 지식이음, 「낙랑구역고분군(樂浪區域古墳群)」 고고유적 데이터베이스. 국가유산포털 자료
평양 낙랑구역 고분군의 발굴 현황, 고분 구조 변천 및 조사사적 한계 정리.
4. 낙랑군·패수·군현 위치 논쟁 및 비판 연구
- 기경량, 「낙랑군 재평양설과 패수」, 『한국고대사연구』 제84호, 2016.
주류 강단사학의 입장에서 대동강 패수설과 평양 낙랑군설을 옹호하고 요서설을 반박한 대표 논문.
- 기경량,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동단: 『사기』·『한서』의 사료 비판과 통설의 재검토」, 『한국고대학보』 제39호, 2017.
낙랑군 수성현과 진장성 동단 비정을 둘러싼 문헌 사료 검토.
-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는가』, 김영사, 2015.
조선총독부 식민사학과 동북아역사재단 지도 사업의 한사군 한반도설 카르텔을 비판한 저작.
-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아침, 2006.
『사기』, 『한서』, 『수경주』 1차 사료를 근거로 한사군 요서설 및 패수 난하설을 체계화.
- 이덕일, 『한국유사: 식민사관을 허무는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시선』, 다산북스, 2018.
평양 낙랑유물의 성격, 점제현비 조작 의혹, 낙랑군과 낙랑국의 이원성 집중 분석.
- 윤내현, 『고조선 연구: 고조선의 역사와 강역에 관한 체계적 고찰』, 일지사, 1994.
고조선의 서쪽 경계(난하)와 한사군의 요서 존치론을 집대성한 고대사 명저.
- 윤내현, 「한사군의 설치와 그 위치」, 『역사학보』 제103호, 1984.
해방 후 한국 학계에서 최초로 사료적·지리적으로 한사군 요서설을 본격 제기한 논문.
- 손보기, 「점제현신사비의 암석 성분과 산지 추적에 관한 지질학적 감정」, 1982년 구술 증언 및 한국고고학회 발표 요지.
평남 온천 점제현비의 화강암이 중국 하북성 갈석산 산지 암석과 일치한다는 실측 감정 증언.
5. 국가 공인 편찬서 및 공공 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 제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2002. 신편한국사 웹서비스
제3장 2절 「한사군의 설치와 변천」에서 태수가 부임하지 않고 요동에 머물렀으며 한사군의 실질적 통제가 부재했음을 공인 자인한 기술 수록.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 본문 및 註 164~166. DB 원문 링크
일제 식민사학자 10여 명의 논문만 등재된 채 “향후 연구를 기대한다”며 40년째 방치된 공인 주석.
한퓨쳐 / 역사자료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