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수(陳壽) 본문 + 배송지(裵松之) 주석 완역. 한문 원문과 번역 1:1 대역, 역주 포함. 연구용 참고본으로 출간서적과 대조 바랍니다.
[특별부록 6] 낙랑군 위치 논쟁과 『수경주』 패수(浿水) 사료 검증 — 고대 사서의 지리적 상충과 역도원의 평양 오인론
한국 고대사에서 한사군(漢四郡)과 위만조선의 중심 무대였던 낙랑군(樂浪郡)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은 100년이 넘도록 식지 않는 가장 뜨거운 학술 전쟁입니다.
이 논쟁의 핵심 열쇠이자 최대 뇌관은 바로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자 결전의 무대였던 ’패수(浿水)’의 지리적 실체와 흐름 방향입니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 ’패수’라는 이름은 생소하며, 중국의 고대 1차 사서들을 정밀 대조해 보면 사서들 사이에서 패수의 흐름과 바다로 들어가는 방향(하구)에 대해 정면으로 모순·상충되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본 특별부록은 먼저 패수의 명칭 정의와 역사적 변천을 정리한 뒤, 『수경(水經)』 본문과 『설문해자(說文解字)』, 북위(北魏)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 『한서(漢書)』 지리지, 『후한서(後漢書)』 군국지 등 핵심 1차 사료들의 원문과 정밀 번역을 바탕으로, 패수의 ‘동입해(東入海)’ 대 ‘서류(西流)’ 논쟁, 역도원의 고구려 사신(番使) 인터뷰와 사료 개작 경위, 그리고 이를 둘러싼 이덕일 등 비판학계의 ’평양 오인론’과 기경량 등 강단사학계의 반론을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집중 검증합니다.
1. 패수(浿水)란 무엇인가? — 정의, 어원, 역사적 국경과 시대별 이동
(1) 정의와 어원: ’강(江)’을 뜻하는 고대 조선어 보통명사
’패수(浿水)’는 특정 하천만을 가리키는 고정불변의 고유명사라기보다, 본래 고대 한국어(조선어)에서 ‘강(江)’이나 ’물길’, ’벌판을 흐르는 큰 물(펴/벌/바다)’을 가리키던 보통명사의 한자 음차 표기로 이해됩니다.
한국 고대사에서 도읍이나 국경이 이동함에 따라 큰 하천을 가리키던 이름인 ‘패수(浿水)’, ‘패하(浿河)’, ‘패강(浿江)’ 등의 명칭도 함께 남하·이동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서의 편찬 시기와 대상 국가에 따라 패수가 지칭하는 실제 강이 전혀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2) 명칭의 유래와 고조선-중국의 국경선
고조선(古朝鮮) 시기에 패수는 만주와 한반도의 패자였던 고조선과 중국 왕조 사이의 공식 국경선을 이루던 강이었습니다.
- 한 고조 시기의 국경선 확정 (기원전 202년):
『사기(史記)』 권115 「조선열전」에 따르면, 한 고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요동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자, 진나라와 연나라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요동과 고조선의 경계로 삼았다(循遼東故塞, 至浿水爲界)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위만(衛滿)의 패수 도하 (기원전 195년):
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그의 부하 위만이 1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상투를 틀고 호복을 입은 채 서쪽에서 패수를 건너(自浿水西至朝鮮) 고조선 준왕에게 투항해 왔습니다.
- 사신 섭하(涉何) 살해 사건 (기원전 109년):
위만조선 말기, 한 무제의 사신 섭하가 우거왕을 협박하러 왔다가 회유에 실패하고 귀국하는 길에, 자신을 국경까지 정중히 호송하던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기습 살해하고 요동으로 도망친 장소가 다름 아닌 국경선 패수였습니다.
이처럼 패수는 단순한 자연 지리가 아니라, 고조선과 중원 제국의 주권이 맞부딪치던 최전선의 군사적 분계선이었습니다.
(3) 형성 및 변천: 청천강설·압록강설과 요서설의 대립
조선 후기 실학 이래 패수의 실제 위치를 어디로 볼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고증이 이어졌습니다:
- 청천강설 (한백겸·이병도 / 통설):
17세기 초 실학의 선구자인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고조선 시기의 패수를 오늘날의 평안남북도 경계인 청천강(淸川江)으로 비정했습니다. 근대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가 문헌과 지리를 정밀 대조하여 이 설을 학계의 정설로 확립했습니다.
- 문헌 및 지리적 근거: 연나라와 진나라의 장성 유적과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요령성 요양)의 위치를 고려할 때 패수는 요하 이동에 있어야 하므로 대릉하나 난하가 될 수 없다는 점.
- 고고학적 물증: 중국 연나라 계통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과 철기 유물의 출토 상한선과, 한국 고유의 세형동검(細形銅劍) 등 고조선 계통 청동기 유물의 출토지가 청천강을 경계로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
- 압록강설:
패수의 규모와 국경선으로서의 상징성을 중시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고조선 시기의 패수로 보는 견해도 일각에서 제기되었습니다.
- 요서설 (대릉하·난하설 / 비판학계·재야사학):
단국대 윤내현, 이덕일 등은 고조선의 서쪽 강역이 요하 서쪽 하북성 일대까지 뻗어 있었다고 보아, 패수를 요서의 대릉하(大凌河) 또는 하북성의 난하(灤河)로 비정합니다.
- 결정적 문헌 근거: “한반도에 서쪽으로 2천 리 땅이 있는가?”: 『위략』에 따르면 연나라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을 쳐서 “땅 2천여 리를 빼앗고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고 했습니다. 고대 2천 리는 약 800km에 달하는데, 한반도 평양에서 서쪽으로 40~50km(100여 리)만 가도 곧바로 서해 바다이며 한반도 북부 동서 폭 전체도 150200km(400500리)에 불과합니다. 즉, 한반도 서북부에는 서쪽으로 2천 리를 떼어줄 땅 자체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연나라가 2천 리를 빼앗고 고조선과 대치한 패수와 만번한의 실제 공간 무대는 북경(연나라 도읍 계)에서 요서·요동에 이르는 대륙 축선일 수밖에 없다는 사료 비판적 논거입니다.
(4) 삼국시대 이후의 ‘패수’ 지명 이동: 예성강과 대동강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패수’라는 이름은 계속 쓰였으나, 고조선 시기의 청천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영토가 확장·변동하면서 패수의 지칭 대상도 남하했습니다:
- 백제 온조왕 때의 ‘패하(浿河)’ = 예성강(禮成江):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기사에 백제의 북쪽 경계선으로 등장하는 “동쪽으로는 낙랑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패하에 이른다(東到樂浪, 北極浿河)”의 패하는 황해도와 경기도 사이의 예성강을 가리킵니다.
- 고구려 평양성 및 통일신라 때의 ‘패강(浿江)’ = 대동강(大同江):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 평양성을 감싸고 흐르는 대동강이 ‘패수’ 또는 ’패강(浿江)’으로 불렸습니다. 통일신라 성덕왕 34년(735년) 당나라가 신라의 대동강 이남 영유권을 공인한 ‘패강 이남(浿江以南)의 땅’, 그리고 신라 혜공왕 때 대동강 방어를 위해 설치한 군사 요충지 ‘패강진(浿江鎭)’의 패강은 모두 오늘날의 대동강을 지칭합니다.
2. 고대 1차 사서의 정면 충돌: ’동입해(東入海)’인가, ’서류(西流)’인가?
(1) 『수경』 본문과 『설문해자』: “패수는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패수의 위치 논쟁에서 가장 기이하고도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는 한나라 시대의 1차 사서들이 전하는 하천의 흐름 방향입니다.
한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하천 지리서인 『수경(水經)』 본문과, 후한(後漢)의 대학자 허신(許慎, 58~147경)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는 낙랑군의 패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경(水經)』 본문 (후한 말 상흠 저술 추정):
>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 (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설문해자(說文解字)』 권11 수부(水部):
> “패수는 누방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 (許慎云: 浿水出鏤方, 東入海.)
(2) 지리적 정면 모순: 한반도 하천과의 불일치
통설(강단사학)에서는 한사군의 낙랑군 치소를 평양 대동강 남안으로 비정하며, 패수를 청천강이나 대동강으로 지목합니다.
그러나 지리학적으로 한반도 서북부의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재령강 등은 예외 없이 동쪽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서쪽 황해(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전형적인 ‘서류(西流) 하천’입니다. 한반도 내에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 한반도를 가로질러 동해(동쪽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거대한 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나라 당대의 지리 지식을 집대성한 『수경』과 『설문해자』는 왜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東入于海)”고 일관되게 기록했는가? 이 기록은 오랫동안 한사군 한반도설의 치명적인 지리적 난점으로 지적되어 왔습니다.
3. 북위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 개작과 고구려 사신(番使) 인터뷰
(1) 『수경주』 권14 패수조 원문과 1:1 정밀 대역
북위(北魏, 386~534) 시기의 지리학자 역도원(酈道元, 466~527)은 상흠의 『수경』에 방대한 주석을 단 『수경주(水經注)』를 저술하면서, 바로 이 ‘패수 동입해’ 구절에 주목했습니다. 역도원은 『수경』의 원문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다음과 같은 장문의 주석을 남겼습니다.
『수경주(水經注)』 권14 「패수(浿水)」 원문:
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許慎云:浿水出鏤方,東入海。一曰出浿水縣。《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蓋出其縣南逕鏤方也。昔燕人衛滿自浿水西至朝鮮。朝鮮,故箕子國也。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約以八法,而不知禁,遂成禮俗。戰國時,滿乃王之,都王險城,地方數千里,至其孫右渠,漢武帝元封二年,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破渠于浿水,遂滅之。
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又漢興,以朝鮮爲遠,循遼東故塞至浿水爲界。考之今古,於事差謬,蓋《經》誤證也。〉
【현대어 정밀 번역】
(경문)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역도원의 주석) 허신은 이르기를 “패수는 누방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하였고, 일설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고도 하였다. 『십삼주지』에서는 “패수현은 낙랑 동북쪽에 있고, 누방현은 군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대개 그 현의 남쪽에서 나와 누방을 지나는 것이다.
옛날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로부터 서쪽으로 조선에 이르렀다. 조선은 옛 기자(箕子)의 나라다. 기자가 백성을 의로써 가르치고 농사와 길쌈을 후하게 하며 8조법으로 약속하니 금하지 않아도 예속을 이루었다. 전국시대에 위만이 마침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니 땅이 수천 리였다. 그 손자 우거에 이르러 한 무제 원봉 2년에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보내어 우거를 토벌하였다. 패수에서 우거를 격파하여 마침내 멸망시켰는데,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서쪽에서 진격한 한나라 군대가] 패수를 건널 이유가 없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의 도읍(국치: 평양성)이다. 내가 번사[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왕)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 조선현(즉 낙랑군 치소이며 한 무제가 설치한 곳)을 지나며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서』 지리지에서 이르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또 한나라가 일어날 때 조선이 멀리 있으므로 요동 옛 요새를 따라 패수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 옛과 지금을 고찰해 보니 일에 어긋남이 있다. 대개 『수경』 본문이 잘못 고증한 것이다.
(2) 역도원 논리의 핵심 구조
역도원의 논증 방식은 다음의 세 단계로 요약됩니다:
- 군사적 모순 지적: 한나라 원정군(순체·양복)이 서쪽에서 진격하여 패수를 건너 왕검성을 공격했는데,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면 서쪽에서 온 군대가 패수를 건널 리가 없다는 점(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 고구려 사신(番使) 인터뷰: 북위의 수도 낙양에 조공하러 온 고구려 사신에게 평양성의 지형을 직접 물어보았더니, “왕성은 강(패수)의 북쪽에 있고 강물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답했다는 점.
- 『한서』 지리지 인용과 경문(經文) 부정: 『한서』 권28 지리지 낙랑군 패수현 조에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浿水西至增地入海)”라고 되어 있으므로, 고구려 사신의 말과 한서 지리지가 일치하며 따라서 『수경』의 “동입해”는 본문이 잘못된 오류(蓋經誤證也)라고 단정한 점.
4. 비판학계(이덕일 등)의 논거: “평양 조선현설의 시발점은 역도원의 평양 오인”
이덕일 등 재야·비판학계는 『수경주』의 이 기록이야말로 “낙랑군 평양설이 역사적으로 왜곡·고착화된 시발점이자 결정적 스모킹 건”이라고 분석합니다(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 낙랑군 조선현의 평양설 및 대동강설 비판〉, 2017).
(1) 6세기 역도원의 치명적 시대착오: “장수왕의 평양성 ≠ 기원전 2세기 왕검성”
- 역도원의 오인: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서기 427년입니다. 역도원은 그로부터 약 70~80년 뒤인 6세기 초 인물입니다.
- 역도원은 북위에 온 고구려 사신에게 “지금 고구려의 도읍(평양성)이 어디에 있는가? 강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물어보고, 대동강 북안에 위치한 고구려 평양성의 지형을 들었습니다.
- 그리고는 “현재 고구려의 도읍(평양성)이 바로 700년 전 위만조선의 왕검성이자 한나라 낙랑군의 치소(조선현)였을 것”이라고 독단적으로 단정(오인)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2) 『수경』·『설문해자』의 ’동입해(東入海)’가 원형(진실)인 이유
- 비판학계는 1~2세기 후한 시대의 상흠과 허신이 기록한 “동입해”야말로 원래 요서나 요동 발해만 연안에 있었던 진짜 낙랑군과 패수의 지형을 정직하게 반영한 1차 기록이라고 봅니다.
- 발해만 서북쪽(하북성 난하조양금주 일대)의 특정 지형에서는 강이 남동쪽으로 흘러 바다(발해만 동쪽)로 진입할 수 있으며, 고대 문헌의 방위 감각과 합치합니다.
- 그런데 역도원이 6세기 고구려 평양성의 지형(서류)에 꿰맞추기 위해, 한나라 시대의 1차 지리서인 『수경』의 원문을 “경문이 잘못되었다(蓋經誤證)”며 자의적으로 뜯어고쳤다는 것입니다.
(3) 『후한서』 군국지의 “與遼東接(요동과 접함)” 기록
- 『후한서』 권113 군국지(郡國志) 낙랑군 조에는 낙랑군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 “요동과 접하고 있다(與遼東接)”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 이덕일은 고대 중국 지리지에서 두 군(郡)이 접한다고 기술할 때의 방위 서술 원칙상, 낙랑군이 요동의 동쪽(한반도)이 아니라 요동의 서쪽(요서)에 위치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방증이라고 해석합니다.
(4) 왜곡의 확대 재생산: 기자동래설, 당나라의 왜곡, 일제 식민사학
이덕일은 역도원의 이 단편적 착각이 역사 속에서 증폭·고착화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적합니다:
- 고려 중기 사대주의 유학자들의 결합: 김부식 등 고려 유학자들이 중화 사대주의의 일환으로 ‘기자동래설(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봉해져 평양에 왔다)’을 맹신하면서, 평양을 기자의 도읍이자 낙랑군 조선현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함.
- 당나라의 평양 요동 귀속 왜곡: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두면서 평양 일대를 당나라의 내지인 요동(遼東)에 속한 것처럼 관제를 설정함.
- 일제 식민사학과 이병도의 계승: 메이지·다이쇼 시기 조선총독부 관학자들(이나바 이와키치, 이마니시 류)이 “조선은 고대부터 중국의 식민지(낙랑군)였다”는 식민사관(타율성론)을 구축하기 위해 역도원의 평양설을 절대적 정설로 못 박았고, 해방 후 이병도 등 강단사학이 이를 비판 없이 계승함.
5. 강단사학(기경량 등)의 반론: “실지 답사적 사료 비판과 한서 지리지의 정합성”
반면 기경량(〈한국 유사 역사학의 특성과 역사 왜곡의 방식: 이덕일의 역사 서술을 중심으로〉, 『강원사학』 31, 2018)을 비롯한 국내 강단사학계 연구자들은 비판학계의 주장이 문헌 사료 비판의 기본 원리를 무시한 무리한 곡해라고 강력히 반박합니다.
(1) 현지 사신 청문을 통한 정당한 사료 비판
- 강단사학계는 역도원이 단순히 방구석에 앉아 상상으로 주석을 달 것이 아니라, 당시 평양성에 실제로 살고 있던 고구려 사신(番使)을 직접 심문(余訪番使)하여 현지 지형을 확인한 매우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사료 비판을 수행했다고 평가합니다.
- 사신의 증언(“왕성은 패수 북쪽에 있고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은 오늘날 대동강 북안에 자리 잡은 평양성의 실제 지형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2) 『한서』 지리지의 원 기록과의 일치
-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수경』보다 수백 년 앞선 기원후 1세기 전한(前漢)의 정사 『한서』 지리지입니다.
- 『한서』 지리지 낙랑군 패수현 조에는 분명히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浿水西至增地入海)”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따라서 역도원은 자의적으로 내용을 창작한 것이 아니라, 한나라 당대의 1차 정사인 『한서』 지리지와 고구려 현지 사신의 증언이 완벽히 일치함을 확인하고, 그에 반하는 『수경』 본문의 “동입해”를 ’명백한 필사 또는 전승상의 오류(蓋經誤證)’로 바로잡은 정당한 교정이라는 것입니다.
(3) 『수경』·『설문해자』의 ‘동입해’ 단순 오기론
- 상흠(후한 말)과 허신(후한 중기)은 중원 내지에 거주하던 학자들로서, 머나먼 동북 변방 요동과 낙랑의 복잡한 지형에 직접 가보지 못했습니다.
-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방위를 동쪽으로 오기했거나 전승 과정의 착오가 발생한 것일 뿐이며, 이를 빌미로 낙랑군 전체를 요서로 옮기려는 것은 “지엽적인 오기 하나를 잡고 전체 사서 체계를 뒤흔드는 전형적인 침소봉대”라는 비판입니다.
6. 핵심 쟁점 및 사료 대조 비교표
낙랑군 위치와 패수의 흐름을 둘러싼 고대 문헌의 기록과 양측 학설의 해석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패수의 정의와 성격 | 낙랑군을 흐르는 개별 하천 | 낙랑군 조선현(치소)을 지나는 하천 | 고대 조선어의 ’강(江)’을 뜻하는 보통명사 | 특정 하천 고유명사이자 시대별 이동 지명 |
| 패수(浿水)의 흐름 방향 | 동입해(東入海)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감) | 서류입해(西流至增地入海)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감) | 『수경』·『설문』의 동입해가 요서 패수의 원형 | 『한서』·『수경주』의 서류가 대동강의 진실 |
| 패수의 실체 비정 | 요서 발해만 연안 하천 (난하 하류 등) | 한반도 서북부 하천 (대동강 또는 청천강) | 요서~요동 일대 하천 | 고조선=청천강, 삼국=대동강·예성강 |
| 역도원의 고구려 사신 청문 | — | “성(城)은 패수 북쪽에 있고 물은 서쪽으로 흐른다” | 6세기 고구려 평양성을 700년 전 낙랑군으로 착각한 오류 | 현지 거주 사신의 증언을 통한 정당한 실증 검증 |
| 역도원의 ‘蓋經誤證(경의 오류)’ 판정 | — | 『수경』의 ’동입해’를 오류로 규정하고 개작 | 한반도 평양에 맞추기 위한 자의적 사료 왜곡 | 『한서』 지리지와 현지 답사에 입각한 정당한 교정 |
| 『후한서』 군국지 “與遼東接” | — | — | 낙랑군이 요동 서쪽(요서)에 있었음을 증명 | 요동군과 낙랑군이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었음을 의미 |
| 고고학적 출토 유물 해석 | — | — | 요서 태집둔 임둔태수장 봉니 중시, 평양 유물은 무역·낙랑국 | 청천강 경계로 명도전(중국계)과 세형동검(조선계) 구분 |
7. 사료학적 평가와 한국 고대사 지리 복원의 방향
『수경』과 『수경주』를 둘러싼 패수 논쟁은 단순한 하천 명칭 찾기가 아니라, 고대 1차 사료 비판의 방법론과 식민사관 극복의 잣대가 정면 충돌하는 한국 고대사 최고의 쟁점입니다.
- 사료의 복합적 상충 인정: 『수경』 본문과 『설문해자』의 ‘동입해’ 기록은 분명히 실재하는 1차 텍스트이며, 『한서』 지리지와 『수경주』의 ‘서류’ 기록 또한 엄연한 정사의 기록입니다. 어느 한쪽 사료만을 절대화하여 반대쪽 사료를 “단순 오기”나 “날조”로 일방적으로 폄하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 역도원의 중계적 한계 직시: 역도원이 6세기 인물로서 고구려 사신의 증언을 청취한 것은 대단히 값진 실증적 태도였으나, 장수왕 천도 이후의 평양성과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기계적으로 동일시했을 가능성 역시 사료 비판적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 고고학과 문헌의 총체적 교감: 요서 태집둔의 「임둔태수장」 봉니, 청천강 유역의 명도전·세형동검 유물선, 평양 일대 수천 기의 고분과 호구부 목간, 점제현신사비의 석재 논쟁 등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과학적 고고학 성과들을 중국·한국의 지리지 사료들과 입체적으로 대조 검증할 때, 비로소 100년간 얽힌 낙랑군과 패수의 역사적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