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본문 + 배송지(裵松之) 주석 완역. 한문 원문과 번역 1:1 대역, 역주 포함. 연구용 참고본으로 출간서적과 대조 바랍니다.



고구려전(高句麗傳)

1. 고구려의 지리, 5부족 체제, 관제와 풍속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戶三萬。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為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好治宮室,於所居之左右立大屋,祭鬼神,又祀靈星、社稷。其人性凶急,善寇鈔。其國有王,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皁衣先人,尊卑各有等級。東夷舊語以為夫餘別種,言語諸事,多與夫餘同,其性氣衣服有異。本有五族,有涓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本涓奴部為王,稍微弱,今桂婁部代之。漢時賜鼓吹技人,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高句麗令主其名籍。後稍驕恣,不復詣郡,于東界築小城,置朝服衣幘其中,歲時來取之,今胡猶名此城為幘溝漊。溝漊者,句麗名城也。其置官,有對盧則不置沛者,有沛者則不置對盧。王之宗族,其大加皆稱古雛加。涓奴部本國主,今雖不為王,適統大人,得稱古雛加,亦得立宗廟,祠靈星、社稷。絕奴部世與王婚,加古雛之號。諸大加亦自置使者、皁衣先人,名皆達於王,如卿大夫之家臣,會同坐起,不得與王家使者、皁衣先人同列。其國中大家不佃作,坐食者萬餘口,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其民喜歌舞,國中邑落,暮夜男女群聚,相就歌戲。無大倉庫,家家自有小倉,名之為桴京。其人絜清自喜,喜藏釀。跪拜申一腳,與夫餘異,行步皆走。以十月祭天,國中大會,名曰東盟。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頭著幘,如幘而無餘,其小加著折風,形如弁。其國東有大穴,名隧穴,十月國中大會,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置木隧于神坐。無牢獄,有罪諸加評議,便殺之,沒入妻子為奴婢。其俗作婚姻,言語已定,女家作小屋於大屋後,名婿屋,婿暮至女家戶外,自名跪拜,乞得就女宿,如是者再三,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傍頓錢帛,至生子已長大,乃將婦歸家。其俗淫。男女已嫁娶,便稍作送終之衣。厚葬,金銀財幣,盡於送死,積石為封,列種松柏。其馬皆小,便登山。國人有氣力,習戰鬥,沃沮、東濊皆屬焉。又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國,因名之為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번역】 고구려(高句麗)는 요동에서 동쪽으로 1천 리 떨어진 곳에 있다. 남쪽으로는 조선과 예맥, 동쪽으로는 옥저, 북쪽으로는 부여와 접한다. 도읍은 환도(丸都) 산 아래에 정하였고, 영토는 사방 2천 리에 달하며 호수는 3만 호이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평원과 못이 없다. 산골짜기를 따라 집을 짓고 살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농토가 없어 비록 힘써 밭을 갈아 농사를 지어도 백성들의 입에 풀칠하기에 부족하다.

그 풍속은 음식을 아껴 먹고 절약하지만, 궁실을 짓고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들이 사는 집 좌우에 큰 집을 지어 귀신을 제사하고,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 제사를 올린다. 사람들의 성품은 사납고 급하며 노략질을 잘한다.

그 나라에 왕(王)이 있으며, 관직으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雛加),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선인(皁衣先人)이 있어 존비에 따라 각기 등급이 있다.

동이의 옛 전승에는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여겼으니, 언어와 모든 풍속이 부여와 대체로 같으나 성품과 기질, 의복에 차이가 있다.

본래 5개 부족(五族)이 있었으니 소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이다. 본래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차 쇠약해져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하여 왕위를 잇고 있다.

한나라 때 고구려에 고취악대와 악사를 하사하였고, 항상 현도군에서 조정의 관복과 의책(朝服衣幘)을 받아갔으며 고구려현의 현령이 그 명부를 관리했다. 그러나 뒤에 점차 교만해져 더 이상 군의 관아로 오지 않자, 동쪽 국경에 작은 성을 쌓고 그 안에 조복과 의책을 놓아두어 철마다 와서 가져가게 하였으니, 지금 오랑캐들은 여전히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라 부른다. ’구루(溝漊)’란 고구려 말로 ’성(城)’을 뜻한다.

관직을 둘 때 대로를 두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 중 대가(大加)는 모두 고추가라 부른다. 소노부는 본래 나라의 주인이었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을 내지 못하지만 적통의 대인은 고추가라 부를 수 있고 종묘를 세워 영성과 사직에 제사할 권리를 지닌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므로 역시 고추가의 칭호를 받는다.

여러 대가(諸大加)들도 스스로 사자와 조의선인을 두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된다. 이는 마치 중국 경대부(卿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아서, 여러 사람이 모여 연회를 열 때 왕실의 사자나 조의선인과 같은 반열에 앉지 못한다.

그 나라의 대가(大家: 지배 귀족층)는 직접 밭을 갈지 않으며, 가만히 앉아서 먹는 자가 1만여 명이나 되니, 하호(下戶)들이 멀리서 쌀과 곡식, 물고기와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이들에게 공급한다.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몹시 즐긴다. 온 나라의 부락마다 날이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떼 지어 모여들어 서로 어울려 노래하고 놀이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작은 창고를 두고 있으니 이를 ’부경(桴京)’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스스로 좋아하며, 술을 빚고 장을 담그는 발효 기술이 뛰어나다. 절을 할 때는 한쪽 다리를 꿇고 다른 쪽 다리를 길게 펴니 부여와 다르며, 걸어 다닐 때는 모두 빠르게 달린다.

10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큰 모임을 여니 이를 ’동맹(東盟)’이라 부른다. 공적인 모임에서의 의복은 모두 비단에 금과 은으로 수놓아 스스로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두건(幘)을 쓰는데 뒤통수 쪽으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으며,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나라 동쪽에 큰 동굴이 있어 이를 ’수혈(隧穴)’이라 부른다. 10월의 대동맹 회합 때 수신(隧神: 동혈의 신)을 도읍 동쪽 강가로 모셔와 제사를 지내고, 나무로 깎은 신상을 신좌(神坐)에 모신다.

감옥이 없으며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여러 가(諸加)들이 모여 평의한 뒤 즉시 사형에 처하고, 그의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들의 혼인 풍속은 말로 혼인을 약속하고 나면, 신부 집에서는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서옥(壻屋: 사위의 집)’이라 부른다. 해 질 무렵 신랑이 신부 집 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 이름을 밝히고 무릎을 꿇고 절하며 신부와 동침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간청하면 신부의 부모가 비로소 허락하여 서옥에 들어가 자게 한다. 곁에 돈과 비단을 예물로 놓아두며, 자식을 낳아 장성하고 나면 비로소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서옥제/데릴사위제).

풍속이 남녀 간의 자유로운 결합을 즐긴다. 남녀가 혼인을 맺고 나면 곧바로 틈틈이 자신들의 수의(수의, 장례 옷)를 미리 지어둔다.

장례를 매우 후하게 치러 금과 은, 재물과 비단을 죽은 자를 보내는 데 아낌없이 탕진한다. 돌을 쌓아 무덤 봉분을 만들고(적석총), 무덤 둘레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줄지어 심는다.

그들이 타는 말은 모두 체구가 작아서 험한 산길을 잘 오른다. 백성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모두 굴복시켜 복속시켰다.

또 ’소수맥(小水貊)’이라는 족속이 있다. 고구려는 나라를 세울 때 큰 물(압록강)을 의지해 살았는데, 서안평현 북쪽에 작은 물(소수, 혼강)이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고구려의 별종이 이 작은 물을 의지해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소수맥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뛰어난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맥궁(貊弓)’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역주: 고구려 5부족(五族) 체제와 서옥제(壻屋制)의 사회사적 의미】

  1. 5부족의 연맹적 성격: 초기에는 소노부(涓奴部)가 연맹의 맹주로서 왕을 배출했으나, 점차 계루부(桂婁部)가 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소노부의 대인이 여전히 종묘를 두고 영성·사직을 제사할 수 있었고, 왕비족인 절노부(絶奴部)와 함께 ’고추가(古雛加)’라는 최고 존칭을 유지한 것은 고구려 왕권이 5부 귀족 연맹을 통합해 가는 과도기적 역학관계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2. 서옥제(데릴사위제): 모계적 유풍과 노동력 보상의 성격을 함께 지닌 고구려 고유의 혼인 풍속입니다. 신랑이 처가 뒤편 서옥에서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머물며 처가에 노동력을 제공한 뒤 본가로 복귀하는 형태로, 고대 사회의 가부장권 확립 과정을 반영합니다.

  3. 현도군과 고구려의 초기 관계 및 치소 비정에 대한 사료적 재검토:

    • 본문에서 고구려가 한나라 때 현도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가다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동쪽 경계에 ’책구루(幘溝漊)’를 쌓고 물품을 가져갔다는 기사는 초기 고구려와 현도군의 긴장 관계를 보여줍니다.
    • 통설(이마니시 류·이병도)은 초기 현도군이 압록강 지류인 독로강 유역(평북 강계·위원 등 산악 지대)에 있었다가 무순(푸순)으로 밀려났다고 비정하지만, 수만 호를 관할하는 군현이 험준한 산악 오지에 설치되었다는 비정에는 지리적·행정적 난점이 존재합니다.
    • 특히 『삼국사기』 보장왕 4년(645년) 당태종 친정 기사에서 “이세적이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고 곧이어 요동성 아래로 진군했다”는 기록은 현도군의 군사·지리적 축선이 요하 동쪽 요동성 인접 지대에 위치했음을 보여주며, 압록강 중류 산악설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2. 왕망의 능멸과 광무제의 왕호 인정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不欲行,彊迫遣之,皆亡出塞為寇盜。遼西大尹田譚追擊之,為所殺。州郡縣歸咎于句麗侯騊,嚴尤奏言:「貊人犯法,罪不起于騊,且宜安慰。今猥被之大罪,恐其遂反。」莽不聽,詔尤擊之。尤誘期句麗侯騊至而斬之,傳送其首詣長安。莽大悅,布告天下,更名高句麗為下句麗。當此時為侯國,漢光武帝八年,高句麗王遣使朝貢,始見稱王。

【번역】 신나라 왕망(王莽) 초기에 흉노를 치고자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려 했다. 고구려인들이 가기를 원치 않자 강제로 억압하여 보냈는데, 군사들이 모두 요새를 뛰쳐나와 노략질하는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여 치다가 도리어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했다. 주와 군현에서는 그 죄를 고구려후 추(騊)에게 돌렸다. 이때 엄우(嚴尤)가 왕망에게 상소하여 말하기를,

“맥인들이 법을 범한 죄는 후(侯)인 추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니 마땅히 어루만져 위로해야 합니다. 지금 갑자기 그에게 무거운 대죄를 뒤집어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왕망은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조서를 내려 공격하게 했다. 엄우는 고구려후 추를 속여 유인해 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여 천하에 포고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이름을 고쳐 ’하고려(下句麗)’라 부르게 했다. 이때까지는 제후국(侯國)이었으나, 후한 광무제 건무 8년(서기 32년)에 고구려 국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자 비로소 정식으로 왕(王)이라 일컫게 되었다.

【역주: 왕망의 ‘하고려(下句麗)’ 격하와 고구려 칭왕의 기원】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하고려(下句麗)’로 강등하고 제후(侯)로 낮추어 부른 것은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적 군현 질서를 강요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러나 광무제 건무 8년(서기 32년)에 고구려가 정식으로 ’왕(王)’으로 공인된 것은, 후한 초기에 고구려가 이미 군현 세력을 위협하는 독자적 고대 국가로 완전히 발돋움했음을 뜻합니다.

3. 태조대왕(궁)의 정벌과 요동 침공

至殤、安之間,句麗王宮數寇遼東,更屬玄菟。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以宮為二郡害,興師伐之。宮詐降請和,二郡不進。宮密遣軍攻玄菟,焚燒候城,入遼隧,殺吏民。後宮復犯遼東,蔡風輕將吏士追討之,軍敗沒。

【번역】 후한 상제(殤帝)와 안제(安帝) 연간에 이르러 고구려왕 궁(宮: 태조대왕)이 자주 요동을 침략하였으므로, 다시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요동태수 채풍(蔡風)과 현도태수 요광(姚光)은 궁이 두 군의 큰 우환이라 여겨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러 나섰다. 궁이 거짓으로 항복을 청하며 화친을 빌자 두 군의 군사가 진격을 멈추었다.

그 틈을 타 궁은 은밀히 군사를 보내 현도군을 기습 공격하여 후성(候城)을 불태우고 요수(遼隧)로 쳐들어가 관리와 백성들을 살육했다. 그 후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요동태수 채풍이 경솔하게 관리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했다가 군대가 패망하여 채풍 자신이 전사했다.

【역주: 태조대왕(궁)의 요동 공방과 현도군 소속 문제】

  1. ’궁(宮)’은 누구인가:
    • 본전의 궁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태조대왕(재위 53~146, 휘 궁)에 해당합니다. 상·안제 연간(106~125) 요동 침공, 채풍·요광의 토벌군을 거짓 항복으로 따돌리고 후성(候城) 방화와 요수(遼隧) 침입으로 반격한 것은, 태조대왕대 고구려가 요동군·현도군과 대등한 군사력을 갖추었음을 뜻합니다.
  2. “다시 현도군에 소속(更屬玄菟)”의 의미:
    • 정복이 아니라 군현의 기미(羈縻) 명부(名籍) 편입입니다. §1의 ’현도군에서 조복의책을 받아가고 고구려현령이 명부를 관장’하던 관계가 깨졌다가, 토벌-화친을 거쳐 다시 명부상으로 편입된 것입니다. 동예전의 “7현을 도위가 주관”하던 낙랑 동부도위 체제와 같은 간접 통제입니다.

4. 차대왕(백고)의 대립과 공손도 원조

宮死,子伯固立。順、桓之間,復犯遼東,寇新安、居鄉,又攻西安平,于道上殺帶方令,略得樂浪太守妻子。靈帝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虜數百級,伯固降,屬遼東。(嘉)〔熹〕平中,伯固乞屬玄菟。公孫度之雄海東也,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破之。

【번역】 궁이 죽자 아들 백고(伯固: 신대왕 또는 차대왕)가 왕위에 올랐다. 순제와 환제 연간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鄉)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길목에서 대방현령을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갔다.

영제 건녕 2년(서기 169년),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목 베고 사로잡은 자가 수백 급에 달하자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군에 예속되었다. 희평 연간에 백고가 다시 현도군에 소속되기를 간청했다.

공손도가 해동에서 웅거하여 세력을 떨칠 때 백고는 대가 우거(優居), 주부 연인(然人) 등을 보내 공손도를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쳐부수었다.

【역주: 백고(伯固)의 서안평 침공과 대방령 피살·낙랑태수 처자 피랍의 사료 비판】

  1. 백고는 누구인가와 서안평 침공 기사의 지리적 미스터리:
    • 본문의 백고(伯固)는 『삼국사기』의 차대왕(재위 146~165, 휘 수성) 또는 신대왕(재위 165~179) 논란과 연결됩니다. 순·환제 연간 신안·거향 노략, 그리고 서안평 공격 길목에서 대방현령 살해와 낙랑태수 처자 납치 기록은 한국 고대사 지리 비정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입니다.

    • 사료상의 의문과 해석의 대립:

      • 고구려가 공격한 곳은 압록강 어귀·요동 방면의 ‘서안평(西安平)’인데, 왜 한반도 황해도와 평양에 있어야 할 대방현령이 요동 길목에서 피살되고 낙랑태수의 처자가 사로잡혔는가 하는 점입니다.
      • 이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 공식 『신편한국사』(권4) 스스로도 “낙랑과 대방의 최고 책임자들이 자신들의 부임지가 아닌 요동 지역에 머물고 있었으며, 따라서 군현민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자인(自認)하고 있습니다.
      • 반면 비판적 연구자들은 태수가 현지에 부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낙랑·대방의 치소와 통치 기반이 요동 축선에 있었기 때문에 서안평에서 피살·피랍된 것이라는 정면 문제제기를 던집니다.
      • 지방관의 요동 체류설로 보든 군현의 요동 축선설로 보든, 어느 쪽으로 해석하더라도 “중국 군현이 대동강과 황해도 일대를 철통같이 직할 통치했다”는 단순 통설 도식은 2세기 중엽의 이 1차 사료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2. 경림(耿臨) 토벌(건녕 2년·169)과 희평(熹平) 재속:
    • 현도태수 경림의 토벌로 수백 급 피해를 입고 요동에 속했다가, 희평 연간(172~178) 다시 현도 소속을 청한 것은, 고구려가 군현과 토벌→복속→이반을 반복하는 패권 교섭을 벌였음을 뜻합니다.
  3. 공손도 원조(우거·연인 파견)의 의미:
    • 해동에 웅거한 공손도(189~204)에게 대가 우거·주부 연인을 보내 부산(富山) 도적 토벌을 도운 것은, 고구려가 공손씨 정권과 군사 동맹(원군 파견) 관계에 들어갔음을 뜻합니다. 다음 절 발기·이이모 분쟁 때 공손강이 개입하는 배경이 됩니다.

5. 발기와 산상왕(이이모)의 왕위 계승 분쟁

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子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為王。自伯固時,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拔奇怨為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번역】 백고가 죽자 아들이 둘 있었으니 맏아들은 발기(拔奇)요, 막내아들은 이이모(伊夷模: 산상왕)였다. 발기가 불초(不肖: 어질지 못함)하자 국인들이 마침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의 재위 시절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침략하였고 또 망명해 온 오랑캐 5백여 가구를 받아들였다. 건안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사를 출동시켜 고구려를 쳐서 나라를 깨뜨리고 부락들을 불태웠다.

발기는 자신이 형인데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자 하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 투항한 뒤 비류수(沸流水) 가로 돌아와 머물렀다. 귀순해 있던 오랑캐들도 이이모를 배반하자, 이이모는 서울을 옮겨 새로운 도읍(환도성)을 세웠으니 지금 고구려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발기는 마침내 요동으로 건너갔으나, 그의 아들은 고구려에 남았으니 지금 고구려의 고추가 박위거(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후 고구려가 다시 현도군을 공격하자 현도군이 요동군과 합세하여 반격해 크게 쳐부수었다.

【역주: 발기·이이모(산상왕) 계승분쟁과 공손강의 개입】

  1. ’불초’로 쫓겨난 맏아들 발기(拔奇):
    • 백고 사후 장자 발기가 ‘불초’하다는 이유로 국인들이幼子 이이모(산상왕, 재위 197~227)를 옹립했다는 것은, 고구려 왕위 계승에 귀족회의(제가·대가 합의)가 관여했음을 보여줍니다. §1의 ’5부 중 소노부 본래 왕→계루부 대체’, ‘절노부 왕실과 세혼’ 서술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습니다.
  2. 공손강의 고구려 정벌과 비류수 이거:
    • 백고 시절 받아들인 망명 오랑캐 5백여 가와 잦은 요동 침공을 빌미로, 건안 연간 공손강이 출병해 국(國)을 깨고 읍락을 분소(焚燒)하자, 발기는 소노가(涓奴加)와 함께 하호 3만여 구를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해 비류수(沸流水)에 머물렀습니다. 항복 오랑캐마저 이이모를 배반하자 이이모는 새 도읍(환도성)을 세워 옮겼으니 “오늘날 있는 곳이 이것”이라는 실측 보고입니다.
  3. 박위거(駮位居)의 잔류와 현도·요동 합격:
    • 발기가 요동으로 건너가도 아들(박위거)이 고구려에 남아 고추가로 존속했다는 것은, 패자(發岐)계도 5부 귀족으로 흡수되었음을 뜻합니다. 이후 현도·요동 합병 토벌에 대파된 것은, 공손씨 붕괴(238) 전까지 고구려가 요동 공손씨의 군사적 압력 아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6. 동천왕(위궁)과 관구검의 침공

伊夷模無子,淫灌奴部,生子名位宮。伊夷模死,立以為王,今句麗王宮是也。其曾祖名宮,生能開目視,其國人惡之,及長大,果凶虐,數寇鈔,國見殘破。今王生墮地,亦能開目視人。句麗呼相似為位,似其祖,故名之為位宮。位宮有力勇,便鞍馬,善獵射。景初二年,太尉司馬王率眾討公孫淵,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正始三年,宮寇西安平,其五年,為幽州刺吏毌丘儉所破。語在儉傳。

【번역】 이이모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관노부(灌奴部)의 여인과 통정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위궁(位宮: 동천왕)이라 했다. 이이모가 죽자 그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으니 지금의 고구려 국왕 궁(宮)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의 증조부의 이름도 ’궁(宮: 태조대왕)’이었는데, 날 때부터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아 국인들이 그를 몹시 불길하게 여겼다. 장성하자 과연 흉악하고 사나워 자주 이웃 나라를 노략질하여 나라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지금의 왕 역시 태어나 땅에 떨어지자마자 눈을 뜨고 사람을 바라보았다. 고구려 말로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 하므로, 그의 증조부를 닮았다 하여 이름을 ’위궁(位宮)’이라 지은 것이다.

위궁은 힘이 세고 용맹하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사냥을 잘했다.

경초 2년(서기 238년), 태위 사마선왕(사마의)이 대군을 이끌고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자, 위궁은 주부 대가를 파견하여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사마의의 군사를 돕게 했다.

그러나 정시 3년(서기 242년), 위궁이 위나라의 서안평(西安平)을 기습 공격하여 침탈했다. 그리하여 정시 5년(서기 244년),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고구려를 격파했다. 그 상세한 전말은 『위서 관구검전』에 기록되어 있다.

【역주: 관구검(毌丘儉)의 고구려 침공과 고구려사의 대전환】

  1. 관구검은 누구인가?: 관구검(毌丘儉, ?~255)은 삼국시대 조위(曹魏)의 대표적인 명장이자 정치인으로, 자는 중공(仲恭), 하동군 문희현 출신입니다. 위나라 문제 조비의 태자 시절부터 신임을 얻었고, 요동의 공손연 정권 정벌에 공을 세운 뒤 유주자사(幽州刺史)에 임명되어 북방 방어를 총괄했습니다. 훗날 사마씨(사마사) 일족의 황권 찬탈에 반발하여 문흠과 함께 회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패사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2. 전쟁의 발발 배경 (서안평 공격): 서기 238년 위나라 사마의가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할 때 동천왕은 수천 명(『삼국사기』에는 1천 명)의 군사를 보내 위나라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공손씨 멸망 후 요동과 한반도 군현(낙랑·대방)이 조위의 직접 관할로 들어가자, 고구려와 위나라는 국경을 직접 맞대며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이에 동천왕은 242년 압록강 어귀의 전략적 요충지인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하여 교통로를 차단하려 했고, 위나라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244~245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보·기병 1만 명을 주어 고구려 원정에 나서게 했습니다.

  3. 비류수·양맥 전투와 수도 환도성 함락:

    • 초반에는 동천왕이 철기(鐵騎) 5천을 포함한 2만 대군으로 관구검 군사를 비류수(沸流水)와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두 차례 격파하며 승세를 탔습니다.
    • 그러나 승리에 방심한 동천왕이 정면 돌파를 감행하다 관구검의 방진(方陣) 전술에 말려 1만 8천여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 관구검은 고구려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켜 도륙하고,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를 새겨 승전을 과시했습니다. (1904년 지안에서 실제 기공비 파편이 출토되어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됨).
  4. 고구려 역사에 미친 지대한 변화와 의의:

    • 수도 이전과 ’평양 천도’의 사료 비판:
      • 환도성이 파괴되자 동천왕은 247년 평양(平壤)으로 사직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구검 군사가 결사대의 반격을 받아 패퇴하여 물러난 곳 역시 ‘낙랑’이었습니다. 만약 통설대로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있었다면, 고구려 왕이 적군이 퇴각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의 본거지로 수도를 옮겼다는 심각한 모순이 발생합니다.
      • 이 모순에 대해 주류 역사학계(동천왕의 평양은 대동강이 아니라 압록강 유역 평지 거점이라는 ‘펴라’ 보통명사설)와 민족사학·비판적 연구자들(낙랑과 평양의 요동·요서 존치설)이 각기 중요한 사료 비판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학술 논쟁은 부록: 낙랑과 ’평양’의 지리 비정 논쟁 참조)
    • 대외 전략의 재편과 체제 정비:
      • 무리한 서진(요동 진출)이 초강대국 조위와의 직접 충돌로 파국을 부른다는 점을 뼈저리게 인식한 고구려는, 서북 방면으로는 외교적 유화책을 취하며 내실을 다지는 한편, 옥저·예 등 동해안과 북방 방면으로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는 전략적 선회를 단행했습니다.
    • 위기 극복과 미천왕의 서안평·낙랑·대방 정복 축선:
      • 밀우(密友)와 유옥구(紐由) 같은 충신·결사대의 헌신으로 국왕이 살아남아 나라를 보전한 경험은 고구려인들에게 강력한 국가적 결속력을 심어주었습니다.
      • 이 뼈아픈 패배를 교훈 삼아 고구려는 국력을 길러, 약 70년 뒤인 4세기 미천왕 대에 이르러 서기 311년 요동의 서안평을 완전히 함락한 뒤 313년 낙랑군, 314년 대방군을 연쇄적으로 소멸시키는 눈부신 북방 강국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서안평의 함락이 곧바로 낙랑과 대방의 붕괴로 직결되었다는 점 역시 세 지역이 요동-압록강 축선상에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