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에서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국가 형성기를 둘러싸고 가장 격렬하게 학설이 대립하는 분야 중 하나는 바로 백제의 건국 시점과 마한(馬韓)의 병합 시기에 관한 문제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서기 9년(온조왕 27년)에 이미 마한을 전격 병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진수의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한전에는 그로부터 250여 년이나 지난 3세기 중엽(서기 240년대)에도 마한 54개 소국이 엄연히 독자적인 세력으로 건재하며, 백제국(伯濟國)은 그 54개국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극적인 사료적 괴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일제 식민사학 이래 한국 강단사학의 통설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고이왕·근초고왕 건국설)’과 이에 맞서는 ‘삼국사기 실재론(고고학적 풍납토성 발굴 및 단계적 병합론)’이 첨예하게 맞붙어 왔습니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溫祚王) 조의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고 체계적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백제는 기원후 1세기 초(서기 9년)에 이미 한강 유역을 넘어 중부 지역의 맹주였던 마한의 지배권을 장악한 강력한 고대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3세기 후반에 쓰인 중국의 1차 사서 『삼국지』 권30 한(韓)전의 내용은 『삼국사기』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삼국지』 한전 본문: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백성들은 토착하여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친다… 모두 54개 국이 있다.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백제국(伯濟國)… 고비리국(古卑離國) 등이 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이며, 총 수십만 호이다.
진왕(辰王)은 목지국(目支國)을 다스린다. 마한의 여러 나라 왕들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고 오직 목지국의 진왕만을 옹립한다.”
『삼국지』는 서기 230~240년대 조위(曹魏)와 낙랑·대방군이 삼한과 직접 접촉하고 관구검 원정(244~245년)을 전후하여 삼한의 실태를 직접 조사·견문한 동시대 1차 기록입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 명백한 사료적 충돌을 두고, 근대 역사학계는 거대한 해석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이론적 지주였던 관학자 쓰다 소키치는 1919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단정했습니다:
쓰다 소키치의 궁극적 목적은 “백제와 신라는 4세기 중엽까지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미개한 부족이었으므로, 4세기 후반 왜(倭)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침략하여 지배(임나일본부설)할 수 있었다”는 식민주의 침략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있었습니다.
해방 후 서울대 이병도 교수를 비롯한 주류 강단사학계는 쓰다 소키치의 사료 비판 틀을 대부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서울 한강 유역에서 쏟아져 나온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사료의 입체적 재검토는 ’초기기록 불신론’의 근간을 뿌리부터 뒤흔들었습니다.
1997년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재건축 현장에서 엄청난 양의 백제 초기 토기와 거대한 성벽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비판학계와 열린 고대사 연구자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해석합니다:
[기원전 18년]
온조의 하남위례성 건국 (풍납토성 고고학 연대와 완벽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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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년: 온조왕의 1차 마한 병합]
온조왕이 병합한 마한은 한강·안성천 유역의 '북부 마한 맹주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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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중심 세력의 남하와 충청·호남 분할]
쫓겨난 마한 잔여 소국들이 금강·영산강 유역으로 남하하여 독자 자치 유지
(『삼국지』 동이전에 등장하는 3세기 '마한 54국'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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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근초고왕 대의 2차 정복]
백제가 남쪽으로 진격하여 금강 유역(충남·전북) 마한 세력을 완전히 복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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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전남 영산강 옹관묘 사회]
전남 해남·나주(침미다례) 일대에 자립해 있던 최후의 마한 독자 세력이
6세기 무령왕·성왕 대에 이르러 백제의 담로제로 완전 흡수·소멸즉, 온조왕이 서기 9년에 마한을 병합했다는 것은 마한 전체가 하루아침에 한반도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한강 유역의 마한 종주권이 백제로 교체되었다는 정치적 선언입니다. 남쪽으로 물러난 마한의 소국들이 3세기 조위와 교류하다가, 4세기 근초고왕을 거쳐 6세기 무령왕 대에 이르기까지 50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백제에 흡수·통합된 것입니다.
| 비교 항목 | 강단사학(초기기록 불신론) | 비판학계 및 실재론 (고고학 기반) | 역사적 물증 및 사료 근거 |
|---|---|---|---|
| 백제 건국 시점 | 3세기 중엽 (고이왕) | 기원전 18년 (온조왕) | • 풍납토성 기원전 탄소연대 측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 |
| 서기 9년 마한 병합 기사 | 김부식의 후대 조작·신화 | 한강 유역 마한 맹주권의 1차 장악 | 풍납토성 대형 판축성벽 축조 시점 |
| 『삼국지』 마한 54국의 실체 | 백제가 아직 성립하지 못한 부족 상태 | 한강 이남(충청·전라)으로 남하한 잔여 마한 세력 | 목지국의 충청도(직산·천안) 비정과 진왕 옹립 |
|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 | 마한의 최초 정복이자 백제 영토화 | 금강 유역(충청·전북) 마한의 2차 완전 복속 | 『삼국사기』 근초고왕 조 남벌 기사 |
| 마한의 최종 소멸 시기 |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소멸) | 6세기 전반 (무령왕·성왕 때 최종 소멸) | 나주 복암리 고분군, 영산강 대형 옹관묘 고고학 유적 |
백제 건국과 마한 소멸 논쟁은 외국 사서(『삼국지』)의 한두 줄 기록을 절대화하여 자국의 정사(『삼국사기』) 전체를 통째로 가짜 취급해 온 식민사관의 병폐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두 사서는 서로 모순되어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한강 유역의 조기 건국 ──▶ 마한 맹주권 장악 ──▶ 남방 소국의 독자적 잔존 ──▶ 6세기에 걸친 단계적 통합”이라는 거대한 민족 통합의 파노라마 속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합치되는 것입니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