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본문 + 배송지(裵松之) 주석 완역. 한문 원문과 번역 1:1 대역, 역주 포함. 연구용 참고본으로 출간서적과 대조 바랍니다.



오환전(烏丸傳)

1. 오환의 기원과 습속 (위서 주석)

〔一〕 魏書曰:烏丸者,東胡也。漢初,匈奴冒頓滅其國,餘類保烏丸山,因以為號焉。俗善騎射,隨水草放牧,居無常處,以穹廬為宅,皆東向。日弋獵禽獸,食肉飲酪,以毛毳為衣。貴少賤老,其性悍驁,怒則殺父兄,而終不害其母,以母有族類,父兄以己為種,無復報者故也。常推募勇健能理決鬥訟相侵犯者為大人,邑落各有小帥,不世繼也。數百千落自為一部,大人有所召呼,刻木為信,邑落傳行,無文字,而部眾莫敢違犯。氏姓無常,以大人健者名字為姓。大人已下,各自畜牧治產,不相徭役。其嫁娶皆先私通,略將女去,或半歲百日,然後遣媒人送馬牛羊以為聘娶之禮。婿隨妻歸,見妻家無尊卑,旦起皆拜,而不自拜其父母。為妻家僕役二年,妻家乃厚遣送女,居處財物,一出妻家。故其俗從婦人計,至戰鬥時,乃自決之。父子男女,相對蹲踞,悉髡頭以為輕便。婦人至嫁時乃養髮,分為髻,著句決,飾以金碧,猶中國有冠步搖也。父兄死,妻後母執嫂;若無執嫂者,則己子以親之次妻伯叔焉,死則歸其故夫。俗識鳥獸孕乳,時以四節,耕種常用布穀鳴為候。地宜青穄、東牆,東牆似蓬草,實如葵子,至十月熟。能作白酒,而不知作麴糱。米常仰中國。大人能作弓矢鞍勒,鍛金鐵為兵器,能刺韋作文繡,織縷氊〈毛曷〉。有病,知以艾灸,或燒石自熨,燒地臥上,或隨痛病處,以刀決脈出血,及祝天地山川之神,無鍼藥。貴兵死,斂屍有棺,始死則哭,葬則歌舞相送。肥養犬,以采繩嬰牽,并取亡者所乘馬、衣物、生時服飾,皆燒以送之。特屬累犬,使護死者神靈歸乎赤山。赤山在遼東西北數千里,如中國人以死之魂神歸泰山也。至葬日,夜聚親舊員坐,牽犬馬歷位,或歌哭者,擲肉與之。使二人口頌咒文,使死者魂神徑至,歷險阻,勿令橫鬼遮護,達其赤山,然後殺犬馬衣物燒之。敬鬼神,祠天地日月星辰山川,及先大人有健名者,亦同祠以牛羊,祠畢皆燒之。飲食必先祭。其約法,違大人言死,盜不止死。其相殘殺,令都落自相報,相報不止,詣大人平之,有罪者出其牛羊以贖死命,乃止。自殺其父兄無罪。其亡叛為大人所捕者,諸邑落不肯受,皆逐使至雍狂地。地無山,有沙漠、流水、草木,多蝮蛇,在丁令之西南,烏孫之東北,以窮困之。自其先為匈奴所破之後,人眾孤弱,為匈奴臣服,常歲輸牛馬羊,過時不具,輒虜其妻子。至匈奴壹衍鞮單于時,烏丸轉彊,發掘匈奴單于冢,將以報冒頓所破之恥。壹衍鞮單于大怒,發二萬騎以擊烏丸。大將軍霍光聞之,遣度遼將軍范明友將三萬騎出遼東追擊匈奴。比明友兵至,匈奴已引去。烏丸新被匈奴兵,乘其衰弊,遂進擊烏丸,斬首六千餘級,獲三王首還。後數復犯塞,明友輒征破之。至王莽末,並與匈奴為寇。光武定天下,遣伏波將軍馬援將三千騎,從五原關出塞征之,無利,而殺馬千餘匹。烏丸遂盛,鈔擊匈奴,匈奴轉徙千里,漠南地空。建武二十五年,烏丸大人郝旦等九千餘人率眾詣闕,封其渠帥為侯王者八十餘人,使居塞內,布列遼東屬國、遼西、右北平、漁陽、廣陽、上谷、代郡、鴈門、太原、朔方諸郡界,招來種人,給其衣食,置校尉以領護之,遂為漢偵備,擊匈奴、鮮卑。至永平中,漁陽烏丸大人欽志賁帥種人叛,鮮卑還為寇害,遼東太守祭肜募殺志賁,遂破其眾。至安帝時,漁陽、右北平、鴈門烏丸率眾王無何等復與鮮卑、匈奴合,鈔略代郡、上谷、涿郡、五原,乃以大司農何熙行車騎將軍,左右羽林五營士,發緣邊七郡黎陽營兵合二萬人擊之。匈奴降,鮮卑、烏丸各還塞外。是後,烏丸稍復親附,拜其大人戎末廆為都尉。至順帝時,戎末廆率將王侯咄歸、去延等從烏丸校尉耿曄出塞擊鮮卑有功,還皆拜為率眾王,賜束帛。

【번역】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오환(烏丸)은 동호(東胡)의 후예이다. 한나라 초기에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가 동호를 멸망시키자, 살아남은 무리들이 오환산(烏丸山)으로 들어가 의지하였으므로 산 이름을 따서 부족의 호칭으로 삼았다.

그들의 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며, 물과 풀을 따라 방목하고 일정하게 정착해 사는 곳이 없다. 둥근 천막인 궁려(穹廬, 게르)를 집으로 삼는데 문은 모두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한다. 날마다 날짐승과 길짐승을 사냥하여 고기를 먹고 젖을 마시며,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젊고 힘센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고 쇠약한 사람을 천하게 여긴다. 성품이 사납고 오만하여 화가 나면 부모형제라도 죽이지만, 끝내 어머니만은 해치지 않는다. 어머니에게는 외가 친족들이 있고, 부형은 자신과 같은 혈통이어서 보복해 줄 다른 족속이 없기 때문이다.

항상 용맹하고 건장하여 다툼과 소송, 상호 침범하는 문제를 명쾌하게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을 추대하여 우두머리인 대인(大人)으로 삼는다. 부락마다 작은 우두머리(小帥)가 있으나 세습하지는 않는다. 수백에서 수천 가구가 모여 한 부족을 이루며, 대인이 소집할 일이 있으면 나무에 표식을 새겨 징표(刻木爲信)로 삼아 부락마다 전달하는데 문자가 없어도 부중의 무리 중 감히 어기는 자가 없다. 성씨가 일정하지 않고 힘센 대인의 이름을 따서 성으로 삼는다. 대인 이하 모든 사람들은 각자 가축을 기르고 가산을 꾸리며, 서로 요역(부역)을 시키지 않는다.

혼인할 때는 먼저 남녀가 사사로이 통정한 뒤 여자를 데려가 반년이나 백일 동안 함께 살다가, 비로소 중매인을 보내 소, 말, 양을 보내 약혼 예물(납채)을 치른다. 사위는 아내를 따라 처가로 들어가는데, 처가의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면 모두에게 절을 올리지만 정작 자신의 친부모에게는 절하지 않는다. 처가에서 2년 동안 종처럼 부역을 하고 나면 처가에서는 딸을 후하게 보내주고 살림살이와 재물도 모두 처가에서 대어준다. 그러므로 그들의 풍속은 모든 일을 부인의 계책에 따르며, 오직 싸움터에서 전투할 때만 남자가 스스로 결단을 내린다.

부자간이나 남녀 간에 서로 마주 앉을 때는 쭈그리고 앉으며, 머리를 모두 깎아 간편하게 여긴다. 여자는 시집갈 때 머리를 길러 쪽을 찌고 구결(句決)이라는 장식관을 쓰고 금과 벽옥으로 꾸미는데, 이는 중국의 보요관(步搖冠)과 같다. 부형이 죽으면 계모나 형수를 아내로 삼고(수계혼), 형수를 거둘 자가 없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다른 첩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며, 여자가 죽으면 본래의 전남편에게 돌아간다.

새와 짐승이 잉태하고 젖 먹이는 때를 보아 사계절을 헤아리며, 농사짓고 씨 뿌릴 때는 늘 뻐꾸기(布穀)가 우는 소리를 절기의 지표로 삼는다. 땅에는 푸른 기장과 동장(東牆)이 잘 자라는데, 동장은 명아주 풀과 비슷하고 씨앗은 해바라기 씨 같아 10월에 익는다. 쌀로 빚는 흰 술을 만들 줄 알지만 누룩을 만드는 법은 몰라 쌀은 항상 중국에 의존한다.

대인은 활과 화살, 안장과 굴레를 만들 줄 알고, 쇠를 벼려 무기를 만들며, 가죽을 꿰매어 무늬를 수놓고 털실을 엮어 모전(毛氈)을 짤 줄 안다. 병이 나면 쑥뜸을 뜰 줄 알고, 돌을 달구어 찜질을 하거나 땅을 달구어 그 위에 누우며, 아픈 부위를 따라 칼로 혈맥을 째 피를 뽑아 치료한다. 천지와 산천의 신에게 빌기는 하지만 침과 약은 없다.

싸움터에서 전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시신을 염할 때는 널(棺)을 쓴다. 사람이 처음 죽으면 곡을 하지만 장사 지낼 때는 춤추고 노래하며 망자를 보낸다. 개를 살찌게 길러 오색 끈으로 목을 매어 끌고, 망자가 타던 말, 입던 옷, 생전의 장신구를 모두 불태워 함께 보낸다. 특히 개에게 부탁하여 죽은 사람의 영혼을 호위해 적산(赤山)으로 무사히 인도하도록 한다. 적산은 요동 서북쪽 수천 리 밖에 있는데, 중국인이 죽어 영혼이 태산(泰山)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것과 같다.

장삿날 밤에는 친척과 옛 벗들이 둥글게 둘러앉고, 개와 말을 이끌고 자리 앞을 지나가게 하며, 노래하거나 곡하는 자가 있으면 고기를 던져준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주문을 외우게 하여 망자의 영혼이 험난한 길을 지나갈 때 흉악한 귀신이 가로막지 못하게 하고 적산에 이르도록 빈 뒤에, 비로소 개와 말을 잡고 의복을 불태운다.

귀신을 공경하여 천지와 일월성신, 산천에 제사 지내며, 선대 대인 중 용맹한 명성을 떨친 자에게도 소와 양을 바쳐 제사 지내고 제사가 끝나면 제물을 모두 불태운다.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먼저 제사를 올린다.

그들의 법은 대인의 명령을 어기면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을 그치지 않아도 사형이다. 부족민끼리 서로 살인하면 부락민들끼리 사사로이 원수를 갚게 하는데, 보복이 끊이지 않으면 대인에게 나아가 중재를 청한다. 죄가 있는 자가 소와 양을 내어 목숨을 속죄하면 비로소 싸움이 멎는다. 스스로 자기 부형을 죽인 자는 죄를 묻지 않는다. 배반하여 도망친 자로서 대인에게 잡히지 않은 자는 다른 모든 부락에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쫓아내어 옹광(雍狂)의 땅으로 보내버린다. 그 땅은 산이 없고 사막과 흐르는 물, 풀과 나무만 있으며 독사가 많고 정령(丁令)의 서남쪽, 오손(烏孫)의 동북쪽에 있어 도망자를 곤궁에 빠뜨려 죽게 한다.

옛적에 흉노에게 격파당한 이래 인구가 적고 쇠약하여 흉노의 신하로 복종하면서 해마다 소, 말, 양을 바쳤는데, 기일을 넘겨 갖추지 못하면 번번이 처자를 사로잡혀 갔다. 흉노의 일단제선우(壹衍鞮單于) 때에 이르러 오환이 점차 강성해지자, 옛날 묵돌선우에게 패망했던 치욕을 갚고자 흉노 선우의 무덤을 파헤쳤다. 일단제선우가 크게 노하여 기병 2만 명을 동원해 오환을 공격했다.

대장군 곽광(霍光)이 이를 듣고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范明友)에게 3만 기를 이끌고 요동으로 나가 흉노를 추격하게 했다. 범명우의 군사가 이르렀을 때는 흉노가 이미 퇴각한 뒤였다. 오환이 방금 흉노의 침략을 받아 쇠약해진 틈을 타, 범명우는 도리어 오환을 진격하여 목 6천여 급을 베고 세 왕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그 후 오환이 누차 요새를 범하자 범명우가 번번이 토벌하여 격파했다.

왕망 말기에 이르러 흉노와 함께 변방을 노략질했다. 후한 광무제가 천하를 평정한 뒤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에게 3천 기를 이끌고 오원관(五原關)을 나가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말 천여 필을 잃었다. 오환이 마침내 번성하여 흉노를 기습 공격하니, 흉노가 천 리 밖으로 쫓겨나 막남(漠南)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건무(建武) 25년(서기 49년), 오환 대인 학단(郝旦) 등 9천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대궐로 찾아와 복속을 청하니, 수령 80여 명을 후왕(侯王)에 봉하고 요새 안으로 들어와 살게 하였다. 요동속국, 요서, 우북평, 어양, 광양, 상곡, 대군, 안문, 태원, 삭방 등 북방 여러 군의 경계에 나누어 배치하고 동족들을 불러 모으게 하며 의복과 식량을 대어주고, 교위(校尉)를 두어 통솔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나라의 정찰부대가 되어 흉노와 선비를 격퇴하였다.

영평(永平) 연간에 어양 오환 대인 흠지분(欽志賁)이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선비와 연합하여 노략질하자,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사람을 매수하여 흠지분을 죽이고 그 무리를 깨뜨렸다.

안제(安帝) 때에 어양, 우북평, 안문의 오환 솔중왕(率眾王) 무하(無何) 등이 다시 선비·흉노와 합세하여 대군, 상곡, 탁군, 오원을 약탈하자, 대사농 하희(何熙)를 거기장군으로 삼아 좌우 우림군 5영 병사와 변방 7군의 여양영 병사 총 2만 명을 이끌고 치게 했다. 흉노가 항복하자 선비와 오환도 각각 요새 밖으로 물러났다.

그 후 오환이 점차 다시 친선하여 복속해오자 대인 융말괴(戎末廆)를 도위(都尉)로 삼았다. 순제(順帝) 때에 이르러 융말괴가 왕후 돌귀(咄歸), 거연(去延) 등을 이끌고 오환교위 경엽(耿曄)을 따라 요새를 나가 선비를 쳐서 공을 세우니, 돌아와 모두 솔중왕으로 삼고 비단을 하사했다.

【역주: 오환(烏丸)이란 어떤 민족인가? - 기원과 고유 습속】

  1. 종족적 기원과 거주지:

    • 오환(우환)은 몽골 고원 동부와 만주 서부(대흥안령산맥 남단)에 거주하던 동호(東胡)의 후예로, 기원전 209년 흉노 묵돌선우에게 격파된 후 남쪽의 오환산(烏丸山)으로 피신하여 산 이름을 부족명으로 삼았습니다.
    • 농경 정주민과 달리 이동식 천막인 궁려(게르)에 살며 수초(물과 풀)를 따라 말을 타고 이동 방목하는 전형적인 기마 유목민이었습니다.
  2. 모계(母系) 존중과 처가살이(서옥제) 풍속:

    • 오환 사회는 가부장적 유교 윤리와 달리 여성과 모계의 권리가 매우 강력했습니다.
    • 남녀가 자유롭게 통정한 뒤 사위가 처가로 들어가 2년간 머슴처럼 노동력을 제공하고 살림살이를 장만받아 독립했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처가의 어른들에게 먼저 절을 올렸습니다.
    • 부족 내의 모든 대소사와 계책을 여성(아내와 어머니)의 의견에 따랐으며, 부형을 죽인 자는 사사로운 복수로 끝낼 수 있어도 어머니를 해치는 것은 절대적 금기였습니다.
  3. 수계혼(형사취수제)과 적산(赤山) 영혼 신앙:

    • 형사취수와 계모 수계: 부형이 죽으면 형수나 계모를 아내로 거두는 풍습은 가혹한 유목 환경에서 과부와 고아의 생존을 책임지고 씨족의 가축·재산 유출을 막는 필수적인 사회적 안전망이었습니다.

    • 적산(赤山) 신앙과 반려견(犬) 장례: 사후 영혼이 요동 서북쪽의 ’적산(赤山)’으로 간다고 믿었으며, 개가 저승길의 악귀를 막고 영혼을 인도한다고 믿어 오색 끈을 맨 살찐 개를 장례 때 함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2. 한나라 말기 구력거와 답돈의 대두

漢末,遼西烏丸大人丘力居,眾五千餘落,上谷烏丸大人難樓,眾九千餘落,各稱王,而遼東屬國烏丸大人蘇僕延,眾千餘落,自稱峭王,右北平烏丸大人烏延,眾八百餘落,自稱汗魯王,皆有計策勇健。中山太守張純叛入丘力居眾中,自號彌天安定王,為三郡烏丸元帥,寇略青、徐、幽、冀四州,殺略吏民。靈帝末,以劉虞為州牧,募胡斬純首,北州乃定。後丘力居死,子樓班年小,從子蹋頓有武略,代立,總攝三王部,眾皆從其教令。袁紹與公孫瓚連戰不決,蹋頓遣使詣紹求和親,助紹擊瓚,破之。紹矯制賜蹋頓、(難)峭王、汗魯王印綬,皆以為單于。〔一〕

【번역】 후한 말기에 요서(遼西) 오환의 대인 구력거(丘力居)는 무리가 5천여 부락이었고, 상곡(上谷) 오환의 대인 난루(難樓)는 무리가 9천여 부락으로 각각 왕을 칭하였다. 요동속국(遼東屬國) 오환의 대인 소복연(蘇僕延)은 무리 1천여 부락으로 스스로 초왕(峭王)이라 일컬었고, 우북평(右北平) 오환의 대인 오연(烏延)은 무리 8백여 부락으로 한로왕(汗魯王)을 자칭했으니, 모두 지모와 계책이 뛰어나고 용맹했다.

중산태수(中山太守) 장순(張純)이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구력거의 무리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스스로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이라 칭하고 3군 오환의 원수가 되어 청주, 서주, 유주, 기주의 4개 주를 노략질하고 관리와 백성들을 살육·납치했다. 영제 말기에 유우(劉虞)를 유주목으로 삼아 오랑캐를 회유하고 장순의 목을 베어 바치게 하니 비로소 북방 여러 주가 평정되었다.

그 후 구력거가 죽자 그의 아들 누반(樓班)은 나이가 어려, (구력거의) 조카인 답돈(蹋頓)이 무략이 뛰어나 대신 대인이 되어 세 왕의 부락을 총괄 통솔하니 무리들이 모두 그의 명령에 복종했다.

원소(袁紹)가 공손찬(公孫瓚)과 오래 싸워 승부를 내지 못하자, 답돈이 원소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에 원소는 황제의 조서를 참칭하여 답돈, 초왕, 한로왕에게 인수를 내리고 모두 선우(單于)로 삼았다.

【역주: 삼군오환(三郡烏丸) 체제와 장순의 난·답돈의 대두】

  1. 요서·상곡·요동속국·우북평의 4거점과 ‘왕’ 칭호:
    • 구력거(요서 5천락)·난루(상곡 9천락)·소복연(요동속국 1천락, 초왕)·오연(우북평 8백락, 한로왕)은 각기 수천~수만 호를 거느린 부족연맹장으로, 스스로 왕을 칭했으나 아직 단일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구력거 사후 어린 누반을 대신해 조카인 답돈(누반의 사촌형제)이 총섭삼왕부(總攝三王部)로 추대되면서 삼군오환이 단일 지휘 아래 통합됩니다.
  2. 장순(張純)의 난과 유우(劉虞)의 평정:
    • 중산태수 장순이 구력거 무리에 투항해 ’미천안정왕’을 자칭하고 3군오환 원수로 청·서·유·기 4주를 노략한 사건(서기 185~189)은, 후한 말 변경군벌과 오환의 첫 대규모 결합이었습니다. 영제 말 유우를 유주목으로 삼아 회유책(초무)으로 장순의 목을 베게 한 것은, 이후 조조·원소가 오환을 두고 벌인 회유전의 전형이 됩니다.
  3. 원소와 답돈의 동맹(공손찬 격파):
    • 원소가 공손찬과 계교(界橋) 등에서 장기전(191~199)을 벌일 때 답돈이 화친 사신을 보내 협공으로 공손찬을 깬 것은, 오환 정예기병이 하북 쟁패의 캐스팅보트였음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원소가 황제 조서를 참칭(矯制)해 세 왕에게 선우(單于) 인수를 준 것이 다음 절 영웅기 책봉문서의 배경입니다.

3. 원소의 책봉과 답돈 (영웅기 주석)

〔一〕 英雄記曰:紹遣使即拜烏丸三王為單于,皆安車、華蓋、羽旄、黃屋、左纛。版文曰:「使持節大將軍督幽、青、并領冀州牧阮鄉侯紹,承制詔遼東屬國率眾王頒下、烏丸遼西率眾王蹋頓、右北平率眾王汗盧維:乃祖慕義遷善,款塞內附,北捍玁狁,東拒濊貊,世守北陲,為百姓保障,雖時侵犯王略,命將徂征厥罪,率不旋時,悔愆變改,方之外夷,最又聰惠者也。始有千夫長、百夫長以相統領,用能悉乃心,克有勳力於國家,稍受王侯之命。自我王室多故,公孫瓚作難,殘夷厥土之君,以侮天慢主,是以四海之內,並執干戈以衛社稷。三王奮氣裔土,忿姦憂國,控弦與漢兵為表裏,誠甚忠孝,朝所嘉焉。然而虎兕長蛇,相隨塞路,王官爵命,否而無聞。夫有勳不賞,俾勤者怠。今遣行謁者楊林,齎單于璽綬車服,以對爾勞。其各綏靜部落,教以謹慎,無使作凶作慝。世復爾祀位,長為百蠻長。厥有咎有不臧者,泯於爾祿,而喪於乃庸,可不勉乎!烏桓單于都護部眾,左右單于受其節度,他如故事。」

【번역】 『영웅기(英雄記)』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원소가 사신을 보내 오환의 세 왕을 선우로 배명하고 모두 안거(安車: 편안한 수레), 화개(華蓋: 화려한 일산), 깃털 깃발(羽旄), 황옥(黃屋), 좌독(左纛)을 하사했다. 그 책문(版文)에 이르기를,

“사지절 대장군 독유·청·병 영기주목 완향후 소(袁紹)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조서를 내리노라. 요동속국 솔중왕 번하, 오환 요서 솔중왕 답돈, 우북평 솔중왕 한로유에게 명하노니, 그대들의 조상은 의를 사모하여 선으로 옮겨오고 요새를 두드려 내부하여 북으로는 험윤을 막고 동으로는 예맥을 물리치며 대대로 북쪽 변경을 지켜 백성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비록 때때로 왕의 강역을 침범한 적이 있어 장수를 명해 정벌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을 뉘우치고 고쳤으니 외이(外夷)들 중에서도 가장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이다. 처음에 천부장, 백부장을 두어 거느리게 하자 온 마음을 다해 국가에 훈공을 세워 점차 왕호의 명을 받았다.

우리 왕실에 우환이 많아 공손찬이 난을 일으켜 그 땅의 임금을 도륙하고 하늘을 업신여기며 군주를 능멸하자, 사해의 영웅들이 모두 창칼을 잡고 사직을 지키려 일어섰다. 세 왕은 먼 변방에서 의기를 떨쳐 간악함을 분개하고 나라를 근심하며, 활을 당겨 한나라 군사와 안팎으로 호응하였으니 그 충효가 참으로 지극하여 조정에서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그러나 호랑이와 큰 뱀 같은 도적들이 길을 가로막아 조정의 관작과 명령이 막혀 전해지지 못했다. 무릇 공이 있는데도 포상하지 않으면 충성된 자가 게을러지는 법이다. 이제 행알자(行謁者) 양림(楊林)을 파견하여 선우의 인수와 수레, 의복을 보내어 그대들의 노고에 보답하노라.

그대들은 각자 부족을 평안히 다스리고 신중함으로 가르쳐 흉악한 짓을 저지르지 말게 하라. 대대로 제사와 관위를 물려주어 길이 모든 오랑캐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리라. 만약 허물이 있고 불선한 자가 있다면 그대의 녹봉을 깎고 공훈을 삭탈할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오환 선우는 모든 부락을 총괄 도호하고, 좌우 선우는 그의 통제를 받도록 하되 그 밖의 모든 일은 옛 규례대로 행하라.”

【역주: 영웅기(英雄記) 책봉문서(版文)의 외교사적 의미】

  1. ’사지절대장군 영기주목’의 권위 찬탈:
    • “使持節大將軍督幽青并領冀州牧阮鄉侯紹, 承制詔”라는 관함은, 헌제를 옹립한 조조에 맞서 원소가 하북에서 황제 대행(承制)을 자처했음을 보여줍니다. 변경 오랑캐 책봉권을 독점함으로써 자신이 정통 조정임을 과시한 것입니다.
  2. 안거·화개·우모·황옥·좌독의 하사품 격식:
    • 안거(安車)·화개(華蓋)·우모(羽旄)·황옥(黃屋)·좌독(左纛)은 한나라가 번왕(藩王)·선우에게 내리던 최고급 의장(儀仗) 세트입니다. 천부장·백부장 체제에서 솔중왕(率眾王)을 거쳐 선우(單于)로 격상시킨 것은 오환을 흉노에 준하는 변경 방벽으로 격상시킨 조치입니다.
  3. ‘북으로는 험윤, 동으로는 예맥’과 ’백만(百蠻)의 장’:
    • 조상은 “북으로 험윤(흉노)을 막고 동으로 예맥(濊貊)을 물리치며 대대로 북쪽 변경을 지켰다”고 추켜세우고, “길이 백만의 우두머리(長為百蠻長)”가 되리라 약속합니다. 오환을 대(對)흉노·대(對)예맥 방파제로 삼고 하북 동부 변경을 위임한 것으로, 조조가 후에 염유(閻柔)를 통해 같은 방식으로 오환·선비를 거둔 것(§4 참조)과 정확히 같은 기미(羈縻) 정책입니다.

4. 조조의 백랑산 전투와 답돈 참수

後樓班大,峭王率其部眾奉樓班為單于,蹋頓為王。然蹋頓多畫計策。廣陽閻柔,少沒烏丸、鮮卑中,為其種所歸信。柔乃因鮮卑眾,殺烏丸校尉邢舉代之,紹因寵慰以安北邊。後袁尚敗奔蹋頓,憑其勢,復圖冀州。會太祖平河北,柔帥鮮卑、烏丸歸附,遂因以柔為校尉,猶持漢使節,治廣甯如舊。建安十一年,太祖自征蹋頓於柳城,潛軍詭道,未至百餘里,虜乃覺。尚與蹋頓將眾逆戰於凡城,兵馬甚盛。太祖登高望虜陳,(柳)〔抑〕軍未進,觀其小動,乃擊破其眾,臨陳斬蹋頓首,死者被野。速附丸、樓班、烏延等走遼東,遼東悉斬,傳送其首。其餘遺迸皆降。及幽州、并州柔所統烏丸萬餘落,悉徙其族居中國,帥從其侯王大人種眾與征伐。由是三郡烏丸為天下名騎。〔一〕

【번역】 그 후 누반이 장성하자 초왕 소복연이 부중을 이끌고 누반을 선우로 받들고 답돈은 왕이 되었다. 그러나 답돈이 여전히 많은 계책을 주도했다.

광양(廣陽) 사람 염유(閻柔)는 어려서 오환과 선비족 사이에 붙잡혀 살았으나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염유가 선비족 무리를 이용해 오환교위 형거(邢舉)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하자, 원소는 그를 달래어 북방 변경을 안정시켰다.

그 후 원상(袁尚)이 조조에게 패하고 답돈에게 도망쳐 그의 세력을 빌려 다시 기주(冀州)를 도모하려 했다. 마침 조조(太祖)가 하북을 평정하자 염유가 선비와 오환을 이끌고 귀순하였으므로, 조조는 염유를 그대로 교위로 삼고 한나라의 사절을 지니게 하여 예전처럼 광녕(廣甯)을 다스리게 했다.

건안 11년(서기 206년), 조조는 답돈을 토벌하고자 친히 유성(柳城)으로 출진했다. 군사를 숨기고 험한 샛길로 우회하여 적진 1백여 리 앞까지 도달하자 비로소 오랑캐들이 눈치챘다. 원상과 답돈이 군사를 거느리고 번성(凡城)에서 맞서 싸웠는데 기병과 군세가 매우 강성했다.

조조가 높은 곳에 올라 적의 진영을 바라보고는 군대를 잠시 멈추게 한 뒤, 적의 대열이 조금 흐트러지는 빈틈을 엿보아 장료(張遼) 등을 출격시켜 적을 단숨에 격파하고 진전에서 답돈의 목을 베니 들판에 적의 시체가 가득 널렸다. 속부환(速附丸), 누반, 오연 등은 요동으로 달아났으나 요동의 공손강이 이들의 목을 모두 베어 조조에게 보내왔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항복했다.

유주와 병주에서 염유가 관할하던 오환 1만여 부락을 모두 내지(中國)로 이주시켜 살게 하고, 그들의 후왕과 대인들이 무리를 이끌고 조조의 정벌 전쟁에 종군하게 하였다. 이로써 ’삼군 오환(三郡烏丸)’의 기병은 천하제일의 정예 기병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역주: 백랑산(白狼山) 전투와 ’천하명기(天下名騎)’의 탄생】

  1. 건안 11년(206)인가 12년(207)인가:
    • 본문은 “건안 11년 조조가 유성(柳城)을 친히 쳤다”고 하나, 실제 백랑산 대첩은 건안 12년(서기 207년) 음력 8월입니다. 진수 본문이 원정을 결의한 해(206년 말~207년 초)와 결전 해를 압축한 것으로, 후한서·위서 연표와 대조해 읽어야 합니다.
  2. 곽가(郭嘉)의 유책(遺策)과 험로 우회:
    • “잠군궤도(潛軍詭道), 적진 100여 리 앞에서야 발각”이라는 대목 뒤에는, 유표·유비의 반대에도 “원상 형제가 오환에 붙어도 공고하지 못하니 서둘러 치라”는 곽가의 건의, 역수(易水)무종(無終)백랑산으로 이어지는 험로 우회, 등고망진(登高望陣) 뒤 적의 소동(小動)을 포착한 장료(張遼) 선봉의 기습이 있습니다. ’진전참답돈(臨陣斬蹋頓)’의 주인공이 장료라는 것은 삼국지 장료전에서 보충됩니다.
  3. 공손강의 ’전송수급’과 1만락 내지 이주의 의미:
    • 속부환·누반·오연이 요동으로 달아나자 공손강이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낸 것은, 공손씨도 조조와 척지기 싫어 원씨 잔당 토벌에 협조했음을 뜻합니다. 이어 염유 관할 유·병주 오환 1만여 락을 내지로 이주시켜 후왕·대인 이하 종군시킨 것이 곧 삼군오환 돌기병(突騎)으로, 적벽 직전까지 조위 군사력의 핵심 기동타격대가 됩니다. 경초 원년(237) 관구검의 요동 정벌 때 구루돈·호류엽 5천여 명이 귀순한 것(§5)은 이 이주 오환과 별도로 요서에 잔류했던 세력입니다.

5. 위략 주석 (모구검의 요동 토벌과 오환의 귀순)

〔一〕 魏略曰:景初元年秋,遣幽州刺史毌丘儉率眾軍討遼東。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眾王護留葉,昔隨袁尚奔遼西,聞儉軍至,率眾五千餘人降。寇婁敦遣弟(阿羅獎)〔阿羅槃〕等詣闕朝貢,封其渠帥三十餘為王,賜輿馬繒采各有差。

【번역】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경초(景初) 원년(서기 237년) 가을,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에게 여러 군대를 통솔하여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게 했다. 이때 우북평 오환 선우 구루돈(寇婁敦)과 요서 오환 도독 솔중왕 호류엽(護留葉)은 옛날 원상을 따라 요서로 달아났던 자들인데, 관구검의 군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5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왔다.

구루돈은 아우 아라반(阿羅槃) 등을 보내 대궐에 나아가 조공을 바치니, 조정에서는 그들의 우두머리 30여 명을 왕에 봉하고 수레와 말,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역주: 오환(烏丸)의 역사적 실체와 조위(曹魏) 최정예 기병 편입】

  1. 동호(東胡)의 후예와 몽골계 유목민:
    • 오환은 기원전 3세기 흉노 묵돌선우에게 멸망당한 동호(東胡 - 몽골·퉁구스계 고대 유목민족)의 잔여 집단이 대흥안령산맥 남단의 오환산(烏丸山)으로 피신하면서 형성된 종족입니다.
    • 주거는 게르(궁려)에 살며 이동 목축을 하고, 여성의 권리가 강하며(데릴사위제적 풍속), 영혼이 적산(赤山)으로 간다는 독특한 샤머니즘적 내세관을 가졌습니다.
  2. 삼국지 시대의 패자, 원소와의 결탁과 백랑산 전투(207년):
    • 후한 말 요서의 답돈(蹋頓)이 등장하여 3군 오환을 통합하고 스스로 ’선우’를 칭하며 북방의 패자로 군림했습니다. 답돈은 원소(袁紹)와 깊은 혼인 동맹을 맺고 원씨 가문을 후원하여 조조를 위협했습니다.
    •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하고 원상·원희 형제가 오환으로 도망쳐오자, 조조는 곽가(郭嘉)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방 원정을 감행했습니다.
    • 서기 207년 백랑산(白狼山) 전투에서 조조 휘하의 맹장 장료(張遼)가 기습 돌격을 감행하여 답돈의 목을 베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오환의 독자 세력은 궤멸되었습니다.
  3. ’천하제일 기병(天下名騎)’으로 조조군에 편입:
    • 조조는 항복한 오환 족속 수만 호를 내지(중원)로 이주시키고, 오환의 용맹한 기병들을 자신의 친위 기병대(삼군오환 돌기병)로 재편했습니다.
    • 이 오환 기병들은 조조가 마초·한수와의 동관 전투, 유비·손권과의 형주 쟁탈전 등 삼국 통일 전쟁에서 전장을 휩쓰는 결정적인 기동 타격대로 활약하며 조위의 군사적 패권 구축에 막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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