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본문 + 배송지(裵松之) 주석 완역. 한문 원문과 번역 1:1 대역, 역주 포함. 연구용 참고본으로 출간서적과 대조 바랍니다.



[특별부록 4] 고조선·위만조선과 연(燕)나라의 관계사 — 칭왕(稱王) 대립부터 만번한 국경, 위만의 찬탈과 왕검성 결사항전까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 본문과 배송지 주석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바다를 건너 남천하여 ’한왕(韓王)’을 자칭한 내력이 실려 있다(『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조」 및 배송지 주 인용 『위략』).

그러나 이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단발적 돌발 사태가 아니었다.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戰國時代) 이래 중국 북방의 강국인 연(燕)나라와 만주·한반도의 패자였던 고조선(古朝鮮) 사이에 200여 년간 누적되어 온 치열한 영토 분쟁, 외교적 각축, 문명 교류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본 특별부록은 『사기(史記)』 「조선열전」·「흉노열전」, 『한서(漢書)』 「조선전」, 『삼국지(三國志)』 배송지 주 인용 『위략(魏略)』, 그리고 고려 시대 『제왕운기(帝王韻紀)』 등 동시대 및 후대의 1차 사료들을 정밀 교감하여, 고조선과 연나라의 칭왕 대립부터 만번한 국경 확정, 위만의 망명과 사기 찬탈극, 그리고 한 무제와의 1년 전면전과 왕검성 결사항전에 이르는 전 과정을 각 사건의 1차 사료 출처를 괄호 안에 명확히 명기하며 종합적으로 정리한다.


1. 고조선의 국가적 위상과 전국 7웅 연(燕)나라의 대립

(1) 주권국가 고조선의 실체: 단순 오랑캐가 아닌 대등한 ’왕(王)’의 국가

중국의 전통 사서들은 중화 중심의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고조선을 ’동이(東夷)’의 범주로 다루었으나, 사료에 나타난 고조선의 실체는 중원의 제후국들과 대등한 국가 체제를 갖춘 강력한 주권국가였다.

기원전 4세기, 중원은 주(周)나라 왕실의 권위가 완전히 실추되고 전국 7웅(戰國七雄: 진·초·제·연·조·위·한)이 저마다 ’왕(王)’을 참칭하며 패권을 다투던 전국시대 후기에 돌입했다. 이때 하북성과 요서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연나라는 본래 주나라 왕실의 제후국(소공 석의 봉토)이었으나, 기원전 323년 연 역왕(易王) 대에 이르러 스스로 왕호(王號)를 사용하기 시작했다(『사기』 권34 「연소공세가」, 『전국책』 권29 「연책1」).

(2) 『위략』이 전하는 기원전 4세기 ’조선후(朝鮮侯)’의 칭왕과 대부 예(禮)의 외교 담판

배송지가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인용한 어환의 『위략(魏略)』은 당시 고조선과 연나라의 첨예한 외교적 충돌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한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魏略)』: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고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을 칭하며 동쪽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朝鮮侯亦自稱爲王),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연나라를 쳐 주나라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자 고조선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기를, ‘연나라를 치는 것보다 사신을 보내 연나라를 설득하는 편이 낫습니다’ 하니, 왕이 이를 옳게 여겨 예를 서쪽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설득하게 하였다. 연나라 역시 이를 받아들여 군사를 멈추고 고조선을 공격하지 않았다.”
(원문: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이 사료(『위략』)는 한국 고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입증한다:

  1. 대등한 칭왕(稱王): 고조선은 중원의 연나라가 기원전 323년 왕을 칭하자마자 즉각 대등하게 왕호를 사용한 독립 주권국이었다(『위략』).
  2. 군사적 자신감: 연나라가 동방을 넘보려 하자 고조선이 먼저 선제타격으로 연나라를 역습하려 할 만큼 군사적 기세가 당당했다(『위략』).
  3. 체계적인 관료제와 외교 역량: 왕의 결정을 직언으로 바로잡는 ’대부(大夫)’라는 고위 관직이 존재했고, 사신 파견을 통해 전쟁을 외교적 협상으로 매듭짓는 고도의 외교 역량을 구비하고 있었다(『위략』).

2. 연나라 명장 진개(秦開)의 기습 침공과 ‘만번한(滿番汗)’ 국경선

(1) 연 소왕(昭王)과 명장 진개의 침공 (기원전 3세기 초)

고조선과 연나라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에 즉위한 소왕(昭王, 재위 기원전 312~279)은 곽외(郭隗)를 스승으로 모시고 황금대(黃金臺)를 쌓아 천하의 인재를 모으며 부국강병을 추진했다(『사기』 권34 「연소공세가」).

소왕은 명장 진개(秦開)를 등용했다. 진개는 일찍이 북방 유목민인 동호(東胡)에 볼모로 가 있으면서 북방 민족의 지리와 군사 전술을 훤히 꿰뚫고 있던 인물이었다. 진개는 군사를 이끌고 먼저 동호를 기습 격파하여 1천여 리를 물리친 뒤(『사기』 권110 「흉노열전」), 말머리를 돌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전격 침공하였다(『위략』).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魏略)』:
“그 뒤에 연나라에서 명장 진개(秦開)를 보내 그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조선이 마침내 쇠약해졌다.”
(원문: 其後燕往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2) “한반도에 2천 리 땅이 있는가?” — 영토 2천 리 상실과 ‘만번한’ 국경이 증명하는 고조선의 대륙 강역

진개의 침공으로 고조선은 서쪽 영토 2천여 리를 상실하는 뼈아픈 타격을 입었으며(『위략』), 양국의 국경선은 만번한(滿番汗)으로 후퇴하였습니다(『위략』).

이 대목은 일제 식민사학과 주류 통설이 주장하는 ’한반도(평양) 중심 고조선설’의 허구를 폭로하는 가장 결정적인 지리적·사료적 반증입니다:

  1.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한반도 2천 리’의 모순:
  2. 2천 리(800km)의 지리적 실체 = 북경에서 요동까지의 대륙 강역:

3. 진·한 교체기의 격변과 위만(衛滿)의 사기 찬탈극

(1) 진시황의 통일과 고조선 왕 부(否)·준(準)의 계보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이 전국 7웅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통일하자, 연나라 역시 멸망하여 진나라 요동군으로 편입되었다(『사기』 권6 「진시황본기」). 진시황은 몽염(蒙恬)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북방 만리장성을 쌓게 하고 요동 요새를 수축하였다(『사기』 권88 「몽염열전」).

이 시기 고조선에서는 왕 부(否)가 즉위해 있었다. 왕 부는 진나라의 무력 침공을 경계하여 겉으로는 진나라에 거짓 복종하는 척 칭번(稱藩)하면서도 결코 진시황의 대궐에 입조(入朝)하지는 않았다(『삼국지』 권30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 왕 부가 죽고 그의 아들 준(準, 기준)이 즉위하였다(『위략』).

이 기준(箕準)이 바로 한국 전통 문헌(『제왕운기』 권하 「기자조선조」 등)에서 단군조선(전조선)의 뒤를 이은 ’기자조선(후조선)’의 제41대 마지막 국왕이자, 『삼국지』 한전 본문에 등장하는 준왕(準王)이다.

(2) 연왕 노관(盧綰)의 반란과 위만(衛滿)의 위장 귀순 (기원전 195년)

기원전 202년 한 고조 유방(劉邦)이 한나라를 세웠으나(『사기』 권8 「고조본기」), 요동 변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한나라는 요동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자 옛 연나라와 고조선의 경계였던 패수(浿水)를 국경선으로 삼고 잠정적 안정을 꾀했다(『사기』 권115 「조선열전」).

그러나 기원전 195년, 한 고조의 죽마고우이자 연왕(燕王)으로 책봉되었던 노관(盧綰)이 한 조정의 숙청을 두려워하여 흉노로 망명하는 반란이 일어났다(『사기』 권93 「한신노관열전」, 권115 「조선열전」). 이때 노관의 부하 장수였던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천여 명을 규합하여 동쪽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사기』 「조선열전」, 『위략』).

위만은 준왕을 안심시키기 위해 매우 치밀한 위장 전술을 폈다:

(3) 준왕의 순진한 신임과 ‘서계 100리’ 봉토

준왕은 위만의 거짓 투항을 순진하게 믿었다. 준왕은 위만을 파격적으로 우대하여 고위 관직인 ‘박사(博士)’에 임명하고, 왕의 신표인 ‘규(圭)’를 하사하며, ‘서계 100리(西界百里)’의 광대한 영지를 떼어주어 서쪽 변방 수비를 전담시켰다(『삼국지』 권30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

그러나 위만에게 서계 100리는 고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완벽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위만은 진·한 교체기 연·제·조의 망명 유민들을 대거 유인하여 은밀히 사병(私兵) 세력을 길렀다(『사기』 권115 「조선열전」, 『위략』).

(4) 기원전 194년: 거짓 첩보와 왕검성 기습 사기극

마침내 기원전 194년, 발톱을 숨기고 있던 위만은 준왕에게 거짓 급사를 띄웠다:

“한나라 군사가 열 갈래로 쳐들어오니(言漢兵十道至), 대궐로 들어가 왕을 경호하게 해주십시오(求入宿衛).”
(『삼국지』 권30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

준왕이 위만을 믿고 궁궐 문을 열어젖히자, 경호하러 온다던 위만의 군사들은 왕검성 문턱에서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 준왕을 기습 공격(遂還攻準)하였다(『위략』). 불의의 일격을 당한 준왕은 제대로 군사를 수습하지 못한 채 왕도를 빼앗기고 패망하고 말았다(『위략』).


4. 준왕의 남천과 삼한(三韓)의 형성

(1) ‘주입해(走入海)’ — 배를 타고 바다로 달아난 준왕

위만에게 왕검성을 기습 찬탈당한 준왕은 육로가 아닌 배를 타고 바닷길로 탈출(將其左右宮人走入海)하였다(『삼국지』 권30 「한조」 본문 및 배송지 주 인용 『위략』).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조」 본문:
“조선후 준(準)이 참람하게 왕을 칭하다가 연나라 망명자 위만에게 공격을 받아 빼앗기자,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走入海) 남쪽 한(韓)의 땅에 머물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일컬었다. 그 후 대가 끊어졌으나 지금도 한인(韓人) 중에는 여전히 그의 제사를 받드는 자가 있다.”
(원문: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漢時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2) 전북 익산 금마(金馬) 도읍과 900년 고조선 사직의 계승

준왕이 바닷길을 통해 남천하여 정착한 ’한(韓)의 땅’은 고려·조선 시대 문헌(『제왕운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일관되게 전북 익산 금마(金馬, 마한 건마국)로 비정된다.

이 준왕의 남천은 한국 고대사에서 결정적인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다:

  1. 단군·기자 이래 고조선 정통 사직의 계승: 고조선의 국가 체제와 왕실 제사가 끊어지지 않고 한반도 남부 삼한으로 직결되었다(『삼국지』 한조 본문: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2. 선진 철기 문명의 남방 전파: 준왕을 따라 남하한 고조선의 궁인과 기술자, 군사 집단이 한반도 중남부 소국 사회에 최첨단 철기 문명과 국가 통치 제도를 일거에 이식시켰다.
  3. 마한·삼한의 모태: 마한 54개 소국 중 맹주국이었던 목지국(진왕)과 마한 소국들의 지배층 상당수가 이 준왕계 고조선 유민에 뿌리를 두고 있다(『삼국지』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

5. 위만조선의 성격: 중국의 식민지인가, 고조선의 정통 계승인가?

일제 식민사학과 중화주의 사관은 위만을 ’연나라 사람’이라는 점에만 집착하여 위만조선을 “중국인이 건국한 중국의 식민 정권”으로 왜곡하려 했다. 그러나 1차 사료(『사기』·『위략』)가 증언하는 위만조선의 본질은 철저히 고조선의 언어, 복식, 관제를 계승한 토착 정권의 연속이었다.

  1. 국호 ’조선(朝鮮)’의 계승: 위만은 왕검성을 차지한 뒤 국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조선’을 계승하였다(『사기』 권115 「조선열전」, 『한서』 권95 「조선전」).
  2. 복식과 문화의 일체화: 위만은 입국 당시부터 상투를 틀고 호복을 입음으로써 고조선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다(『사기』 「조선열전」: “魋結蠻夷服”).
  3. 토착 귀족의 국정 주도: 위만조선의 최고 수뇌부 관직에는 연나라계 망명자뿐만 아니라 조선상 역계경(歷谿卿), 이계상 삼(參), 대신 성기(成己) 등 토착 예맥계 귀족들이 대거 포진하여 국정을 좌우했다(『사기』 「조선열전」, 『한서』 「조선전」, 『위략』).
  4. 외교 노선의 독자성: 위만은 요동태수와 외신(外臣) 조약을 맺어 선진 물자를 공급받았으나(『사기』 「조선열전」), 손자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주변 소국(진번·임둔)을 복속시키고 한나라와 대등하게 맞서며 남쪽 진국(辰國)의 한나라 통교를 가로막는 독자적 패권국으로 군림했다(『사기』 「조선열전」).

6. 고조선-한(漢)의 1년 전면전과 왕검성 결사항전 (기원전 109~108년)

위만조선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대에 이르러 조선의 세력이 막강해지자, 한나라의 패권 군주 한 무제(漢武帝)는 위만조선을 중원의 치명적인 배후 위협으로 간주하였다(『사기』 권115 「조선열전」).

(1) 사신 섭하(涉何) 살해 사건과 한 무제의 전면 침공 (기원전 109년)

기원전 109년 봄, 한 무제는 사신 섭하(涉何)를 파견하여 한나라에 복속하고 직조공 통로를 열 것을 협박했다(『사기』 권115 「조선열전」). 우거왕이 단호히 거절하자, 섭하는 귀국길 국경 패수에 이르러 자신을 정중히 전송하던 고조선의 비왕(裨王, 부왕) 장(長)을 기습 살해하고 요동으로 달아났다(『사기』 「조선열전」).

한 무제는 섭하를 벌하기는커녕 요동 동부도위로 승진시켰다(『사기』 「조선열전」). 이에 분노한 우거왕은 즉각 군사를 출병시켜 국경을 넘어 섭하를 기습 참수하여 국가의 자존을 지켰다(『사기』 「조선열전」).

이를 구실로 한 무제는 그해 가을, 육군 5만(좌장군 순체)과 수군 7천(누선장군 양복)을 총동원하여 고조선 전면 침공을 단행했다(『사기』 권115 「조선열전」, 『한서』 권6 「무제기」).

(2) 패수 대첩과 왕검성 해전: 고조선의 연이은 대승

한 무제의 침공군은 고조선의 결사적인 저항에 부딪혀 개전 초부터 궤멸적인 참패를 당했다:

(3) 왕검성 1년 공방전과 내부 분열, 대신 성기(成己)의 최후 항전

순체와 양복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왕검성을 포위했으나, 성안의 조선 군민은 1년 동안 결사항전하며 한나라 대군을 묶어두었다(『사기』 「조선열전」). 한 무제가 보낸 평화협상 사신 위산(衛山)의 회유도 결렬되었다(『사기』 「조선열전」).

그러나 1년에 걸친 장기 농성으로 식량이 고갈되자, 지배층 내부에서 주화파 귀족들의 배반이 시작되었다:

우거왕이 피살된 뒤에도 고조선의 대신 성기(成己)는 항복을 거부하고 백성들을 규합하여 성문을 걸어 잠근 채 끝까지 항전하였다(『사기』 권115 「조선열전」).

한나라 군대는 성기의 결사항전을 끝내 군사력으로 뚫지 못하고,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과 조선상 로인의 아들 최(最)를 매수하여 성기를 암살하게 한 뒤에야 마침내 왕검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사기』 권115 「조선열전」).


7. 핵심 1차 사료 근거 대조표

고조선-연나라 관계사와 위만조선의 흥망은 단일 사서가 아니라 여러 사서의 기록이 서로 보완되어 전해진다. 각 사건별 사료 출처와 기록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구분된다:

역사적 사건 / 내용핵심 1차 사료 출처사료의 성격 및 특징
기원전 4세기 연나라 칭왕『사기』 권34 「연소공세가」, 『전국책』 「연책」중원 전국 7웅의 왕호 자칭 기록
조선후(朝鮮侯) 칭왕과 대부 예의 외교 담판『삼국지』 권30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魏略)』고조선의 대등한 주권 의식과 관료제 증언 (『사기』에는 누락)
연 진개(秦開)의 동호 격파『사기』 권110 「흉노열전」진개의 북방 군사 배경 기록
진개의 조선 침공과 2천 리 상실, 만번한 국경『삼국지』 권30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魏略)』기원전 3세기 초 국경선 변동의 유일한 직접 기록
고조선 왕 부(否)와 준(準)의 즉위 계보『삼국지』 권30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魏略)』진시황 시기 고조선 왕실 계보 보존
기자조선 41대 국왕 계보『제왕운기』 권하 「기자조선조」한국 전통 사서의 계보 인식
연왕 노관의 반란과 위만의 1천 명 망명『사기』 권115 「조선열전」, 『위략』한 초 북방 정세와 위만의 이동
위만의 상투와 호복(魋結蠻夷服)『사기』 권115 「조선열전」, 『한서』 권95 「조선전」위만의 고조선 문화 동화
준왕의 박사 임명과 서계 100리 봉토『삼국지』 권30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魏略)』위만에게 서쪽 방파제 역할을 맡긴 경위 (『사기』에는 간략화)
위만의 거짓 첩보와 왕검성 기습 찬탈 (기원전 194년)『삼국지』 권30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魏略)』찬탈 과정의 구체적 정황(한병십도지 첩보 등) 상세 기록
준왕의 주입해(走入海)와 한왕 자칭『삼국지』 권30 「한조」 본문 및 『위략』준왕 남천과 한(韓) 형성의 결정적 근거
준왕의 익산 금마군(金馬郡) 도읍『제왕운기』 권하 「마한조」, 『삼국유사』 마한조한국 전통 지리지 및 사서의 비정
위만조선 토착 관료진 (역계경·삼·성기 등)『사기』 권115 「조선열전」, 『한서』 「조선전」위만 정권의 토착적 연속성 입증
섭하 살해 사건 및 한 무제의 5만 7천 침공 (기원전 109년)『사기』 권115 「조선열전」, 『한서』 「무제기」고조선-한 전면전 발발 경위 상세 기록
패수 대첩과 왕검성 해전 승리『사기』 권115 「조선열전」고조선 방어군의 초기 군사적 대승
조선상 역계경의 2천여 호 남쪽 진국(辰國) 망명『삼국지』 권30 「한조」 배송지 주 인용 『위략(魏略)』왕검성 공방전 도중 토착 귀족의 이탈 기록 (『사기』에는 없음)
우거왕 암살과 성기(成己)의 결사항전 (기원전 108년)『사기』 권115 「조선열전」왕검성 함락 과정과 마지막 항전 지도자 기록

8. 총괄: 고조선·위만조선·연나라 관계사가 남긴 역사적 교훈

고조선과 연나라, 위만조선과 한나라로 이어진 300여 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대한 교훈과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1. 자주적 제국 의식의 원류: 고조선은 결코 중원 왕조의 책봉이나 눈치를 보던 소국이 아니라, 전국 7웅 연나라와 대등하게 왕호를 칭하고 영토를 다투던 대등한 주권국가였다(『위략』).
  2. 남북을 잇는 사직의 연속성: 위만의 찬탈로 왕검성을 잃은 준왕이 바다를 건너 익산에 도읍하고 한왕을 자칭함으로써(『삼국지』 한조 본문, 『제왕운기』), 고조선의 유민과 철기 문명은 고스란히 삼한(마한)으로 이어져 백제와 신라, 가야의 직접적인 젖줄이 되었다.
  3. 분열이 부른 패망의 비극: 한 무제의 5만 7천 대군도 1년 동안 뚫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왕검성은 한나라 군대의 무력이 아니라, 주화파 귀족들의 비열한 변절과 국왕·결사항전 지도자(우거왕·성기)의 연쇄 암살이라는 내부 분열 때문에 무너졌다(『사기』 「조선열전」).

결국 『삼국지』 동이전에 등장하는 삼한(마한·진한·변한)의 눈부신 철기 생산과 독자적인 정치 체제, 소도와 천군의 제정분리 사회는, 바로 이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장엄한 투쟁과 남천의 토대 위에서 피어난 찬란한 역사적 결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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