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東夷傳)을 완역하고 강독하면서 가장 많은 독자와 연구자들이 품게 되는 근본적인 의문 중 하나는 “고조선(단군·위만조선)과 부여(夫餘)는 대체 어떤 역사적 계승 관계를 갖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일반적인 대중 역사 인식 속에서 한국 고대사는 “단군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 설치 및 부여·고구려·삼한 발흥 → 삼국시대”라는 단선적인 직계 계보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대 1차 사료인 진수(陳壽)의 『삼국지』 동이전을 펼쳐보면, 놀랍게도 부여는 고조선의 멸망이나 한사군의 설치와는 전혀 무관하게, 만주 대평원에서 독자적인 법제와 관직,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완전히 별개의 강국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부여의 국왕은 고조선 본토를 상징하는 ‘예왕의 도장(濊王之印)’을 대대로 차고 다니며, 부여의 노인들은 자신들의 선조를 “옛날에 도망쳐 온 망명자(亡人)”라 부르고 있습니다.
본 부록에서는 『사기』·『한서』·『삼국지』·『진서』·『위서』·『삼국사기』 등 동아시아 기본 고대 문헌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중심으로 부여의 역사적 실체와 4대 분파의 흐름을 정리합니다.
진수(陳壽)가 『삼국지』 동이전을 집필한 시점은 서기 3세기 후반(조위~서진 시대)입니다. 특히 동이전의 구체적인 통계와 풍속 묘사는 244~245년 관구검(毌丘儉)의 고구려 원정 당시 종군했던 관원들과 현도·낙랑·대방태수의 현지 조사 보고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 고조선(위만조선)이 한무제(漢武帝)의 침공으로 멸망한 해는 기원전 108년입니다. 즉, 『삼국지』가 쓰인 시점에서 고조선은 이미 멸망한 지 350년에서 400년 가까이 흐른 까마득한 옛 역사였습니다. 당대 위(魏)나라 관료들에게 한반도 서북부와 요동은 이미 수백 년간 한사군(낙랑·대방군)으로 굳어진 질서였으므로, 당대 살아 움직이는 북방 강국인 부여를 기록하면서 수백 년 전 멸망한 고조선과의 고대사적 계보를 굳이 추적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신화 시대부터 당대까지를 꿰뚫는 통사(通史)라면, 진수의 『삼국지』는 철저히 당대 삼국(위·촉·오)의 흥망과 주변 접경 세력의 현황을 기록한 편년·기전체 사서입니다.
동이전의 편찬 목적은 중원 왕조의 동북방 안보를 위해 “현재 살아있는 이민족들의 영토 크기, 군사 동원력, 관직 제도, 조공 관계, 전략 물자”를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조선은 고구려전 서두(“남쪽은 옛 조선·예맥과 접해 있다”)처럼 낙랑군의 옛 지명 흔적으로만 스쳐 지나갈 뿐, 고대 민족 계통의 뿌리를 파고들지 않았습니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부여가 애초부터 고조선의 영토 안에서 갈라져 나온 속국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삼국지』 이전 기원전 시기부터 고대 동북아시아는 지리적 환경과 생태계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거대한 문명 축이 병존하며 전개되었습니다.
[고대 동북아의 2대 문명 축 (기원전 형성기·병존기)]
┌─────────────────────────────────────────────────────────────┐
│ 1. 남서축: 고조선 문화권 (요동 ~ 서북한 대동강 유역) │
│ - 온대 농경 문화, 비파형동검 ─▶ 세형동검·고인돌 │
│ - 중원(연·제·한)과 국경을 맞댄 농경·철기·중계교역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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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북동축: 부여 문화권 (만주 길림·송화강 대평원) │
│ - 냉대 평원·초원, 서단산 문화 ─▶ 포자연 문화 (반농반목) │
│ - 마필(말), 담비·여우 모피, 적옥(赤玉), 기마 수렵 경제 │
│ - 마가·우가·저가·구가(6축 관명)와 사출도(四出道) 분할 통치│
└─────────────────────────────────────────────────────────────┘실제로 기원전 2세기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을 보면 전국시대(기원전 3~4세기) 연(燕)나라의 지리를 설명할 때:
“연나라는 북쪽으로 오환·부여(夫餘)와 이웃하고, 동쪽으로는 조선(朝鮮)·진번을 얽어매고 있다.”
라고 기록하여, 이미 기원전 수백 년 전부터 부여와 조선은 별개의 독립된 국가로 나란히 병존하고 있었음을 『사기』가 명백히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부여와 고조선은 완전히 무관했을까요? 『삼국지』 부여전 본문에는 겉보기와 달리 고조선·예맥 사회와의 깊은 내적 융합을 암시하는 두 가지 결정적인 수수께끼가 적혀 있습니다.
“나라에 예왕의 도장(濊王之印)이 있는데, 늙은이들이 대대로 전하기를 옛날에 하사받은 것이라 한다. 나라 안에 옛 성이 있어 이름을 예성(濊城)이라 하니,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다.”
부여 왕이 차고 다니는 국가 공인 옥새의 글귀가 ’부여왕인’이 아니라 ‘예왕의 도장’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사료입니다.
“부여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는 옛날에 도망쳐 온 망명자(亡人)다’라고 하였다.”
부여의 원로들이 자신들을 ’망명자’라 규정한 것은 두 가지 층위의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북방으로부터의 이동: 부여의 시조 동명(東明)이 북방 탁리국(고리국)에서 엄체수를 건너 남하하여 건국했다는 건국 신화(『위략』).
남방 고조선 유민의 유입: 기원전 3세기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고조선 침공, 혹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 전후로 요동과 한반도 북부(예맥)에서 북쪽 송화강 유역으로 피난해 올라간 고조선계 유민 집단이 토착민과 결합했을 가능성입니다.
고대 사서에 등장하는 ’부여’는 결코 단일한 한 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성장 및 외침과 맞물려 부여는 크게 4개의 독자적인 계통으로 분화하여 한국 고대사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고대 문헌 사료 속 부여의 4대 분파 계통도]
┌─────────────────────────────────────────────────────────────┐
│ 1. 북부여 (北夫餘) : 만주 송화강 본류 (『삼국지』 부여) │
│ └──▶ 494년 멸망 후 북상 ──▶ 6~8세기 『위서』 두막루국 │
├─────────────────────────────────────────────────────────────┤
│ 2. 동부여 (東夫餘) : 가섭원/동해안 맹주 (해부루·금와·대소) │
│ └──▶ 서기 22년 고구려 대무신왕 공격으로 대소왕 전사·해체 │
├─────────────────────────────────────────────────────────────┤
│ 3. 갈사부여 (曷思夫餘) : 대소왕 막내동생 건국 (갈사국) │
│ └──▶ 서기 68년 고구려 태조대왕 때 투항하여 병합 │
├─────────────────────────────────────────────────────────────┤
│ 4. 연나부부여 (椽那部扶餘) : 대소왕 사촌이 1만 명 이끌고 투항│
│ └──▶ 고구려 5부의 '연나부(절노부)' 왕비족 (학계: '서부여') │
└─────────────────────────────────────────────────────────────┘『삼국지』 동이전 부여전의 중심 무대이자 부여의 종가(宗家)입니다. 만주 길림시 일대 송화강 대평원을 중심으로 사출도(마가·우가·저가·구가)를 거느렸으며, 8만 호의 대국으로 한나라·조위·서진과 활발히 통교하며 동북방 질서의 핵심 축을 담당했습니다.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만주를 호령하다가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씨의 침략과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 팽창 속에서 쇠퇴하여, 마침내 494년(고구려 문자명왕 3년) 부여 왕실이 처자식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본국의 국가 체제가 완전히 흡수·통합되었습니다.
💡 【왜 중국 사서의 ’부여’가 곧 한국 사서의 ’북부여’인가?】
중국 정사(『사기』·『한서』·『삼국지』·『후한서』·『진서』)에는 ’북부여’라는 별도 명칭 없이 줄곧 ‘부여(夫餘)’ 단일 국호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북부여(北夫餘)’라는 명칭이 핵심 본국으로 빈번히 등장합니다. 이 둘을 동일한 본국으로 확정하는 결정적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외 공식 국호 vs 방위상 구분 (시각의 차이): 중국 왕조 입장에서 외교와 조공의 공식 상대는 오직 송화강 본류를 통치하던 단 하나의 부여 왕실(위구태·간위거·마여·의려 등)뿐이었으므로 대외 공인 국호인 ’부여’로 일관되게 기록했습니다. 반면 고구려의 시각에서는 해부루·금와 세력이 동해안(가섭원)으로 분파해 나간 나라를 ‘동부여(東夫餘)’라 불렀으므로, 그에 대비하여 원래 만주 본토에 남은 종가이자 고구려 북쪽에 위치한 본국을 방위상 ‘북부여(北夫餘)’라 구별하여 부른 것입니다.
『위서(魏書)』의 결정적 교차 증언: 북위(北魏)의 정사인 『위서』 권100 두막루전은 494년 고구려에 병합된 송화강 부여 본국을 명백히 “옛 북부여(舊北扶餘)”라고 명시했습니다. 나아가 두막루국이 차고 있던 왕의 도장이 바로 『삼국지』 부여전에 기록된 ‘예왕의 도장(濊王之印)’이자 옛 도읍이 ‘예성(濊城)’임을 증언함으로써, 『삼국지』의 부여 = 494년 멸망한 부여 본국 = 북부여임이 사료상 완벽히 일치합니다.
494년 멸망 기사의 일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3년(494년) 조의 “부여왕(扶餘王)이 처자를 이끌고 나라를 바쳐 항복했다”는 기록과, 『위서』의 “고구려가 북부여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은 동일한 494년의 역사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광개토대왕릉비 역시 시조 추모왕의 뿌리를 “북부여천제지자(北夫餘天帝之子)”라 규정하여 만주 송화강 본토 부여를 북부여로 칭했음을 확인해 줍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부여에서 도읍을 동해 바닷가 가섭원(迦葉原, 두만강 하구 연해주 훈춘 일대 추정)으로 옮겨 세운 나라입니다. 주몽의 고구려와 경쟁하다가, 서기 22년 고구려 대무신왕의 친정으로 대소왕이 전사하면서 국가 체제가 와해되었습니다.
대소왕이 죽자 그의 막내동생(季弟)은 압록곡 갈사수(曷思水) 가로 도망쳐 토착 수령을 죽이고 나라를 세워 ’갈사왕’이라 칭했습니다. 호동왕자의 어머니인 갈사부인이 바로 이 갈사왕의 손녀입니다. 갈사국은 서기 68년 갈사왕의 손자 도두왕(都頭王)이 고구려 태조대왕에게 나라를 들어 투항하면서 고구려의 우태(于台) 관직을 받고 완전히 편입되었습니다.
서기 22년 동부여가 망할 때, 대소왕의 사촌 동생(從弟)은 “나라가 망하여 의지할 데가 없으니 고구려에 귀순하는 것만 못하다”며 1만여 명의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습니다(『삼국사기』 권14 대무신왕 5년 조).
『삼국지』 부여전에 “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고 기록된 의려왕은 말년에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3세기 말 선비족의 침공 등으로 요동과 만주의 부여계 세력이 동요할 때, 유민의 일부가 한반도 남부로 남하하여 가야(加耶)의 지배층으로 융합되었다는 고고학적 연구가 활발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민족사학 및 재야사학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지』 등 단편적인 고대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다양한 가설적 체계를 제시해 왔습니다. 비록 학술적 사료 비판의 잣대로는 한계가 있으나, 고대사 담론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이를 정리해 둡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을 신조선(진조선·진한), 말조선(막조선·마한), 불조선(번조선·번한)의 3한 분립 체제로 파악했습니다.
3세기 말 선비족의 침공으로 의려왕이 자결하고 부여가 일시 해체되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을 때, 만주와 요동의 부여계 유민 세력이 한반도 남부(가야)를 거쳐 일본 열도로 이동했다는 가설은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에서 꾸준히 주목받아 온 주제입니다.
부여 본국(북부여)은 494년 고구려에 병합되면서 동북아 정치 무대에서 공식적으로 퇴장했습니다. 그러나 부여의 역사는 여기서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494년 본국 멸망 이후의 시점인 6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중국의 정사(正史) 사료에는 북부여의 유민들이 고구려의 지배를 벗어나 더 북쪽으로 올라가 세운 두막루국(豆莫婁國, 달말루)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독립된 열전으로 전해집니다.
“두막루국(豆莫婁國)은 물길(勿吉) 북쪽 1천 리에 있고, 낙양과의 거리는 6천 리이며, 옛 북부여(舊北扶餘)이다. 처음에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망시키자, 남은 무리가 나하(那河)를 건너 그곳에 살았다. 그 땅은 매우 비옥하며 사방 2천 리이고, 몽만수(蒙漫之水)가 있다. 사람들은 키가 크고 굳세며 뜻과 기개가 있고, 풍속은 숙신과 같으나 언어는 부여와 같다(言語與夫餘同)… 그 왕의 인장은 한자 전서(漢篆)로 새겼는데 글에 ’예왕의 도장(濊王之印)’이라 하였고, 나라에 옛 성이 있어 이름을 ’예성(濊城)’이라 하니 대개 본래 예맥의 땅이다.”
“달말루(達末婁)는 스스로 북부여의 후예라고 말한다(自言北夫餘後).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망시키자 남은 무리가 나하(那河)를 건너가 살았는데, 혹 대막루(大莫婁)라 하고 대막로(大莫盧)라고도 한다. 그 땅은 실위(室韋)의 동쪽이고 동북으로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이르며… 개원(開元) 11년(서기 723년, 당 현종), 그 국왕 막사사(莫斯仕)가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두막루국은 옛 북부여이다… 언어가 부여와 같다(言語與夫餘同). 오곡을 좋아하고 삼베를 짜며, 성품이 강직하고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한다(俗好飲酒歌舞). 혼인에 예법이 있고, 사람이 죽으면 널(관)만 쓰고 덧널(곽)은 쓰지 않으며 들에 장사지내되 봉분을 만들지 않는다.”
900년에 걸친 부여사의 영속성: 494년 고구려에 병합된 북부여의 유민들은 나하(那河, 지금의 눈강·송화강 하류)를 건너 흑룡강성 일대에 ’두막루(달말루)’를 재건했습니다. 이들은 당 현종 개원 11년(723년) 국왕 막사사(莫斯仕)가 사신을 보내 조공할 때까지 최소 250년 이상 부여의 언어와 풍속을 보존하며 존속했습니다.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따지면 장장 9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부여 계통의 국가가 명맥을 이어간 것입니다.
’예왕지인(濊王之印)’의 불멸의 상징: 『삼국지』 부여전에 기록되었던 옥새 ’예왕지인’과 ’예성’의 기억이 수백 년 뒤 북위 『위서』 두막루전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두막루국이 북부여 왕실의 직계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한 공식 후계국이었음을 1차 사료가 명백히 입증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부여와 고조선의 관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결코 두 나라가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역사의 실체: 고조선과 부여는 각각 남서(요동-대동강)와 북동(만주 대평원)에서 독자적인 생태계와 문화를 바탕으로 병존하던 동북아 고대 문명의 두 거대한 기둥이었습니다.
융합의 과정: 고조선이 연나라와 한나라의 침략으로 요동을 상실하고 서북한으로 밀려나 멸망해 갈 때, 그 유민과 예맥의 선진 문물은 북쪽 송화강의 부여로 대거 흡수되었고, 이는 부여왕의 ‘예왕지인’과 ‘망명자 전승’으로 화석처럼 각인되었습니다.
부여의 생명력: 부여는 단일한 멸망으로 끝나지 않고, 북부여의 정통성을 8세기까지 이어간 ‘두막루국’, 고구려의 핵심 왕비족을 형성한 ‘연나부부여(서부여)’, 그리고 남하하여 가야의 기마문화로 융합된 무리들로 분산되며 한국 고대사의 혈맥을 완성했습니다.
부여의 역사를 고조선의 곁가지가 아닌, 만주 대륙을 호령했던 또 하나의 위대한 독자 문명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삼국지』 동이전이 전하는 동북아 고대사의 웅대한 파노라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퓨쳐 / 역사자료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