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본문 + 배송지(裵松之) 주석 완역. 한문 원문과 번역 1:1 대역, 역주 포함. 연구용 참고본으로 출간서적과 대조 바랍니다.



한전(韓傳)

1. 삼한의 총설과 마한의 50여 국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各有長帥,大者自名為臣智,其次為邑借,散在山海間,無城郭。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郎將、都尉、伯長。

【번역】 한(韓)은 대방군(帶方郡)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가 지워지고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하니 사방이 대략 4천 리에 달한다.

세 갈래(삼종)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한다. 그 백성들은 정착 생활을 하며 곡식을 심고 가꾸며 누에를 쳐서 비단과 베를 짤 줄 안다. 부락마다 각기 장수(長帥)가 있어 우두머리 중 큰 자는 스스로 ’신지(臣智)’라 부르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부르며,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성곽(城郭)은 없다.

소국(小國)들로는 원양국, 모수국, 상외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 신분고국,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 일화국, 고탄자국, 고리국, 노람국, 월지국(月支國), 자리모로국, 소위건국, 고원국, 막로국, 비리국, 점리비국, 신흔국, 지침국, 구로국, 비미국, 감해비리국, 고포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 감해국, 만로국, 벽비리국, 구사오단국, 일리국, 불미국, 지반국, 구소국, 첩로국, 모로비리국, 신소도국, 막로국, 고랍국, 임소반국, 신운신국, 여래비리국, 초산도비리국, 일난국, 구해국, 불운국, 불사분사국, 원지국, 건마국, 초리국 등 무릇 50여 개국이 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구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구이며 총 10여 만 호에 달한다. 진왕(辰王)은 목지국(월지국)에 도읍하여 다스린다. 신지 중 특별한 자에게는 우호신운견지보안야축지분신리아불례구야진지렴(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 등의 존호가 덧붙여진다.

그 관직에는 위나라에서 제수한 위솔선,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 등이 있다.

【역주: 삼한(三韓)의 지리와 마한 50여국의 열거】

  1. ’대방 남쪽, 동서 바다, 남으로 왜와 접함’의 지리:
    • “대방 남쪽(帶方之南), 동서 바다로 한계, 남으로 왜와 접하고 사방 4천 리”라는 서술이 가리키는 실지는 낙랑·대방군의 위치를 어디에 비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낙랑군 위치 자체도 평양설(통설)과 요동·발해만설(재야사학) 등으로 의견이 갈리므로(§6 역주 2번 참조), 본문의 방위·거리 기록만으로 비정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통설(한반도설)에 따르면 대방 이남의 중남부 지역으로 보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라 한 것은 기자·위만 이전 토착 세력(진국)의 연속성을 본 것입니다.
  2. 신지(臣智)·읍차(邑借) 체제와 ‘무성곽(無城郭)’:
    • 읍락마다 장수(長帥)가 있고 큰 자를 신지, 다음을 읍차라 부르며 산해(山海) 사이에 흩어져 성곽 없이 산다는 것은, 마한이 소국 연맹체(국읍제) 단계였음을 뜻합니다. 변진(§11)은 “역시 성곽이 있다(亦有城郭)”고 대조되니, 성곽 유무가 국가 형성 단계의 지표입니다.
  3. 50여국 열거의 읽는 법(목지국·백제국·사로국):
    • 원양국부터 초리국까지 50여 소국 중 월지국(月支國)=목지국(目支國)에 진왕(辰王)이 도읍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6·§9의 “12국은 진왕에 속하고 진왕은 늘 마한인으로 삼는다”와 연결). 목록 속 백제국(伯濟國)은 훗날 백제의 전신 중 하나로, 사로국(駟盧國)은 신라 사로국의 전신으로 비정됩니다. “대국 만여 가, 소국 수천 가, 총 10여 만 호”는 부여(8만 호)·고구려(3만 호)와 비교되는 삼한의 인구 규모입니다.
  4. 신지의 존호(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와 위의 책봉 관직:
    • 신지 중 특별한 자에게 붙는 긴 존호는 연맹 내 서열(맹주급 군장) 표시로 보입니다. “위솔선(魏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도위·백장”은 대방군을 경유해 위가 삼한 군장들에게 내린 책봉 관직(인수)으로, §6의 “신지들에게 읍군 인수를 더하고 다음 자에게 읍장을 줌”과 같은 통제망입니다.
  5. ’남으로 왜와 접함(南與倭接)’과 임나일본부설 논쟁:
    • 본문은 동과 서로에 대해서는 바다가 경계(東西以海爲限)라고 적혀 있지만, 남쪽에 대해서는 바다라는 말 없이 왜국과 접한다(南與倭接)고만 적혀 있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학자들에게는, 이 구절이 한(韓)의 남쪽에 왜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근거가 됩니다. 즉 왜의 세력이 이미 한반도 남부에 미치고 있었다는 근거로 일본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합니다.
    • 반면 한국 학계 다수는 ’접(接)’을 육지 접경이 아니라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해상 인접·교섭 관계로 해석합니다. 변진 독로국이 “왜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與倭接界, §11)”는 서술도 같은 성격으로, 남해안-쓰시마-규슈를 잇는 해상 교역망의 표현으로 봅니다. ’접’의 해석을 둘러싼 이 대립은 임나일본부설 논쟁의 출발점 중 하나이므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2. 준왕의 남천과 한왕 칭호

侯準既僭號稱王,為燕亡人衛滿所攻奪,〔一〕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二〕其後絕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漢時屬樂浪郡,四時朝謁。〔三〕

【번역】 조선후 준(準)이 참람하게 왕을 칭하다가 연나라 망명자 위만(衛滿)에게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자,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통해 달아나 남쪽 한(韓)의 땅에 머물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일컬었다.

그 후 대가 끊어졌으나 지금도 한인(韓人) 중에는 여전히 그의 제사를 받드는 자가 남아 있다.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하여 사계절마다 군의 관아에 나아가 조알하였다.

【역주: 준왕(準王)의 남천과 ‘한왕(韓王)’ 자칭 — 고조선 준왕의 사직 종말과 위만의 찬탈】

  1. ’조선후 준(侯準)’의 정체와 전통 문헌의 인식:
    • 진수(陳壽)는 중국 중심의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참람하게 왕을 칭했다(僭號稱王)”고 폄하했으나, 당시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전국 7웅(戰國七雄) 중 하나인 연(燕)나라와 대등하게 왕호를 사용하던 독자적인 주권국가였습니다.
    • 본문에 등장하는 ’조선후 준(侯準)’은 한국 고문헌에서 단군조선(전조선)의 뒤를 이은 ’기자조선(箕子朝鮮, 후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제41대 기준(箕準, 재위 기원전 220년경~기원전 194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해집니다(왕력과 재위 연대는 후대 문헌의 전승에 의거한 것입니다).
    • 고려 충렬왕 13년(1287) 이승휴(李承休)가 편찬한 『제왕운기(帝王韻紀)』 「후조선기(後朝鮮紀)」에서는 단군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조선을 ’후조선(後朝鮮)’으로 체계화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후조선의 시조는 기자(箕子)인데… 주나라 무왕이 멀리서 책봉하여 조서를 내렸다. 예의상 사양하지 못하고 기자가 주무왕에게 나아가 인사를 올리니 무왕이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떳떳한 도리를 물었다. 41대 손의 이름은 기준(箕準)인데 침탈을 당하여 백성을 떠났다. 928년간을 다스렸으니 끼친 풍속과 남은 공렬이 순수했다. 준왕은 마침내 금마군(金馬郡, 현 전북 익산)으로 옮겨 도읍을 정하고 다시 백성을 다스렸다.”
      > (後朝鮮祖是箕子… 洪範九疇問尋倫, 四十一代孫名準, 被人侵奪去民, 九百二十八年理 遺風餘烈傳熙淳, 準乃移居金馬郡, 立都又復能君人)
    • 『상서대전(尙書大傳)』과 『사기(史記)』 송미자세가, 『한서(漢書)』 지리지 등에서도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이래 팔조금법(八條禁法)의 예의와 누에치기·직조 문명이 이어진 내력을 전합니다. 『제왕운기』 등 전통 문헌에서는 이를 900여 년 기자조선(후조선)의 왕통으로 체계화하여 인식했으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토착 예맥계 지배층이 중원 망명 세력 및 유교적 기자 전승과 결합한 설화 또는 상징적 계보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2. 연나라 망명객 위만(衛滿)의 귀순과 위장 첩보를 이용한 기습:
    • 기원전 195년 한(漢) 고조 때 연왕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로 달아나자, 그의 부하였던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천여 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 위만은 준왕의 경계를 풀기 위해 조선인처럼 상투를 틀고 호복을 입은 채 패수(浿水)를 건너와 거짓 투항하며, “서쪽 변방에 살게 해주시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藩屛, 서쪽 국경 방파제)이 되겠다”고 청했습니다.
    •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고위 관직인 ‘박사(博士)’에 임명하고, 신표인 ‘규(圭)’를 하사하며, ‘서계 100리(西界百里)’의 영지를 봉해주어 서쪽 변방 수비를 전담시켰습니다.
    • 그러나 위만은 이 서계 100리를 근거지로 삼아 진·한 교체기 연·제·조의 망명 유민들을 대거 유인·포섭하여 은밀히 사병(私兵) 세력을 길렀습니다.
    • 마침내 기원전 194년, 위만은 준왕에게 급사를 보내기를 “한나라 군사가 열 갈래로 쳐들어오니(言漢兵十道至), 대궐로 들어가 숙위(경호)하게 해달라(求入宿衛)”는 거짓 첩보를 올렸습니다. 대궐을 지키러 온다는 구실로 왕검성 문턱까지 진군한 위만은 일거에 말머리를 돌려 준왕을 기습 공격(遂還攻準)하였습니다. 준왕은 불의의 기습을 받아 왕도를 빼앗기고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3. ‘배를 타고 바다로 달아나(走入海)’ 남천한 준왕과 전북 익산(금마) 한왕(韓王) 도읍:
    • 위만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왕도를 잃은 준왕은 패잔병과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육로가 아닌 배를 타고 바닷길로 달아나(將其左右宮人走入海) 남쪽 한(韓)의 땅에 이르렀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습니다.
    • 이 준왕의 남천지와 도읍에 대해 고려·조선 시기 한국 문헌들은 대체로 전북 익산 금마(金馬, 마한 건마국)를 지목합니다(모두 수백~천 년 뒤의 전승 기록입니다):
      • 앞서 인용한 『제왕운기』의 “준왕이 금마군(金馬郡)으로 옮겨 도읍하고 다시 백성을 다스렸다”는 기록.
      • 『삼국유사』 마한조: “위만이 조선을 침탈하자 기준이 바다로 들어가 남쪽으로 가서 마한을 열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조: 익산 미륵산성의 ‘기준성(箕準城)’ 전승과 ‘익산토성’ 유적, 청주 한씨(韓氏) 족보의 기자조선 계보(모두 후대의 전승·족보 기록이며 동시대 사료가 아니고, 유적의 축조 시기와 준왕의 연관성도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 없습니다).
    • 준왕 집단이 청동기·철기 문화와 관제, 농경 기술을 가지고 내려와 마한 지배층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그 규모와 영향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아 학계에서 논쟁 중입니다.
    • “그 후 혈통이 끊어졌으나 지금도 한인 중에 그의 제사를 받드는 자가 있다(其後絕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는 본문 구절은, 3세기 한인 사회에 준왕을 기억하고 제사하는 전승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위략』 계통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패수(浿水) 위치 논쟁과 해상 탈출로(海路)에 대한 사료 비판:
    • 준왕이 지키던 고조선과 위만이 건넌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해, 통설은 평안남북도 경계의 청천강이나 평양 대동강으로 비정합니다.
    • 그러나 사료 비판 연구자들은 『위략』과 『사기』에서 “진·한 교체기 연·제·조의 수많은 유민들이 패수를 건너왔다”는 지리적 거리감, 『수경(水經)』에서 “패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東入于海)”고 한 수류(水流) 방향, 그리고 전국시대 연나라 명장 진개(秦開)가 침공하여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았던 역사적 전개 등을 들어, 원래의 고조선 중심지와 패수가 요서의 난하(灤河)·조백하(潮白河) 또는 요동 방면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 만약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서·요동 연안이었다면, 준왕이 배를 타고 탈출한 ’바닷길(走入海)’은 발해만 연안에서 출발하여 황해를 건너 금강 하구(군산·익산 금마)로 직항한 고대 연안 항로였음을 시사합니다. 통설의 시각(대동강 하구 발항설)이든 비판적 시각(발해만 연안 발항설)이든, 준왕의 남천은 고대 해상 교통망을 통해 북방 고조선의 국가 체제와 문명이 한반도 남부 삼한(마한)으로 직결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역사의 전환점이었습니다.

3. 조선과 연나라의 각축 및 준왕의 남하 (위략 주석)

〔一〕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為界,朝鮮遂弱。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綰反,入匈奴,燕人衛滿亡命,為胡服,東度浿水,詣準降,說準求居西界,(故)〔收〕中國亡命為朝鮮藩屏。準信寵之,拜為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眾稍多,乃詐遣人告準,言漢兵十道至,求入宿衛,遂還攻準。準與滿戰,不敵也。

【번역】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옛날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연(燕)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하며 동쪽으로 영토를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습함으로써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자 했다.

그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언하자 비로소 멈추었다.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 역시 침공을 멈추었다.

그 후 자손들이 점차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명장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마침내 쇠약해졌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자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왕 부(否)가 즉위하였는데 진나라의 기습을 두려워하여 겉으로 진나라에 복속하였으나 조회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부가 죽자 그의 아들 준(準)이 섰다. 20여 년 뒤 진승과 항우가 봉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제·조나라의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준에게로 도망쳐 오니, 준은 이들을 서쪽 변경에 배치했다.

한나라가 노관(盧綰)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과 연나라는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도망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오랑캐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했다.

위만은 준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살게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의 울타리가 되겠다고 청했다. 준은 위만을 신임하고 총애하여 박사(博士)에 임명하고 규(圭)를 하사하며 1백 리의 영지를 봉해주어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위만이 망명자 무리를 유인하여 세력이 점차 커지자, 준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알리기를 “한나라 군사가 열 갈래로 쳐들어오니 대궐로 들어가 숙위(경호)하게 해달라” 하고는 마침내 군사를 돌려 준을 공격했다. 준이 위만과 싸웠으나 당해내지 못했다.

【역주: 위략(魏略)이 전하는 기자~위만 찬탈의 상세 서사】

  1. 본문(진수) 1행과 위략(배송지 주)의 관계:
    • 진수 본문 §2의 “준이 참호칭왕, 위만에게 공격받아 빼앗김(爲燕亡人衛滿所攻奪)” 한 줄을 풀어쓴 것이 이 위략 인용입니다. 본문은 결론, 주석은 내력이라는 『삼국지』 배송지주(裵注)의 전형적인 편찬 구조를 보여줍니다.
  2. 기자 후예 조선후→연(燕) 진개(秦開) 2천리 상실:
    • “주 쇠약에 연이 스스로 왕칭·동략 기도, 조선후도 왕칭·역격 기도→대부 예(禮)의 간언으로 중지→예의 서설(西說)로 연도 중지”는 전국 말기 연·조선의 대등 교섭을 전합니다. 이후 자손 교만→연 장수 진개가 서쪽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은 것은, 고조선 서방 영토 상실의 기점으로 한서 조선전과 일치합니다.
  3. 부(否)→준(準) 부자와 진·한 교체기 유민:
    • 진의 몽염(蒙恬) 장성 축조가 요동에 이르자 조선왕 부가 “겉으로 복속(略服屬秦)하되 조회 불참”한 것은 강대국 사이 생존책이었습니다. 부 사후 아들 준이 서고 20여 년 뒤 진승·항우의 난→연제조 백성 고통→준에게 망명, 준이 서방에 배치한 것은, 위만 이전부터 고조선 서계에 중원 유민 집단이 쌓였음을 보여줍니다.
  4. 노관(盧綰)-패수 경계와 위만의 ‘서계 청원→숙위 사기’ 수법:
    • 한이 노관을 연왕으로 삼아 패수(浿水)를 경계로 한 것, 노관 배반·흉노 도망 뒤 연인 위만이 호복(胡服)·동도패수(東度浿水)해 준에게 항복하고 “중국 망명자를 거두어 번병(藩屛)이 되겠다”고 청한 것, 준이 박사 임명·규 하사·백리 봉지로 서변(西邊)을 지키게 한 것, 위만이 망명당을 모아 “한병십도지(漢兵十道至)”를 핑계로 입숙위(入宿衛) 명분으로 역습한 것은, 위만 찬탈(기원전 194년) 전말의 가장 상세한 기록입니다.

4. 준왕의 후예 (위략 주석)

〔二〕 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

【번역】 『위략』에 이르기를, “준왕의 자식과 친족 중 본국(고조선)에 그대로 남은 자들은 그로 인하여 성씨를 참람하게 한씨(韓氏)로 고쳐 불렀다. 준왕은 바다 가운데서 왕 노릇을 하며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하였다.

【역주: ’모성한씨(冒姓韓氏)’와 해중단절(海中不往來)】

  1. 남은 자들의 한씨 칭성:
    • 준을 따라 남하하지 않고 옛 땅에 남은 왕자·친족이 한(韓)씨를 참람히(冒) 칭했다는 것은, ‘한(韓/漢)’이라는 명칭이 고조선 유민 사회에서 새로운 집단 정체성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한’ 명칭 기원을 설명하는 설 중 하나입니다.
  2. ‘준왕은 바다 가운데, 조선과 왕래 단절’:
    • 남천한 준 집단과 북쪽 위만조선이 해로(海路)를 사이에 두고 단절되었다는 것으로, §2 본문의 “바다로 들어가 한지에 거함(走入海居韓地)”과 호응합니다. 이후 위만조선 멸망·4군 설치(기원전 108)까지 남북이 별개 세계로 전개된 배경입니다.

5. 염사착(염사치)과 호래의 귀환 (위략 주석)

〔三〕 魏略曰:初,右渠未破時,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至王莽地皇時,廉斯鑡為辰韓右渠帥,聞樂浪土地美,人民饒樂,亡欲來降。出其邑落,見田中驅雀男子一人,其語非韓人。問之,男子曰:「我等漢人,名戶來,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為韓所擊得,皆斷髮為奴,積三年矣。」鑡曰:「我當降漢樂浪,汝欲去不?」戶來曰:「可。」(辰)鑡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縣言郡,郡即以鑡為譯,從芩中乘大船入辰韓,逆取戶來。降伴輩尚得千人,其五百人已死。鑡時曉謂辰韓:「汝還五百人。若不者,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辰韓曰:「五百人已死,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弁韓布萬五千匹,鑡收取直還。郡表鑡功義,賜冠幘、田宅,子孫數世,至安帝延光四年時,故受復除。

【번역】 『위략』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당초 우거(右渠)가 아직 격파되지 않았을 때 조선의 상(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망명해 갔는데 이때 백성 중 그를 따라 함께 빠져나가 산 자가 2천여 호였으며, 역시 조선과 조공이나 사신 왕래를 끊었다.

왕망 지황(地皇) 연간에 염사착(廉斯鑡, 또는 염사치)이라는 자가 진한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었는데, 낙랑군의 토지가 기름지고 백성들이 풍요롭고 즐겁게 산다는 말을 듣고 망명하여 항복하려 했다.

부락을 나오다가 밭 가운데서 참새를 쫓고 있는 남자 한 명을 보았는데 쓰는 말이 한인(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까닭을 묻자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나라 백성으로 내 이름은 호래(戶來)라 합니다. 우리 무리 1천 5백 명이 재목을 베러 산에 들어왔다가 한인(韓人)들의 기습을 받아 사로잡혀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염사착이 말하기를, “내가 이제 한나라 낙랑군에 투항하려 하는데 너도 함께 가겠느냐?” 하니 호래가 좋다고 했다.

이에 염사착이 호래를 데리고 함자현(含資縣) 관아로 나아갔다. 현에서 군에 보고하자 낙랑군에서는 곧바로 염사착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에서 큰 배를 타고 진한으로 들어가 호래를 맞이해 왔다. 이때 함께 사로잡혔던 동료 1천 명을 찾아내어 구출하였으나 나머지 5백 명은 이미 죽은 뒤였다.

염사착이 당시 진한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은 살아남지 못한 5백 명의 몸값을 물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군에서 만 명의 군사를 배에 태워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하였다. 진한이 말하기를, “5백 명은 이미 죽었으니 마땅히 보상금을 내놓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1만 5천 명과 변한의 삼베 1만 5천 필을 내어주어 염사착이 이를 거두어 돌아왔다.

낙랑군에서는 염사착의 공의(功義)를 조정에 표창하여 관책과 전택을 하사하였으니 자손 대대로 이어져 안제 연광 4년(서기 125년)에 이르기까지 부역을 면제받았다.

【역주: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 낙랑태수와 낙랑왕(최리)의 역사적 미스터리】

본 단락(서기 20~23년 왕망 연간의 호래·염사착 기사)과 앞뒤의 역사 연표를 비교해보면 한국 고대사의 대표적 쟁점인 ’낙랑군(郡)’과 ’낙랑국(國)’의 관계 및 복수 정치체 존재 가능성이 드러납니다. 학계에서도 이와 관련한 여러 이설과 사료적 의문들이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으나, 기존 주류 통설의 틀 안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보다 신중한 태도를 취해 왔습니다.

  1. 불과 10년 사이에 벌어지는 사료상의 충돌:

    • 서기 20~23년 (본문 『위략』): 진한 우거수 염사착이 호래를 데리고 투항한 곳은 명백히 ‘한나라 낙랑군(郡) 함자현’이며, 군(郡)이 관군을 파견하여 사건을 해결합니다.

    • 서기 30년 (『후한서』): 후한 광무제가 낙랑군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족장들을 현후로 봉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 서기 32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호동왕자 설화로 유명한 ‘낙랑국(樂浪國) 정벌’ 기사가 등장합니다. 옥저로 사냥을 나간 호동왕자를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어찌 북국(고구려) 신왕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라며 맞아들인 인물은 군의 지방관(태수)이 아니라 스스로 군주로 군림하던 ‘낙랑왕 최리(崔理)’였습니다.

  2. 낙랑태수(군현)와 낙랑왕(국가)은 어떻게 다른가? (학계의 주요 학설과 다양한 시각): 여기서 어느 한쪽의 입장을 섣불리 단정하여 또 하나의 가설을 더하기보다는, 원전 사료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틈새를 학계에서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해 왔는지 그 대표적인 학설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 [제1설] 토착 자치국가(왕국) 분립설 (별개 독립국설): 기원전 108년 설치된 한사군의 ‘낙랑군’ 외에, 대동강 유역 혹은 옥저·동예 일대에 고조선계 토착민이 세운 독자적인 왕국인 ’낙랑국(樂浪國)’이 따로 존재했다는 견해입니다. 최리(崔理)는 중국의 태수가 아니라 토착민을 다스리던 독립된 왕이었으며, 고구려는 군현인 낙랑군(313년 미천왕 때 축출)보다 280년 앞서 옥저 방면의 토착 왕국인 ’낙랑국’을 먼저 무너뜨렸다는 해석입니다.

    • [제2설] 왕망 전란기 토착 호족의 자립 왕국화설 (토인 왕조의 난과 최리): 기원전후 왕망(王莽)이 신(新)나라를 세우고 후한 광무제가 중원을 수습하기까지(서기 8~25년경), 중국 본토가 극심한 내전에 휩싸여 요동과 한반도 군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습니다. 이 공백기에 『후한서』 광무제본기에 기록된 “토인(土人) 왕조(王調)가 난을 일으켜 스스로 낙랑태수를 칭한 사건(서기 24~30년)”처럼, 토착 호족 세력이 중국 관아를 장악하고 자치 정권을 세웠습니다. 서기 30년 후한 광무제가 왕준을 보내 왕조를 주살하고 군현을 재정비하려 하자, 곧이어 서기 32년 고구려 대무신왕이 기습하여 이 자치 세력(최리의 낙랑국)을 멸망시킨 것으로 봅니다.

    • [결정적 사료] 서안평 공격 시 대방령 피살과 낙랑태수 처자 피랍: 『삼국사기』 태조대왕 94년(서기 146년) 기사에는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침공했을 때 대방령이 피살되고 낙랑태수의 처자가 사로잡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평양·황해도에 있어야 할 군현 최고 책임자 일가족이 요동 길목에서 피살·피랍된 이 사료는, 지방관의 요동 체류설(『신편한국사』)이나 군현의 요동 축선설 등 낙랑·대방의 실질적 통치 영역을 둘러싼 핵심 쟁점으로 논의됩니다(상세 논증은 부록 3·4 참조).

  3. ‘한인(漢人)’ 호래와 염사착 투항 기사의 역사적 의미:

    • 염사착이 “낙랑의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풍요롭다”며 투항한 것과, 벌목하던 호래 등 1,500명이 한인(韓人)에게 붙잡혀 노예가 되었다가 낙랑군의 위협으로 송환된 일화는, 왕망의 혼란기에도 낙랑군이 삼한 사회에 대해 군사적·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다만 『위략』의 기사로 사실성에는 비판적 검토가 필요합니다).
    • 중국 사관은 이를 “오랑캐가 천자의 군현에 항복해 왔다”는 틀로 서술했으나, 낙랑(군/국)과 한반도 남부 삼한 사회 사이의 인구 이동과 교섭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됩니다.
    • 삼한의 정치체가 한(漢)의 군현(낙랑군)과 교섭하고 투항·교류한 비교적 이른 시기의 사례로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4. 명칭과 한자 고증 (염사착 廉斯鑡 / 염사치 廉斯恥):

    • 독음 문제: 원문의 ’廉斯鑡’에서 마지막 글자 ‘鑡’(쇠스랑 착/치, Unicode U+9461)은 한자 음에 따라 ‘착’ 또는 ‘치’로 읽힙니다. 통설적 학계나 국역 사서에서는 관례적으로 ‘염사치’로 읽어왔으며, 판본과 문헌에 따라 ‘염사치(廉斯恥)’ 등으로 표기가 달리 전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한자 자음 그대로 ‘염사착’으로 표기하는 경향도 강합니다.

    • 한자 폰트 미표시(깨짐) 현상: ‘鑡’ 자는 사용 빈도가 낮은 고자/희귀자여서 일반 폰트 환경이나 일부 텍스트 뷰어에서 글리프 미지원으로 인해 네모(□)나 물음표 등으로 깨져 보일 수 있습니다.

    • 명칭의 성격: ‘염사착(염사치)’은 개인의 고유한 이름이라기보다는 ’염사(廉斯)’라는 지명·읍락(邑落)에 ’착/치(鑡/恥)’라는 거수·수장의 직함이나 우두머리 호칭이 결합된 형태로 해석하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훗날 『후한서』에 등장하는 ’염사읍군(廉斯邑君) 소마시(蘇馬諟)’ 기록 역시 같은 지명 계통으로 파악됩니다.)

  5. 낙랑군에서 진한으로 가는데 왜 큰 배를 타야 했는가? (해로 교섭과 사료 비판):

    • 본문의 의문점: 원문에 “잠중(芩中)에서 큰 배를 타고 진한으로 들어가(從芩中乘大船入辰韓)”라거나 “낙랑에서 1만 군사를 배에 태워 공격할 것이다(乘船來擊汝)”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만약 통설대로 낙랑군이 평양(대동강), 진한이 한반도 동남부(경상도 일대)라면, “육로가 있는데 왜 굳이 외해(서해·남해)를 도는 험난한 원거리 항해로 큰 배를 띄웠는가?”라는 지리적 의문이 제기됩니다.

    • 쟁점 1: 해상 수송로 활용설 (통설적 해명):

      • 기원전후 한반도 중부 내륙은 험준한 산악 지대이자 마한과 동예 등 수많은 독립 소국들이 웅거하고 있어 대규모 병력이나 1,000여 명의 포로, 1만 5천 필의 물자를 육로로 수송하기에는 약탈과 차단의 위험이 극도로 높았습니다.
      • 따라서 서해안-남해안 연안 항로(또는 강줄기 수운)를 이용한 해상 이동이 안전하고 효율적이었으며, 실제로 낙랑군은 일찍부터 서해 연안 해로를 통해 삼한 및 왜(倭)와 교섭해 왔다는 해석입니다.
    • 쟁점 2: 선박 수송력과 사료 비판설 (허구·과장설):

      • 반면, 왕망 시기(서기 20년대)의 변방 군현인 낙랑군이 1,000~1,500명의 인원과 배상 물품(진한인 1만 5천 명, 삼베 1만 5천 필)을 실어 나를 만한 대규모 대선단(수십 척의 대선)을 즉각 동원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회의론입니다. 당시 삼국시대 오나라의 최대 함선조차 수백 명 정원이었음을 감안할 때, 1만 5천 명 운운은 실록적 기록이라기보다 설화적 과장이 섞여 있거나 『위략』 편찬 당시(3세기 위나라)의 관점에서 소급 윤색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 쟁점 3: 낙랑군·진한 위치 재검토설 (재야사학 등):

      • 배를 타고 바로 진한에 들어갔다는 표현을 근거로, 낙랑군과 진한의 지리적 위치가 한반도 내륙 통설 구도와 다르거나 요동/발해만 연안 등 해만(海灣)을 사이에 둔 다른 지리적 환경이었을 것이라 보는 비판적 견해도 존재합니다.
    • 이처럼 염사착 기사는 단순한 투항 일화를 넘어, 초기 삼한과 낙랑군 사이의 연안 해로 개척, 해상 운송 능력, 그리고 『위략』 사료의 사실성과 설화성을 둘러싼 풍부한 역사지리학적 토론 주제를 던져줍니다.

  6. 국사편찬위원회 주석의 양상과 학계의 현실:

    •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역 주석 역시 한사군 요동설(정인보 등), 전한·후한 유물의 현격한 불균형, 그리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사군과 별개의 낙랑국 기사 등 학계 일각에서 여러 설과 중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각주(註 166)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 다만 기존의 ’평양 낙랑군설’을 주류 통설로 고수한 채, 이러한 사료적 모순들을 본격적으로 비판·규명하기보다는 “향후의 연구를 기대하여야 할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과제로 남겨둔 상태입니다. (상세한 사료 비판과 참고문헌 분석은 부록: 국사편찬위원회 낙랑 주석 비판과 한국 고대사 연구의 실태 참조)

6. 대방군 설치와 기리영 전투

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번역】 후한 환제와 영제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해져 군현에서 능히 제어하지 못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 들어갔다.

건안 연간에 요동의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을 신설하고,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유민들을 수습하고 군사를 일으켜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조금씩 흩어져 나왔다. 이 후로 왜와 한은 마침내 대방군에 복속되었다.

경초 연간에 명제(조예)가 은밀히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게 하였다. 한국의 여러 신지들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를 더하여 내려주고, 그 다음 우두머리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그 풍속이 관책(두건) 쓰기를 좋아하여 하호 백성들이 군의 관아에 조알하러 갈 때도 모두 관책을 빌려 쓰고 갔으니, 스스로 관복과 인수를 착용한 자가 1천여 명에 달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낙랑군이 본래 한국을 통할하였다 하여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군에 귀속시키려 하자, 관리와 통역 사이에 말이 오가며 불화가 생겼다. 신지들이 한인(韓人)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기습 공격했다.

이에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반격하여 토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하였으나 마침내 두 군이 한(韓)을 멸망시켰다.

【역주: 대방군(帶方郡)의 신설과 삼한·왜의 ’통제(복속)’의 구체적 실체】

  1. 대방군 신설의 배경과 지리적 위치:

    • 건안 연간(서기 204년경), 요동 군벌 공손강(公孫康)은 기존 낙랑군의 관할 구역이 너무 넓고 남쪽의 한(韓)·예(濊) 세력이 강성해지자, 낙랑군 남부의 둔유현(屯有縣) 이남을 떼어내 대방군(帶方郡)을 신설했습니다.
    • 대방군의 치소와 관할 영역에 대해서는 주류 학계(통설)에서 황해도 사리원(봉산 당촌리·당토성) 일대로 비정하는 반면, 사료 비판적 연구자들은 요하 동서 축선 등 요동 방면으로 비정하는 등 견해가 나뉩니다.
  2. 대방군 위치를 둘러싼 주요 논쟁점:

    • 통설(한반도설)의 근거와 재검토: 통설은 황해도 일대의 봉산 당촌리 고분군, 지탑리 당토성, 그리고 1911년 확인된 ‘사군대방태수장무이(張撫夷)’ 명문 벽돌 등을 대방군의 유력한 물질적 근거로 제시합니다. 다만 장무이묘의 축조 양식(4세기 고구려계 전축분 유사성)과 둔유현의 황주 비정 근거(음운 유추의 난점) 등을 둘러싸고 비판적 재검토가 활발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 요동·요하 축선설의 사료적 문제제기: 사료 비판 연구자들은 수양제 24군 진격로의 대방도 편성, 『진서』 지리지의 요동 평주(平州) 편제, 미천왕의 서안평-낙랑-대방 연쇄 정복 축선 등을 근거로 대방군이 한반도가 아닌 요동 방면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대방군 및 한사군 위치 논쟁의 상세한 사료 대조와 학설 비교는 부록 3·4 참조).

    • 관할 남계(南界) 논쟁: 대방군의 남쪽 끝이 어디까지 미쳤는가(한강 유역 목지국까지 포함하는가, 아니면 예성강 이북에 그쳤는가)도 쟁점입니다. §1의 “한은 대방 남쪽”과 §5의 염사착 기사(함자현·금중에서 대선으로 진한 진입), §11 독로국의 “왜와 접계” 서술이 남계 비정의 간접 자료로 쓰입니다.

      • 반면 주류 학계는 낙랑·대방계 고분·봉니(封泥)·기와의 출토 분포와 『관구검기공비』 등 금석문을 들어 한반도설을 지지하므로, 양측의 사료적 논증을 입체적으로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삼한과 왜를 ’통제·복속(是後倭韓遂屬帶方)’했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 독자들께서 흔히 “군현이 삼한과 왜를 직접 지배하고 통치했는가?”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통제와 복속은 직접적인 영토 지배나 행정 통치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외교·교역적 우위와 간접 통제를 의미합니다:

    • 조공·무역 창구의 독점: 삼한 소국들과 일본 열도의 왜(倭)가 중원 왕조와 무역하거나 사신을 파견할 때, 대방군을 거쳐야 하는 ‘공식 대외 창구’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이해됩니다(왜인전의 야마타이국 사신도 대방군을 경유하여 낙양으로 감).

    • 인수(印綬)와 관책(두건) 하사를 통한 위계화: 대방군은 삼한의 유력 군장(신지)들에게 한나라·위나라의 공식 관직(읍군, 읍장)과 은인청수(은도장과 푸른 끈), 관복과 두건(의책)을 하사하여 군현의 우월한 권위를 인정받는 질서를 구축했습니다. 본문에 “관복과 인수를 받은 자가 1천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바로 이 간접 통제망을 보여줍니다.

    • 군사적 정벌과 유민 수습: 군현의 통제를 벗어나거나 한강 이남으로 유입된 유민들을 군사력(공손모, 장창 등의 군대)으로 억누르고 조공 관계를 유지시켰습니다.

  4. 기리영(崎離營) 전투와 ’이군수멸한(二郡遂滅韓)’의 진실:

    • 서기 246년경 부종사 오림이 진한 8국을 낙랑군으로 분할 이관하려 하자(통역 과정의 불화도 겹쳐) 이에 격분한 한(韓)의 소국들이 연합하여 대방군의 직할 요새인 기리영(崎離營)을 맹공격했습니다.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할 만큼 격렬한 항쟁이었습니다.
    • 본문에 “두 군(낙랑·대방)이 마침내 한을 멸망시켰다(二郡遂滅韓)”고 기록된 것은 삼한 전체가 소멸한 것이 아니라, 기리영을 공격했던 한(韓)의 신지 세력을 반격하여 진압했음을 과장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공격 세력의 정체를 목지국이나 초기 백제 등 특정 세력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사료상 확정할 수 없습니다.

7. 마한의 풍속, 소도와 천군

其俗少綱紀,國邑雖有主帥,邑落雜居,不能善相制御。無跪拜之禮。居處作草屋土室,形如冢,其戶在上,舉家共在中,無長幼男女之別。其葬有槨無棺,不知乘牛馬,牛馬盡於送死。以瓔珠為財寶,或以綴衣為飾,或以縣頸垂耳,不以金銀錦繡為珍。其人性彊勇,魁頭露紒,如炅兵,衣布袍,足履革蹻蹋。其國中有所為及官家使築城郭,諸年少勇健者,皆鑿脊皮,以大繩貫之,又以丈許木鍤之,通日嚾呼作力,不以為痛,既以勸作,且以為健。常以五月下種訖,祭鬼神,群聚歌舞,飲酒晝夜無休。其舞,數十人俱起相隨,踏地低昂,手足相應,節奏有似鐸舞。十月農功畢,亦復如之。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之為蘇塗。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而所行善惡有異。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無他珍寶。禽獸草木略與中國同。出大栗,大如梨。又出細尾雞,其尾皆長五尺餘。其男子時時有文身。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髡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豬。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巿買韓中。

【번역】 그 풍속은 기강과 규율이 적다. 국읍에 비록 주수(主帥)가 있으나 부락들이 뒤섞여 살아 능히 서로를 잘 제어하지 못한다. 꿇어앉아 절하는 예법이 없다.

거처는 풀로 엮은 지붕에 흙으로 방을 만드는데 그 모양이 무덤(冢)과 같고 출입문은 지붕 위쪽에 있어 온 집안 식구가 한 방 가운데 섞여 살아 남녀와 어른 아이의 구별이 없다.

장례를 치를 때는 덧널(槨)은 쓰되 널(棺)은 쓰지 않는다. 소와 말을 탈 줄 모르며 소와 말은 모두 죽은 자를 보내는 순장용으로 다 써버린다.

구슬(瓔珠)을 재물과 보배로 여겨 혹은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에 걸거나 귀에 늘어뜨리며, 금과 은, 비단과 자수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의 성품은 굳세고 용맹하다. 상투를 드러내고 묶은 모습이 마치 불꽃머리 군사(炅兵)와 같으며, 삼베 도포를 입고 짚신이나 가죽신(革蹻)을 신는다.

나라 안에 큰 토목 공사가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할 때면, 혈기 왕성한 젊은 장정들이 모두 자신의 등가죽을 뚫고 굵은 밧줄을 꿰고 1장(丈) 남짓한 나무막대를 꽂아 온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쓰되 아파하지 않으니, 이를 통해 부역을 독려하고 또한 용맹함을 과시한다.

항상 5월에 씨 뿌리기를 마치고 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무리 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밤낮으로 술을 마셔 쉬지 않는다. 그 춤은 수십 명이 일제히 일어나 서로 뒤를 따르며 땅을 밟고 몸을 낮추었다가 솟구치며 손과 발이 서로 장단을 맞추니 그 박자와 가락이 흡사 탁무(鐸舞: 방울춤)와 비슷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다시 이와 같이 제사를 지낸다.

귀신을 깊이 믿어 국읍마다 각기 한 사람을 세워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니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마다 각기 특별한 별읍(別邑)을 두고 이를 ’소도(蘇塗)’라 부른다. 큰 나무를 높이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두고 귀신을 섬긴다. 죄를 짓고 도망쳐 들어온 자는 누구라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도적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소도를 세우는 취지는 불교의 부도(浮屠, 절/탑)와 서로 비슷하지만 행하는 선악에는 차이가 있다.

그 북방 군현에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예법과 풍속을 조금 알지만, 먼 곳에 있는 부족들은 흡사 죄수나 노비들이 모여 사는 것과 같다. 다른 진기한 보물은 없으며 날짐승과 길짐승, 풀과 나무는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커다란 밤이 산출되는데 배(梨)만큼 크다. 또 가는 꼬리의 닭(세미계)이 나오는데 꼬리 길이가 모두 다섯 자(五尺)가 넘는다.

남자들은 때때로 몸에 문신(文身)을 새긴다.

또 ’주호(州胡: 제주도/탐라)’라는 족속이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살고 있다. 사람들의 키는 다소 작고 언어는 한인(韓人)과 같지 않으며,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깎고 가죽옷만 입으며 소와 돼지를 잘 기른다. 그들의 옷은 상의만 있고 하의가 없어 흡사 발가벗은 모양새이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역주: 소도(蘇塗)와 천군(天君)의 제정분리(祭政分離)】 삼한 사회에서 정치적 지배자인 ‘신지(臣智)’·’읍차(邑借)’와 별도로, 천신에게 제사를 주관하는 종교적 지도자 천군(天君)과 신성 구역인 소도(蘇塗)가 존재했다는 점은, 삼한이 제정분리(祭政分離)에 가까운 단계였음을 시사하는 자료로 흔히 해석됩니다(다만 소도의 구체적 실체와 성격은 학계에서 논쟁 중입니다). 죄인이 도망쳐 들어가도 돌려보내지 않는 소도의 성격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전 아실룸(Asylum) 피난처 제도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8. 진한 12국과 유래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為邦,弓為弧,賊為寇,行酒為行觴。相呼皆為徒,有似秦人,非但燕、齊之名物也。名樂浪人為阿殘;東方人名我為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今有名之為秦韓者。始有六國,稍分為十二國。

【번역】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곳의 늙은이들이 대대로 전하기를, 옛날 진(秦)나라의 가혹한 노역을 피하여 한국으로 망명해 오자 마한이 동쪽 국경 지대의 땅을 떼어주어 살게 했다고 한다.

성책(城柵)을 두고 산다. 그들의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아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 하며, 도적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를 부를 때 모두 ’도(徒)’라 하니 흡사 진나라 사람과 같으며, 단지 연·제나라의 이름이나 말뿐만이 아니다.

낙랑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부르는데, 동방 사람들이 나(我)를 ’아(阿)’라 부르니 낙랑 사람은 본래 자신들의 남은 잔여 백성(殘人)이라는 뜻이다. 지금 이들을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자도 있다.

처음에는 6개국이 있었으나 점차 갈라져 12개국이 되었다.

【역주: 진한(辰韓)의 ‘피진역(避秦役)’ 설화와 사로 6촌(신라의 기원)】

  1. ‘진(秦)나라 망명객’ 설화의 사료 비판:
    • 본문에는 진한의 노인들이 “진(秦)나라의 만리장성 축조 노역을 피해 건너왔다”고 하여 ’진한(秦韓)’이라 불렀다고 전합니다.
    •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글자 그대로 진나라 본토인이라기보다는, 진·한 교체기(기원전 3~2세기)에 고조선과 요동 방면을 거쳐 한반도 동남부(경주·대구·영천 등)로 이주해 온 고조선계 유이민 집단이 자신들의 연원을 중국 문명과 연결 지어 윤색한 설화로 봅니다.
    • 이들이 가져온 철기 문화와 축성 기술이 토착 마한·진한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2. ’처음 6국에서 12국으로’와 신라 6촌(六村):
    • 본문에 “처음에는 6개국이 있었으나 점차 갈라져 12개국이 되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경주 분지의 사로 6촌(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자산진지촌, 무산대수촌, 금산가리촌, 명활산고야촌)’과 연관 지어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다만 6촌 전승은 후대 기록이며 진한 6국과의 직접 대응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 『삼국사기』는 이 6촌이 박혁거세를 옹립하여 사로국(斯盧國)을 세웠다고 전하며, 사로국이 주변의 진한 소국들을 차례로 병합하며 신라(新羅)로 성장했다고 이해됩니다.

9. 변진 12국과 삼한의 철 및 풍속

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別邑,各有渠帥,大者名臣智,其次有險側,次有樊濊,次有殺奚,次有邑借。有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為王。〔一〕土地肥美,宜種五穀及稻,曉蠶桑,作縑布,乘駕牛馬。嫁娶禮俗,男女有別。以大鳥羽送死,其意欲使死者飛揚。〔二〕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飲酒。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兒生,便以石厭其頭,欲其褊。今辰韓人皆褊頭。男女近倭,亦文身。便步戰,兵仗與馬韓同。其俗,行者相逢,皆住讓路。

【번역】 변진(弁辰) 역시 12개국이 있으며,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 각기 우두머리가 있다. 큰 자는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험측(險側)’, 다음은 ‘번예(樊濊)’, 다음은 ‘살해(殺奚)’, 다음은 ’읍차(邑借)’라 부른다.

소국들로는 이미저국, 불사국, 변진미리미동국, 변진접도국, 근기국, 난미리미동국, 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 염해국, 변진반로국, 변진낙노국, 군미국, 변진미오사마국, 여담국, 변진감로국, 호로국, 주선국,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금관가야), 변진조조마국,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아라가야), 변진독로국, 사로국(斯盧國: 신라의 전신), 우유국 등이 있다.

변한과 진한을 합치면 24개국으로 큰 나라는 4~5천 가구, 작은 나라는 6~7백 가구이며 총 4~5만 호에 달한다. 그중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속한다. 진왕은 늘 마한 사람으로 삼아 대대로 잇게 하였으며 진왕이 스스로 왕으로 자립하지는 못한다.

토지는 기름지고 아름다워 오곡과 벼(벼농사)를 심기에 알맞다. 누에치기를 알아 비단과 베를 짜며 소와 말을 수레에 매어 탄다. 혼인 예법은 남녀의 구별이 엄격하다.

사람이 죽으면 큰 새의 깃털(조우)을 넣어 장사를 지내는데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려는 뜻이다.

나라에서 철(鐵)이 산출되는데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와서 이를 캐어간다. 시장의 모든 매매는 철을 사용하니 마치 중국에서 동전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과 대방 두 군에도 철을 공급한다.

【역주: 삼한의 철(鐵) 생산과 동아시아 화폐적 교역망】 변진(가야·신라 지역)의 풍부한 철은 단순한 무기나 농기구 재료를 넘어 “중국에서 동전을 쓰듯 시장에서 화폐로 통용”되었으며, 낙랑·대방 두 군현은 물론 바다 건너 왜(倭)에까지 수출되었습니다. 이는 삼한 남부 해안 지대가 고대 동아시아 철기 문명과 해상 중계무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풍속에 노래와 춤, 음주를 즐긴다. 슬(瑟)이라는 현악기가 있는데 모양이 축(筑)과 비슷하고 뜯으면 아름다운 곡조가 난다.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드니(편두/褊頭), 지금 진한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 왜(倭)와 가까운 곳의 남녀는 역시 문신을 새긴다. 보병 전투에 능하며 무기는 마한과 동일하다.

그 풍속에 길을 가다가 서로 마주치면 모두 멈추어 서서 길을 양보한다.

【역주: 조우장(鳥羽葬)·편두(褊頭)·문신과 길 양보】

  1. 조우(鳥羽)로 장사(送死) - 비승(飛揚) 관념:
    • “큰 새의 깃털을 넣어 죽은 자가 날아오르게 한다”는 것은, 부여의 순장·곽(槨), 고구려의 적석총·후장, 예의 책화 상벌과 또 다른 삼한 남부의 승천(昇天) 내세관입니다.
  2. 편두(아이 머리 돌로 누름)와 문신:
    • 출생 직후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는 “지금 진한 사람이 모두 편두”라 할 만큼 집단 표지였고, “왜와 가까운 곳은 문신”이라는 것은 남해안-대마-규슈로 이어지는 해인(海人) 문화 접촉대를 보여줍니다(왜인전 §2 문신 역주 참조).
  3. 보병전(步戰)과 길 양보 예법:
    • “보병전에 능하고(便步戰) 행인이 마주치면 멈춰 양보”한다는 것은, 기병 중심 북방(오환·선비·고구려)과 달리 삼한 남부가 보병 중심의 촌락 사회였음을 시사합니다.

10. 진왕과 가옥 구조 (위략 주석)

〔一〕 魏略曰:明其為流移之人,故為馬韓所制。

【번역】 『위략』에 이르기를, “진한 사람들은 본래 타향에서 흘러 들어온 유이민(流移之人)이었음이 명백하므로 마한의 통제를 받았다” 하였다.

〔二〕 魏略曰:其國作屋,橫累木為之,有似牢獄也。

【번역】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 통나무를 가로로 쌓아 올리니(귀틀집), 그 모양이 마치 감옥과 비슷하다” 하였다.

【역주: ’유이민(流移之人)’과 귀틀집】

  1. “유이민임이 명백하므로 마한의 제를 받음(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
    • §8의 “진(秦) 노역 피난 망명→마한이 동계지(東界地)를 떼어줌” 설화와 같은 논리로, 진한=외래 유이민이므로 토착 마한(진왕)의 통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위략 편자의 설명입니다. ‘처음 6국→차츰 12국’ 분화(§8)와 함께 진한 사회의 형성사를 보여줍니다.
  2. 횡누목(橫累木) 가옥과 ‘흡사 감옥’:
    • 통나무를 가로로 쌓는 귀틀집(井幹式)은 목재가 풍부한 산간 지역에서 흔한 구조로, 부여전 §1의 “성책을 둥글게 쌓아 흡사 감옥(有似牢獄)”과 같은 표현이 쓰였습니다. 중원 편자가 낯선 목조 건축을 옥(獄)에 비유한 것으로, 예의 “병사면 옛집 버리고 새로 지음”(예전 §1)과 대조되는 정착 가옥 양식입니다.

11. 변진의 독특한 풍습

弁辰與辰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言語法俗相似,祠祭鬼神有異,施灶皆在戶西。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其人形皆大。衣服絜清,長髮。亦作廣幅細布。法俗特嚴峻。

【번역】 변진(弁辰)은 진한과 뒤섞여 살며 역시 성곽을 두고 있다.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도, 풍속이 서로 비슷하나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예법에는 차이가 있으며 부엌을 설치할 때 모두 방 문 서쪽에 둔다.

그중 독로국(瀆盧國)은 왜(倭)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12국에도 각기 왕이 있으며 사람들의 체격은 모두 장대하다. 옷은 깨끗하게 빨아 입고 머리를 길게 기른다. 너비가 넓은 고운 베(광폭세포)를 짠다. 법도와 풍속이 유달리 엄격하고 준엄하다.

【역주: 변한(弁韓) 12국과 가야(加耶) 연맹체의 형성】

  1. 변한 소국들과 가야 연맹의 대응 관계(비정):
    • 본문에 나열된 변한 12국의 명칭은 훗날 가야(加耶) 제국의 전신으로 비정되며, 개별 비정에는 이설이 있습니다:

      •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김해의 금관가야(본가야)로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

      •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함안의 아라가야(안라국)로 후기 가야의 외교 중심지.

      •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고성의 소가야(고자국).

      •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성주의 성산가야(벽진국) 또는 고령 대가야(반로국)의 전신.

  2.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의 의미:
    • 독로국은 오늘날의 부산 동래(東萊) 또는 거제도 방면으로 비정됩니다.
    • “왜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與倭接界)”는 것은 실제로 육지가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쓰시마섬(대마도) 및 규슈 북부의 왜인들과 배를 타고 직접 왕래하며 해상 무역과 외교를 빈번히 나누던 최전방 항구 관문이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풍부한 철(鐵)을 매개로 낙랑·대방과 왜를 연결하던 남해안의 해상 교역망은 훗날 가야가 철 생산과 해상 교역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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